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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대가족_인터뷰1] 가회동의 김경종*김창숙씨 가족 열두명 한 지붕 네 가족을 꿈꾸며
이 가족은 가까운 동네에 살림집과 일터를 두고, 부모님이 살던 집을 남매끼리 나눠쓰기도 하면서 ‘헤쳐 모여’ 살고 있다. 일에 몰두할 때는 따로 살다 순식간에 한 지붕 아래 모여 정답게 지내는, 말 그대로 新대가족이다. 조만간 ‘패밀리 하우스’를 만들어 ‘한 지붕 네 가족’으로 살 계획인 이들. 그 행복의 중심엔 자식들 입에 기쁨과 웃음소리 하나씩 먹여 키워내려 애쓴 부모의 성실한 삶이 있었다.


다정하고 나른한 다갈색, 손에 닿으면 몸도 따뜻해질 것 같은 다정한 다갈색 벽돌집 앞에 열두 명의 가족이 모여 앉았다. 콘크리트 담도, 벽돌도, 바람도 나이든 종로구 가회동 골목길에 이들의 새싹 같은 웃음이 퍼져 나간다. 곧 고희라는 귀한 나이가 찾아올 할아버지 김경종 씨부터 세상 맛본 지 이제 넉 달째인 손주 김규원까지. 가회동 30년 터줏대감인 김경종·김창숙 씨 부부는 오른쪽 ‘종로부동산’ 주인장이고, 이들의 큰딸 김숙경, 맏사위 정기주 씨는 얼마 전에 부동산 옆 카페 ‘후스 테이블’을 열었다(가회동 ‘후스 테이블’은 멋쟁이 청춘들에게 한창 인기 좋은 계동 ‘후스 테이블’의 2호점이기도 하다). ‘후스 테이블’이 있는 자리는 김경종 씨 부부가 얼마 전까지 세탁소를 하던 곳이다. 이 벽돌집의 지근거리에 열두 명의 가족 모두가 ‘따로 또 같이’ 산다.

김경종 씨 부부가 가업을 일군 가회동 집의 1층엔 아들 김기훈 씨 가족, 2층엔 큰딸 김숙경 씨 가족이 살고 있다. 김경종 씨 부부도 이웃에 살고, 작은딸 김미경 씨 가족은 아랫 동네인 낙원동에 터를 잡았다. 이렇게 ‘따로 또 같이’ 사는 이 가족은 걸레로 방 훔치다가 문득 생각나면 부모님 집에 들러 어깨 주물러드리고, 풍란에 물 주다가 문득 생각나면 큰딸네 카페에 들러 냉 커피 한잔 얻어 먹고 온다. 맏사위 정기주 씨가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나는 날에 들르는 곳도 장인 김경종 씨의 집이다. 이렇게 매일 매일 ‘헤쳐 모여’ 하며 사는 열두 명의 가족.

(오른쪽) 이 가족의 기둥인 김경종·김창숙 씨 부부. 큰딸 내외의 ‘후스 테이블’ 옆에서 종로부 동산을 운영한다.

한 울타리 여러 살림
너무 한데 뭉치지 않고 적당히 뭉쳐 사는 ‘한 울타리 여러 살림’을 택한 이들은 부모든 자식이든 마음의 짐이 훨씬 가볍다. 자신들 삶을 스스로 책임질 수 있고, 갈등이 생길 기회도 한 지붕 살림보다 적다. 함께 살며 시부모 눈치 보다 내 자식 챙겨주지 못하는 것 같아 미안해할 일도 없다. 멀리 살아 명절 때, 생신 때만 가슴에서 해돋듯이 그분들 기억해내는 불효자가 될 일도 없다. 부모들은 외로워도 외롭다 말하지 못하고 고독해도 인내하며 살아야 하는 갑갑한 더부살이를 하지 않아 좋다. 그렇게 ‘적당히 따로 살다’ 어느 순간 한 지붕에 모이면 다시 사이가 정겹게 깊어진다. 그렇게 이 가족은 동거와 분가를 현명하게 절충해 살고 있다.

‘한 울타리 여러 살림’이 만든 독립 정신은 자녀 세대뿐만 아니라 부모 세대를 더 당당하게, 더 건강하게 살게 하는 원천이다. 이제 베짱이처럼 살 때도 됐는데 김경종 씨 부부는 여전히 바지런하다. ‘종로부동산’ 주인으로, 동네 통장님으로 바지런히 움직인다. 산다는 건 움직인다는 것임을, 해야 할 일이 있고 지켜야 할 무엇인가가 있다는 의무감이 삶의 지지대가 되어준다는 것임을 자식들에게 몸소 보여준다. “손에 쥔 것 하나 없이 젊음만 챙겨서 상경한 부모님은 사글셋방에서 세 아이 키우며 고생도 많이 하셨대요. 아버지는 젊을 때 부동산, 우유 배달 할 것 없이 하루에 네 가지 직업을 넘나드는 일명 ‘포잡 맨four job man’이셨다네요. 어머니가 30대에 뇌출혈로 쓰러지셔서 고생이 더하셨는데도, 자식 셋에게 그 비싼 그림 공부까지 시키셨어요. 그렇게 사는 부모님을 보고 자랐으니 자식들이 허투루 살 수 있나요?” 시름 딛고 한 세상 잘살아낸 장인, 장모 이야기를 아들 같은 맏사위 정기주 씨가 전한다.

김경종·김창숙 씨 부부는 식솔들 밥 벌어 먹이느라 물기, 기름기 다빠졌지만, 또 그렇게 성실하게 살아 삶의 옹이가 박힌 진짜 철학을 갖게 된 부모들이다. 하늘이 우리에게 몸이든 마음이든 그냥 보내주는 것이 아니라 다 쓰라고 내줬는데, 무엇이든 안 쓰면 걷어가는 것이 세상 이치라고, 힘도 안 쓰면 걷어가고, 재주도 안 쓰면 걷어가는 것이니 몸 성한 날까지 부지런히 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뭐 별건 없고 항시 자식들에게도 이런 이야기만 해요. ‘열심히 살다 보면 돈도 따라온다, 돈에 욕심 부리지 말아라, 제일 중요한 건 형제 우애다.’ 원래 아이들 어릴 때부터 가족은 모여 살아야 한다는 신념 같은 게 있었어요. 서로 모여 살다 보면 하나라도 배울 점이 있죠. 내가 양보하고 또 네가 양보하고 그러면서 살면 힘든 것도 다 해결돼요.” 부모의 단출하고도 옹골진 철학은 자식들에게 부드러운 회초리가 되고 있다.

사랑보다 오지랖 넓은 정으로 똘똘!
이제 자식들도 자식 거느린 아비 어미가 되었다. 부모님 모습을 본따 살아서인지 모두 자기 식솔을 살뜰히 챙기는 가장이 됐다. 그림 그리는 큰딸 김숙경 씨는 가구 만드는 디자이너 정기주 씨를 만나 시후를 낳았다. 그후 요리를 좋아하는 정기주 씨(이탈리아 국제 요리 학교 ICIF에서 요리 공부까지 했다)가 가구 작업실이 있던 장인어른의 빌라 1층에 계동 ‘후스 테이블’을 냈다. 김숙경 씨는 그 건물 위층에서 아이들에게 회화를 가르치는 ‘후, 흙과 그림 작업실’을 열고 있다.

같은 공간에서 동생 김미경 씨는 도예 교실을 열었다. 시후의 개인전(여덟 살에 개인전을 연 명실상부한 화가다) 리플렛을 디자인하는 그래픽 디자이너로 만난 윤시호 씨를 형부 정기주 씨가 처제 김미경 씨에게 중신을 서, 지금은 부부가 됐다. 여덟 달배기 딸 지안이도 얻었다. 정기주 씨의 살림집 아래층에 사는 처남(김숙경 씨의 남동생) 김기훈 씨는 몽돌처럼 야무진 두 아이 규민이와 규원이의 아빠다. 현재 이촌동에서 ‘나무와 화덕 피자’를 운영하고 있다. 김기훈 씨는 LG디자인연구소 출신이고, 그의 아내 이진아 씨는 미술사를 전공했으니, 그야말로 이 가족은 ‘예술과 디자인’으로 뭉친 가족이라 할 만하다. 당연히 세 부부는 ‘코드가 제대로 맞는다’.

1 큰딸 김숙경 씨와 맏사위 정기주 씨, 손자 정시후. 이 가족은 부모님의 세탁소가 있던 자리에 카페 ‘후스 테이블’을 열었다.
2 아들 김기훈 씨, 며느리 이진아 씨, 손주 김규민, 김규원. 부모님이 살던 가회동 집을 큰누나 가족과 나눠 쓰고 있다.
3 둘째 딸 김미경 씨, 둘째 사위 윤시호 씨, 손주 윤지안. 가회동과 지척인 안국동에 살며 가족 간의 도타운 정을 나누고 있다.


이 가족은 서로를 ‘정서방’ ‘처제’ ‘처남’ ‘시매부님’ 대신 ‘기주’ ‘미경이’ ‘기훈이’ ‘오빠’라 부른다. 어르신들 들으시면 혼날 일이겠지만 오래 함께 지내다 보니 거추장스러운 존칭이 자연스레 없어지더란다. 시누이, 처형 등과도 눈치 보며 공대할 것 없이 한 식구처럼 스스럼없이 지내기 때문이다. “인연으로만 쳐도 꽤 오래되었어요. 장인어른이 40대 때 처음 뵈었으니까요. 그 당시 한창 유행하던 영화 <그랑블루>의 포스터를 아내 방에 붙여준다는 핑계로 첫 입성을 시작한 이래 우리 집처럼 드나들었죠. 처남 기훈이가 고등학생 때 화실에 태워다주고 데려오는 당번이 저였는걸요, 뭐. 이웃 사람들은 아직도 저를 이 집 아들로아는 이가 많아요. 워낙 오랜 시간 장인어른, 장모님, 처제, 처남과살 부대끼며 살다 보니 말 그대로 제2의 피붙이가 된 것 같아요. 저희 결혼하기 전 상견례도 병원에서 할 정도로 제 아버지가 큰 병을 앓으시다가 결혼 전에 돌아가셨어요. 결혼식 때 장인어른이 딸에겐 7쪽짜리, 사위인 저에겐 11쪽짜리 편지를 주시더라고요. ‘이제 너는 내 친아들이다. 나는 널 언제까지나 기주로 부르고 싶다. 기주야. 가족끼리 오붓하게 된장찌개 먹고 사는 게 행복이다, 큰 욕심 없이 살아라’ 이렇게 쓰여 있는 편지였어요. 그때부터 정말 아버지와 아들처럼 살죠.”

정기주 씨가 풀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 오가며 <그랑블루> 포스터를 붙여준 그 방은 지금 시후의 방이 됐다. 사실 사람과 사람이 살 비비며 사는 일이니, 늘 꽃길일 수야 있을까. 이들도 아주 가끔은 작살 같은 말로 인정 사정 없이 찔러대기도 한다. 하지만 이내 돌아서서 미안해하는 그런 가족이 됐다. 또 가끔은, 나이 먹어 부리는 투정은 효도라며 부모님께, 장인장모님께 철없이 ‘굴어드리게도’ 됐다. 시간이 쌓여 만들어진 끈끈한 정, 사랑보다 오지랖 넓은 정이 이들에게 생겼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가끔은 ‘나의 묵묵부답’과 ‘상대방의 안절부절’이 범벅으로 채워지는 날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콩고물 쏟아지는 소리 내며 정겹게 웃고 말 것이다. 가족이니까.

이들은 내년쯤 계동에 자칭 ‘패밀리 하우스’를 만들어 모여 살 생각이다. 부모님은 3층, 자식 셋은 1,2층을 나눠 쓰고, 4층엔 아이들만의 놀이 공간을 만들고, 계단은 공동 도서관처럼 꾸미고…. 아마도 공사는 ‘후스 테이블’의 인테리어를 훌륭히 해낸 큰딸 내외가 맡게 될 것이란다. 그렇게 ‘한 지붕 네 가족’이 되면 아침마다 할아버지가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손자들의 늦잠을 채근하는 날이 이어질 것이다. 이들이 사랑하는 음식 재료나 요리를 담은 가족만의 책을 내겠다는 꿈도 조금 앞당겨질지 모른다. 사랑보다 오지랖 넓은 정으로 뭉친 열두 명의 가족, 이들이 맞는 또 한번의 가을이 여우볕처럼 지나가버릴 것 같아 서둘러 가족 사진 한 방 박는다. ‘사위 아닌 아들’ 정기주 씨의 선하게 쭉 째진 눈이 영락없이 장인어른을 닮았다.

패션 스타일링 박명선

글 최혜경 기자 사진 민희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1년 9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