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래전부터 엄마는 다달이 이웃 돕기 성금을 어디론가 보내고 계셨다. 굿네이버스뿐만 아니라 몇 개의 단체에 정기적으로 후원금을 보내셨고, 우리 집 식탁 위에는 늘 <굿네이버스> 소식지를 비롯한 엄마의 ‘후원 흔적’이 올라와 있었다.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그 소식지를 슬쩍 훑어보곤 했다. 그러다 중학생 때 <굿네이버스> 소식지에서 에티오피아 해외 사업장 방문자 모집 공고를 보게 됐다. ‘진짜 여행다운 여행을 다녀오려면 아프리카로 가야 한다’ ‘정말 볼 것도 많고 사파리 여행이 정말 좋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아프리카라는 대륙을 동경해왔다. 가보고 싶은 여행지로 말이다. 그래서 이 공고를 보자마자 엄마를 졸랐다. 그냥 아프리카로 여행을 가자고 하면 비용이 많이 든다며 보내주실 것 같지 않아 해외 봉사를 떠나자며 엄마를 설득했다. 엄마는 “이번엔 사정이 있어서 엄마가 같이 갈 수 없네. 다음에 더 자라면 너 혼자라도 보내줄게”라고 하셨다.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했다. 엄마 없이 그 먼 곳까지 간다는 게 겁이 났다.
그렇게 몇 년 동안 난 식탁에 놓인 소식지를 보며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해외에 거주하는 어려운 형편의 아이들 소식을 간접적으로 접했다. 물론 소식지를 다 읽지는 못하고, 아프리카 해외 사업장 방문 공고를 기다리며 소식지의 마지막 장만 들춰볼 때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아프리카 해외 사업장 공고가 났다! 탄. 자. 니.아! 나는 바로 “엄마!! 나 여기 갈래. 혼자 가도 돼!”라고 외쳤다. 당시 나는 입시 전쟁을 앞둔 고등학생이다 보니 엄마가 괜찮겠냐고 조심스레 물으셨다. 사실 좀 고민했다. 그다지 좋은 성적도 아닌 내가 고 2 여름방학에 아프리카엘 가는 게 과연 괜찮은 선택일까. 그 순간 나는 ‘봉사 시간’이 떠올랐다.
고등학교 3년 이내에 30시간의 봉사 활동을 해야 하는데 이걸로 채우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난 중학교 때부터 제대로 봉사를 해본 적이 없었다. 딱 한 번 영유아보호소에 가서 아이들을 돌본 경험을 제외하고는 교내 행사 참여나 반장이라는 명목 아래 봉사 시간을 채운 게 전부였다. 그러다 보니 봉사 활동을 통해 뭔가를 느낄 수 있는 시간이 제대로 없었다. 이번 탄자니아행은 뭔가 뜻깊은 봉사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내 이야기를 들으시고 엄마는 동생과 함께 다녀오라고 권하셨다. 결국 나는 동생과 탄자니아 해 외 봉사단에 참가하게 되었다.
음주리! 음주리!
두 번의 오리엔테이션을 마치고(난 한 번밖에 참가하지 못했지만) 우리는 탄자니아로 떠났다. 길고 긴 비행을 거쳐 도착한 탄자니아는 숨 쉬기 힘들 정도로 더울 거라는 예상과 달리 우리나라보다 훨씬 덜 더웠다. 건기인 지금이 탄자니아에선 겨울과 같은 시기라고 했다. 도착한 다음날, 우린 라피키 데이케어센터를 방문했다. 이런 곳에 학교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가는 길이 너무나 험했다. 달리고 또 달려 라피키 데이케어센터에 도착한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말도 통하지 않고 피부색도 달라 쉽게 다가오지 않을 것 같던 작고 까만 아이들이 우리가 버스에서 내리기도 전에 소리를 지르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우리는 아이들의 수업에 참여해 함께 왕관과 장갑 손가락 인형을 만들었다. 손짓, 발짓, 온몸을 동원해가며 의사소통을 했다. 아이들이 계속 무언가를 말하는데 내가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듯해 때론 미안했다. 뭐라고 재잘거리든 나는 예쁘단 뜻의 “음주리! 음주리!”만 반복했다. 아이들도 나의 엉터리 발음을 알아들었는지 내가 “음주리! 음주리!” 할 때마다 빙그레 웃어주었다.
점심 시간. 한국에서 온 손님을 위해 일주일에 두 번밖에 없는 특식을 준비했다고 하셨다. 특식이라기에 은근히 기대했는데, 볶은 콩과 튀긴 고기 등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반찬들이었다. 하지만 맛은 달랐다. 우리나라와 다른 조리법과 재료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고기가 너무나 질겼다. 씹고 씹어도 크기가 줄어들지 않을 정도였다. 그래도 아이들은 맛있게 먹고 있었다.
조금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난 학교에서 급식이 나오면 아이들과 함께 온갖 투정을 늘어놓곤 했다. “완전 풀밭이네. 우리가 토끼냐!” “이거 어제 나왔던 거잖아. 뭐야? 남은 재료 재활용했네!” 심지어 메뉴가 마음에 안 든다고 매점에서 라면이나 빵을 사먹거나 굶은 적도 많았다. 이곳의 아이들보다 10년을 더 살아온 내가 10년은 덜산 듯한 철없는 행동을 해왔다니! 정말 부끄러웠다. 얘들아, 미안해.
점심을 먹은 후 시장으로 출발했다. 다음날 있을 가정 방문에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기 위해서였다. 옷과 신발, 가방 등을 파는 상점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누가 저런 걸 돈 주고 살까 싶을 정도로 낡은 제품들이었다. 전부 해외에서 건너온 재활용품인 모양이다. 이런 상점에서 새 옷, 새 신발, 새 가방을 샀다고 좋아할 이곳 사람들의 모습을 생각하니, 화려하고 값비싼 물건을 고르기 위해 백화점만 기웃거렸던 내가 또다시 부끄러워졌다.
우리의 봉사가 작은 씨앗이 되길
둘째 날, 우리는 알리마우어란 곳에 도착했다. 사람이 사는 환경이라고 하기엔 심하게 지저분한 마을이었다. 곳곳마다 하수구 썩는 냄새가 진동했고, 길 이곳 저곳에는 시궁창 물이 썩은 채로 고여 있었다. 그 주변으로 주택들이 들어서 있고, 아이들은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뛰어다녔다. 우리는 집게와 삽을 들고 쓰레기를 담을 포대를 챙긴 후 조별로 맡은 구역을 치우기 시작했다. 하수구 속을 헤집고 또 헤집어서 모은 쓰레기는 그야말로 산더미가 되었다. 치워도 치워도 줄지 않는 쓰레기는 감당하기엔 역부족으로 보였다. 금세 한 포대를 채워내면 또 다른 포대가 필요했다. 게다가 찌는 듯한 더위에 코를 찌르는 악취라니. 쓰레기를 들출 때마다 날리는 엄청난 먼지는 숨을 턱턱 막 히게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인상을 찌푸리거나 코를 막을 순 없었다. 이런 더러움이 일상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 앞에서 그런 행동을 한다면 그들에게 상처를 줄 테니 말이다. 어느새 마음속에선 표현할 수 없는 묘한 뿌듯함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우리를 보며 현지인들은 스와힐리어로 수근댔다.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그들은 탄자니아까지 와서 쓰레기를 치우는 우리 모습을 대견해했고, 고마운 눈빛으로 봐주는 것 같았다. 우리를 보며 “그래! 저렇게 멀리서 와서 우리가 더럽힌 동네를 치워주는데, 앞으로 우리 동네는 우리가 치워야지!’ 하고 깨닫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조금도 힘들지 않았다. 설령 알리마우어가 지금보다 깨끗해지지 않더라도 이 봉사가 그들에게 작은 깨달음이라도 준다면 그걸로 만족스러웠다.
노력 봉사가 끝나고 우리는 알리마우어 사람들에게 작은 정성이 담긴 현물과 함께 풍선을 나누어주었다. 봉사자 중 몇 명은 직접 풍선에 바람을 넣고 묶어 막대기에 고정했고, 또 다른 몇 명은 땡볕 아래 산타 옷을 입고 구슬 같은 땀을 흘리며 아이들에게 풍선을 나누어주었다. 이곳저곳에서 아이들이 풍선을 달라고 소리를 지르고 보채도 봉사자들은 단 한 번도 찡그리는 일 없이, 흐뭇해하며 풍선을 나누어주었다. 난 그날 태어나서 처음 ‘산타’라는 것을 보았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선물을 아이들의 머리맡에 두고 가는 엄마아빠 산타가 아니라 착한 아이들에게 아름다운 마음으로 선물을 나누어주는 진짜 산타 말이다. 비록 그 선물이 값비싼 물건은 아니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고무 풍선이 우리에게 그리고 아이들에게 최고의 선물이었을 것이다.
드디어 내가 기다리던 가정 방문 시간이 왔다. 이따금 TV의 한 장면으로 볼 수 있었던 아프리카의 가난이 눈앞에 펼쳐지자 가슴이 뭉클했다. 딱 내 방만 한 크기의 집에서 6~7명이 살고 있다니. 이곳 사람들의 형편이 어렵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비좁은 공간에서 먹고 자고 모든 걸 해결한다는 사실에 몹시 당혹스러웠다. 이곳은 전력도 부족해 전기가 잘 들어오지 않는다. 실제로 벌건 대 낮인데도 방 안이 껌껌했다. 우린 준비한 선물을 전해주었고 주인 할머니는 우리에게 탄자니아 전통 음식을 만들어주셨다. 살짝 비위에 거슬리는 맛이었지만 할머니의 정성을 읽을 수 있어 난 “굿!굿!”을 외치며 맛있는 척 엄지손가락을 계속 펴 보였다.
우리는 다시 교회로 돌아왔다. 그곳에는 나보다 두세 살 어린 친구들이 잔뜩 앉아 있었다. 그들은 우릴 위해 춤과 노래를 보여주었다. 4곡 정도를 불렀는데 전부 처음 들어보는 노래였다. 하지만 어느새 나는 몸으로 리듬을 타며 따라 부르고 있었다. 아마 노래가 흥겹고 따라 부르기 쉬운 탓도 있지만 나의 뛰어난 리듬감이 발동한 탓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노래가 신이날수록 자꾸만 울컥울컥 하며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계속 꾹꾹 눌러 참으려고 노력했다.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는 아이들은 정말 행복해 보였다. 나는 그 아이들보다 훨씬 더 많은 걸 가지고있다. 그 애들보다 옷도, 먹을 것도 많고, 가난하지도 않다. 그런데도 난 왜 행복해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 아이들 중에는 돈이 없어 학교를 가지 못한 아이, 원하는 공부를 계속할 수 없는 아이들이 있었다. 물론 지금은 굿네이버스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원하던 공부를 계속할 수 있게 되었다. 아이들은 자신의 꿈을 발표하는 시간에 공부를 계속할 수 있게 해줘서 매우 감사하다며 꿈을 이루어 훌륭한 사람이 되겠단다.
어릴 때부터 나는 단 한 번도 공부를하고 싶다는 생각을 간절히 해본 적이 없었던 듯하다. 단지 내 꿈을 이루기 위해서 꼭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공부를 해왔다. 오히려 하기 싫었던 적이 더 많았다. 이 친구들을 보면서 나 자신이 너무나 한심하게 느껴졌다. 난 어릴 때부터 원하는 걸 갖지 못하거나 일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인생을 비관하며 마구 울어댔다. ‘난 왜 이렇게밖에 못 사는 걸까! 왜 이렇게 난 불행할까!’ 돌이켜보니 정말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나에게 주어진 것에 만족하며 그것을 최대한 활용하고 노력해 내 꿈을 이루려고 했어야 했다. 그런데도 나는 더 많은 것을 바라고 누군가의 도움에 의존하려고만 해왔다. 아마 그래서 그 순간 울컥했던 게 아닐까 싶다. 지금까지 어리석게만 살아온 내 인생이 창피해서, 후회돼서 반성의 눈물이 흐른게 아닐까.
지구의 희망을 만나다
고 2 여름방학에 아프리카를 간다는 이야기를 하자 주변 사람들은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좋은 경험이긴 한데, 꼭 지금 가야겠어? 고 2 여름방학이 얼마나 중요한데. 대학 간 다음에 가도 늦지 않아.” 사실 나도 걱정했다. ‘다녀와서 다른 아이들보다 너무 뒤처지진 않을까?’
5박 8일의 일정을 마치고 돌아온 내게 후회란 없었다. 일주일간 공부를 했다면 많을 지식을 얻었겠지만 책에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을 탄자니아에서 보낸 일주일 동안 배웠다. 제3세계 아이들의 어려운 형편을 몸소 느끼고 그들을 위해 봉사를 하고 돌아온 나는 매달 용돈에서 5천 원씩 내던 후원금을 1만 원으로 늘리기로 결정했다. 지금은 1만 원이 내가 후원할 수 있는 최대 금액이지만 대학생이 되어 아르바이트를 하고 좀 더 지나 스스로 돈을 벌게 되면 더 많은 금액을 후원하고 싶다. 내가 옷을 한 벌 덜 사고, 여행을 한 번 덜 가고, 맛있는 걸 한 번 덜 먹으면 배고픈 아이들이 단 한 끼의 식사로 조금이나마 허기를 달랠 수 있을 것이다. 또 하고 싶은 공부를해 꿈을 이루고, 얼어 죽을 것만 같던 방 안에 온기를 넣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돈의 가치는 몇 배가 될 것이다.
지금 세상은 삭막하고 메말랐고 이기적인 사회로 변해버렸다고 비판하는 소리들뿐이다. 그러나 아직은 인정 많고 따뜻한 사람들이 세상에 남아 있다. 특히 난 이번에 함께한 <굿네이버스> 식구들을 통해 메마르지 않는 이 지구의 희망을 보았다. 학생인데도 자신의 용돈을 쪼개서 해외여행이 아닌 해외 봉사를 온 언니, 직장에서 야근까지 해가며 번 돈을 쪼개서 해외 봉사를 온 오빠, 보기 좋은 한 쌍의 부부 동반 봉사대, 매번 혼자 해외 봉사에 애쓰시는 단장님! 다들 아름다운 사람들이다. 만약 이분들과 함께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동생과 난 고된 봉사에 지쳐 이처럼 행복한 시간을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아름다운 언니, 오빠, 친구들과 함께했기에 평생 기억에 남을 봉사가 되었다. 적지 않은 비용을 들여 선뜻 탄자니아에 보내주신 부모님께 감사하고 잊지 못할 경험을 마련해주고 평생 잊지 못할 사람들을 만나게 해준 굿네이버스에 감사한다. 5박 8일 동안 쉬지 않고 싸웠던 기억밖에 없지만 그래도 항상 옆에 같이 있어주었던 동생에게도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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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공 굿네이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