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길 산책을 시작한 지도 벌써 반년이 지났습니다. 이른 봄 팔판동에서 시작해 옥인동, 선잠단지길, 계동, 가회동 북촌로를 지나 성북동 길까지, 이번이 마지막 여정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속속들이 잘 아는 길을 택했습니다. 제 사무실인 리빙 애시스 디자인이 있는 성북동은 현대와 고전이 잘 어우러진 매력 넘치는 동네입니다. 자그마한 다리 옆에 초연하게 서 있는 구멍가게, 연탄 갈빗집 등 요즘 보기 드문 풍경은 소박한 아날로그 감성을 자극합니다.
서세옥 씨를 비롯해 김환기 씨, 정하경 씨 등 많은 화가를 배출한 이곳은 문화를 즐길 수 있는 콘텐츠도 다양하지요. 재기 발랄한 젊은 작가들의 전시를 볼 수 있는 ‘테이크아웃드로잉’을 비롯해 간송미술관과 국내 최초의 구립 미술관도 자리하니까요. 공간 디자이너 전시형 씨가 운영하는 카페 ‘슬로우 가든’, 디자인 전문 출판사까지…. 언젠가는 이 동네 사람들이 함께 모여 문화 공동체를 만들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곧 이곳에 서울시에서 걷고 싶은 길 시범 케이스가 생긴다고 합니다. 아직은 아날로그적 손맛을 느낄 수 있는 곳, 다양한 문화 콘텐츠가 잘 어우러진 성북동 길로 떠나볼까요?” _최시영(공간 디자이너)
(왼쪽) 미술관이 많고 한적한 산책로가 마음에 들어 3년 전 성북동으로 사무실을 옮겼다는 공간 디자이너 최시영 씨.
바람과 나무
자그마한 기와집에 들어서니 한 여자가 한창 밀가루 반죽을 하고 있다. 손으로 반죽을 치대어 만든 치아바타는 샌드위치 빵으로 쓴다. 그리고 이내 초콜릿을 녹이고 생크림을 휘젓기 시작한다. 따뜻한 브라우니가 구워지고 예약받은 초코 시폰 케이크가 완성. 이곳은 분명 카페다. 카페 ‘바람과 나무’에서 빵을 굽고 커피를 내리고, 심지어 청소까지 혼자 척척 해내는 이는 바로 주인장 우예서 씨다. 그는 대학 시절 막연히 ‘마흔 살이 되면 카페를 차려야지’ 하는 꿈을 키웠고, 그 꿈은 몇 년 앞당겨 이뤄졌다. 현재 카페 사장님 3년 차. 막연히 요리를 좋아하던 주인장은 카페를 차리기 전 조리사 자격증과 바리스타 자격증을 취득했고 베이커리를 배우기까지 차근차근 하나씩 준비해나갔다. 그리고 2008년 인테리어 디자이너인 언니 우예로 씨와 동업해 카페를 오픈했다.
작은 소나무가 자라는 기와집. 빨간색 벽돌과 목재 합판으로 레노베이션한 내추럴한 공간과 잘 어울리는 이름 ‘바람과 나무’는 언니 예로 씨가 지었다. 자그마한 앞마당과 빵 굽는 작업실을 제외하면 규모는 그리 크지않지만 이래 봬도 유명 인사의 단골집으로 꽤 알려져 있다. 화백 서세옥 씨가 커피를 마시고, 동네 주민인 타블로ㆍ강혜정 씨 부부, 탤런트 김석훈 씨가 주말에 샌드위치 브런치를 먹으러 자주 찾는 곳. 그리고 최시영 씨도 잘안다. 오픈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갑자기 들어와 인테리어가 재미있다며 이것저것 묻곤 하던 그를 기억하는 것이다. 샌드위치와 커피를 마셔보고, 이런 가게가 성북동에 오래 남아야 한다고 했던 그가 건넨 격려의 말을 기억한다는 우예서 씨. 좀 더 많은 사람이 찾아 카페가 복작거렸으면 하는 바람이 크지만, 한편으론 프랜차이즈 커피숍처럼 북적대지 않아 더 좋다고 하는 손님들을 위한 공간으로 남겨두고 싶은 마음도 있단다. 이런 세세한 마음씨와 정서가 남아 있어 동네 주민들의 발걸음을 사로잡는 것이 아닐까.
1 카페 바람과 나무 한쪽 벽에는 캐릭터 디자이너 박재홍 씨가 그린 익살맞은 페인팅이 조르르 걸려있다.
2 주방 옆 벽면은 칠판 페인트를 발라 메뉴를 적어둔다.
3 고즈넉한 성북동 길, 주택을 레노베이션해 따스한 감성이 느껴지는 카페 바람과 나무.
4 인기 메뉴 머시룸 샌드위치.
5, 6 합판과 벽돌로 마감한 실속형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카페 공간. 인테리어는 언니 우예로 씨가 맡았다.
최시영(이하 최) 이곳 인테리어를 언니가 하셨다면서요?
우예서(이하 우) 네. 언니는 미술을 전공하고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어요. 압구정동, 서래마을 등에 있는 상업 공간 인테리어를 많이 하죠. 저희 가게는 예산이 빠듯해 합판을 주로 사용했어요.
최 창문 디자인이 독특한데요? 합판으로 툭툭 만들었는데, 가로세로 비율이 독특해서인지 무척 감각적이에요. 바깥 풍경과도 잘 어우러지고요.
우 안쪽에 자리하고 있어 사람들이 많이 찾지는 않아요. 막상 들어오면 좋아하지만. 조용해서인지 혼자 찾아오는 사람이 많고요.
최 그런데 항상 올 때마다 바빠 보여요. 요리부터 서빙까지 혼자 운영해서 그렇죠? 동네 문화 인사들도 많이 찾을 텐데, 평소 안부 인사도 건네며 관계를 맺으면 좋을 것 같아요.
우 너무 정신없이 일하다 보니 미처 그런 것을 생각하지 못했어요.
최 한쪽에 서세옥, 정하경 씨 등 작가의 도록을 비치해두면 어떨까요? 바로 옆이 구립 미술관이고, 이 동네 갤러리도 많으니 전시 관련 포스터도 붙여두고요. 하얀 벽에 독특한 그래픽으로 성북동 걷는 길 지도를 그려 넣는 것도 좋을 듯해요.
우 언니가 작업한 곳의 공간 사진과 함께 안그라픽스 출판사에서 나오는 디자인 서적도 가져다두면 좋겠네요?
최 빵을 대부분 손으로 반죽하니까 이를 윈도 베이커리로 보여주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우 네, 저도 카페에 뭔가 다른 콘텐츠를 더하고 싶어요. 성북구립미술관과 연계해 한쪽 공간에 작품을 전시하는 대안 공간으로 활용해볼까 계획 중이에요. 그때 작품 보러 오세요.
아뜰리에 & 프로젝트
1 플로리스트 윤혜경 씨, 디저트 작가 백오연 씨와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 디자이너 최시영 씨.
2 뉴욕 유학 중인 주인장 김지은 씨가 디자인한 서랍장 형태의 가구에 그가 컬렉션한 빈티지 소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3 아날로그 감성이 느껴지는 아뜰리에&프로젝트 외관.
4 입구 계단을 올라서면 플로리스트 김혜경 씨의 작업실과 마주한다.
성북동 간송미술관 초입 삼거리에 빵 굽는 냄새가 진동했다. 빵집인가? 살짝 들여다보았더니 베이킹 클래스가 진행 중이다. 얼마 후에는 그 집 앞마당에 화사한 봄꽃이 가득 펼쳐졌다. 최시영 씨는 점심 산책 중에 자꾸 마주치는 이곳의 정체를 내내 궁금해했다. ‘아뜰리에&프로젝트’, 낯선 이름이 아니다. 아트 디렉터 김지은 씨와 디저트 작가 백오연 씨, 패션 큐레이터 박지영 씨가 운영하던 신사동 아뜰리에&프로젝트가 1년 전 이곳 성북동으로 자리를 옮긴 것.
세 여자가 아뜰리에&프로젝트를 오픈했을 때는 모두 패기 넘치는 20대였다. 아트 디렉터 지은 씨는 전시나 재즈 콘서트 등을 기획하고, 디저트 작가 오연 씨는 무화과 스콘 등 생소한 디저트를 선보이며 카페로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패션 큐레이터 지영 씨는 직접 만든 의상과 액세서리를 선보이며 리사이클링으로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신선하다’라는 입소문과 함께 제법 유명해진 세 여자는 오연 씨와 지은 씨의 결혼과 임신, 출산이라는 과정을 거치며 터닝 포인트를 맞았다. 지난해, 지은 씨가 남편과 함께 미국 유학길에 오르면서 복작복작한 로데오 거리를 벗어나 성북동으로 작업실을 옮긴 것. 플로리스트 윤혜경 씨와 아이 옷을 판매하는 김주연 씨 등 더욱 폭이 넓어진 뉴 페이스와 뉴욕에서 보내주는 빈티지한 리빙 소품, 각종 디자인 서적까지 꽃향기 가득한 아틀리에를 들러보자.
(왼쪽) 다양한 분야의 주인장들이 컬렉션한 독특한 소품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최시영(이하 최) 이렇게 다른 분야의 매장과 작업실이 조합을 이룬 곳은 보기 드물어요.
백오연(이하 백) 사람이 먼저 구성된 조합이라서 그런 것 같아요. 지은 씨가 태국을 여행하다 미용실, 음식점, 옷 가게가 함께 있는 숍을 봤대요. 마침 저는 파리로 요리 유학을 다녀왔고, 지영 씨는 패션 회사 MD로 활동하고 있었죠. ‘우리라면 저런 조합도 가능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최 매장 곳곳에 걸린 사진이 쇼윈도를 장식해도 사람들의 흥미를 끌 것 같은데요. 플라워 숍이 있다는 것도 몰랐어요.
윤혜경 이곳은 숍이라기보다 플라워 작업실이라할 수 있죠. 아뜰리에& 프로젝트가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면 이 플라워 공간을 좀 더 작업실의 개념이 커졌어요.
백 각자 하는 일이 다르다 보니, 너무 한 가지 성격이 부각되면 다른 친구의 작업에 방해될까 봐 각자 하는 일을 앞세우지 못했죠. ‘쿠킹 클래스’ ‘플라워 스타일링’이라고 커다랗게 써 붙이면 왠지 ‘아뜰리에 &프로젝트’ 자체의 아이덴티티를 잃을 것 같아서요.
최 이 동네의 문화와도 잘 어우러지는 것이라면 충분히 선전해도 되지 않을까요? 참, 백오연 씨는 원래 미술을 전공했다면서요?
백 네, 예고 시절부터 디자인을 전공하고 광고 회사에 다니다 요리로 전향했죠. 혜경 씨도 원래 섬유 예술을 공부하고 패션 MD로 일하다 지금 플로리스트로 활동하는 거예요.
최 재미있군요. 혹시 어머님이 요리나 꽃꽂이 등 살림을 잘하셨나요?
백 어머니는 제가 아주 어릴 때부터 빵을 구우셨어요. 프랑스 선교사에게 베이킹을 배울 정도였지요.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제가 만든 스콘 아주 맛있어요. 한때 무화과 스콘이 인기였죠.
최 지금은 육아 때문에 힘들다지만, 아이가 자란 후 계획이 있다면요?
백 앞마당을 살려 주말 장터를 열거나 공연을 해보고 싶어요. 또 시간이 지나면 스콘 전문점을 차리려고요. 20~30가지 정도 메뉴를 개발해놨어요.
최 지금부터 자신의 브랜드를 만드세요. 자신들이 갖고 있는 스토리가 있잖아요. 요리와 디자인, 패션과 플라워… .
백 선생님 말씀이 자극이 됐어요. 몇 년 동안 자기 발전을 위한 노력을 끊고 살았거든요. 우리가 갖고 있는 보따리를 적극적으로 풀어야겠어요.
성북구립미술관
1 7월 21일부터 9월 4일까지 성북구립미술관에서 열리는 <지구> 전. 빨대로 도마뱀을 만든 정찬부 씨, 소리와 종이관을 통해 공간을 창조한 한원석 씨 등 작가 9인의 프로젝트를 만날 수 있다.
2 공간 디자이너 전시형 씨가 레노베이션한 성북구립미술관.
(아래) 가족 단위 관람객을 위해 다양한 전시를 기획 중인 큐레이터 김경민 씨.
성북동의 랜드마크 돈가스 집 옆에 미술관이 떡하니 자리한다. 예술적 내향이 깃든 고즈넉한 성북동 길에 2년 전 문을 연 성북 구립미술관. 성북 지역은 한국 근현대 미술이 태동할 무렵부터 수많은 작가가 창작의 고향으로 뿌리내린 곳이다. 이전에는 공개하지 않았던 성북동 시절의 에피소드가 담긴 사료를 다양하게 선보여 화제를 모은 <두 예술가를 만나다>전을 본 이라면 왜 성북구에 최초의 구립 미술관이 들어섰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미술사학자 김용준 씨,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김환기 화백을 비롯해 이태준 작가, 한용운 선생 등 수많은 예술가와 문인이 살았고 또 살고 있는 성북구. 특히 김환기 화백은 파리로 떠나기 전까지 이어진 성북동 생활에서 항아리, 새, 산, 달 등으로 대표되는 우리 미에 대한 회화적 탐구를 심화했으며 성북동에 대한 애틋함을 여러 작품과 문헌에 담았다. 성북구립미술관은 이처럼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작가들의 생활사를 보여준 전시를 기획하는데, 세월의 흔적만큼이나 유구한 작가들의 삶과 예술이 좀 더 대중과 쉽게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다는 점이 무척 반갑다. 주차장 역시 문화 공간으로 쓸 수 있도록 계획 중이다. 미술관 건물은 동사무소를 레노베이션한 것. 1층은 다문화센터, 2층과 3층은 전시장과 사무실로 운영 중이다. 특히 성북구는 학교가 많은 게 특징인데, 이에 맞춰 온 가족이 함께 관람할 수 있는 전시를 기획할 예정이다.
최시영(이하 최) 성북구립미술관은 어떻게 운영하고 있나요?
김경민(이하 김) 서세옥 화백이 명예관장이시고, 프랑스에서 복원 미술을 공부한 김보라 씨가 학예실장을 맡고 있어요. 보통 지역과 관련한 전시를 많이 하죠. 이번 <지구>전에서도 성북구에서 나는 재료로 작품을 만든 작가가 있어요. 작가 김순임 씨는 솜과 돌, 실을 이용한 설치 작품을 선보였는데 구름에 매달린 돌은 모두 성북구 지역에서 채취한 거죠.
최 이 근처에 디자인, 문화와 관련한 분들이 많이 살잖아요. 그런데 전시 소식을 먼저 들은 적이 없는 것 같아요.
김 아무래도 구에서 운영하는 것이다 보니 조율하는 과정이 복잡했어요. 미술관 운영에 관련한 모든 것을 절충하는 과정이라고 할까요. 이번 전시 같은 경우는 홍보를 많이 하려고 해요. 전시 포스터를 주변 카페나 사무실에 많이 붙이려고 준비 중이에요.
최 성북동이 특히 저녁에 다니면 깜깜하잖아요. 갤러리 1층에 윈도 갤러리를 만들면 좋을 텐데요.
김 네, 1층 전시 공간이 확보되면 설치 작품을 더할 예정이에요.
최 개인 미술관이 아니어서 오히려 지역 주민을 모으고 분위기를 활성화해 뭔가를 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이 동네 유치원도 있고 특수학교도 있어요. 아이들을 위한 행사를 마련해보세요.
김 우선 시작은 <지구>전 같은 생태 전시를 많이 기획할 생각이에요. 이번 전시는 오프닝을 할 예정인데 동네 문화 인사들과 지역 주민들, 아이들이 한자리에 모여 축제처럼 즐겼으면 해요.
최 비가 안 오면 우리 집 앞마당을 빌려줄 수도 있어요. 동네잔치가 되겠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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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김재윤 취재 협조 바람과 나무(02-766-1011), 성북구립미술관(02-6925-5011), 아뜰리에&프로젝트(02-548-33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