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해주세요.
본문 바로가기
[행복은 국경을 초월한다] 스웨덴 남작 부인으로 사는 한국인 큐레이터 장미영 씨 스웨덴 백야와 한국의 소나무를 다 아는 여자
헨리크 폰 플라텐 Henrik von Platen 씨의 열렬한 구애 끝에 그와 결혼해 스웨덴의 남작 부인이 된 장미영 씨. 두 아이 ‘미리’와 ‘세계’를 키우며 달큼한 일상을 꾸리고 있는 그의 스톡홀름 집을 방문했다. 그의 뜰, 스웨덴의 태양 속에 씩씩하게 싹을 틔운 한국의 푸성귀처럼, 스웨덴과 한국의 삶을 더불어 살아가는 그의 일상을 들여다본다. 독립 큐레이터로서 한국 현대미술을 유럽 무대에 소개하고 있는 그의 분주한 일상도 함께.


폰 플라텐 가문 3대의 모습을 담은 조덕현 작가의 작품이 거실에 걸려 있다. 장미영 씨가 ‘미리’ ‘세계’와 한때를 보내고 있다. 헨리크 폰 플라텐 남작은 외출 중이어서 촬영에 함께하지 못했다. 테이블 위의 유리관은 이동욱 작가의 ‘브라더스 Brothers’로 이 집을 방문하는 사람들마다 호기심을 거두지 못하는 작품이다. 왼편으로 살짝 보이는 사진 작품은 랭코 카와우치 Rinko Kawauchi의 아이라 Aila 시리즈다.


비행기만 타면 어느 나라나 내 집처럼 다닐 수 있는 세상이라지만, 스웨덴은 아직도 머나먼 이국이다. 스웨덴 사람들에게도 한국은 마찬가지의 이미지일 것이다. 그들에게 한국은 태권도와 입양아로 기억되는 극동의 나라다. 관광객을 제외하고 동양인을 찾아보기 힘든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는 이 머나먼 두 나라의 다리 역할을 하는 여인이 살고 있다. 한국 이름으로는 장미영, 유럽인들 사이에서는 미영 폰 플라텐 Miyoung von Platen으로 알려진 그는 한국 사람이면서 스웨덴 남작과 결혼해 스웨덴 남작 부인이 됐다.

미술사를 공부하기 위해 영국행을 택한 과감한 처자가 스웨덴의 남작 헨리크 폰 플라텐 Henrik von Platen 씨와 결혼하게 된 스토리는 한 편의 드라마 같다. 인연이 닿으려고 했는지 장미영 씨와 헨리크 폰 플라텐 씨는 이웃사촌이었다. 어느 날 문 앞에서 “너는 누구니?”라는 헨리크 씨의 말 한마디로 두 남녀는 안면을 텄다. “내 이름은 장미영이야”라고 대답하는 장미영 씨에게 헨리크 씨는 귀에 들리는 발음대로 “내 이름은 미올드 me old야”라는 위트 있는 화답을 했다. 그러나 공부에 성심을 다하던 동양 처자는 생판 모르는 유럽 남자의 관심이 부담스러웠단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열기 위해 헨리크 씨는 유학생들이 드나드는 차이나타운의 허름한 식당도 마다하지 않고 그녀를 부지런히 따라다녔다.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었던 한국 처자에게 헨리크 씨는 이상적인 배우자였다. 국제적 사업가로 문화, 예술, 정치 등 다양한 분야에 박식한 데다 유머러스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인연을 맺은 이 부부는 지금 두 아이를 가진 가족이 되었다. 이들은 여전히 단 둘이 여행을 떠나기도 하는 연인 같은 부부, 낭만적인 부부다.

(왼쪽) 헤리티지라는 이름의 겹꽃 장미를 손질하고 있는 장미영 씨.

뿌리를 찾아 스웨덴으로
가정을 꾸리면서 런던에서 정착하는가 했던 폰 플라텐 씨 가족이 스톡홀름으로 이사를 결정한 것은 2008년이었다. 오페라 오프닝에 빠짐없이 참석할 정도로 오페라를 좋아하는 장미영 씨가 런던에 비해 문화 예술 방면에서는 시골이나 다름없는 스톡홀름을 택한 것은 아이들 때문이었다. 폰 플라텐이라는 이름은 사실 스웨덴의 정치ㆍ문화ㆍ경제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기도 하다. 플라텐 가문은 스톡홀름과 예테보리를 잇는 600km의 뱃길 고타 Gota 운하를 지은 발처 폰 플라텐 Baltzer von Platen 남작을 비롯해 스칸디나비아의 경제ㆍ문화계에 큰 발자취를 남긴 귀족 가문이다. 그런 집안의 자손임에도 장미영 씨의 두 아이는 런던에서 나고 자란 탓에 스웨덴어에 능숙하지 못했다. 게다가 장미영 씨의 아들 ‘세계’는 남작의 칭호를 이어받을 가문의 장손이다. 무엇보다 아이들에게 ‘미리’와 ‘세계’라는 한국 이름을 따로 지어주면서 엄마의 나라를 알게 하려고 애썼는데도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한국어를 잊고 영어를 모국어로 체득하는 것을 보면서 위기감이 깊어졌다.

장미영 씨는 국제적 감각도 좋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뿌리를 아는 정체성을 아이들에게 심어주고 싶었다고 한다. 나와 내 가족이 어디서 왔는지를 모르는 사람으로 키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톡홀름은 곳곳에 폰 플라텐 가문의 선조가 살던 건물이며 경제ㆍ문화계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가문의 일원인 친척들이 있어 사춘기 이전에 조금이라도 스웨덴 문화를 익혔으면 하는 장미영 씨의 바람과 맞아떨어지는 선택이었다. 그건 새 인생의 시작이기도 했다. 아이들이 스웨덴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지는 동안 장미영 씨 역시 대학에 등록해 스웨덴어를 배웠다.

18세기부터 내려오는 폰 플라텐 가문의 별장에는 가족의 추억이 가득 서려 있다. 스웨덴어로 니네스 고르드(반도의 끝)라는 별장 이름답게 발트 해가 바로 앞마당까지 들어온다.

가문의 추억을 담은 집
가족의 새 보금자리를 꾸미는 것도 장미영 씨의 몫이었다. 장장 18개월 동안 전체 설계를 비롯해 조명등을 매달 위치 하나까지도 살피며 가족의 보금자리를 완성했다. 집을 둘러본 스웨덴의 유명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내일 당장 출근하라며 웃음 섞인 제의를 할 만큼 공들인 집이다. 페인트 하나마저도 허투루 칠하지 않았다. 다 같은 흰색처럼 보이지만 아랫부분과 윗부분의 채도를 달리하고 방마다 조금씩 조색을 바꾼 덕에 깊이감 있는 색깔이 탄생했다. 그렇게 완성된 공간을 가족의 추억이 가득한 오브제로 꾸몄다.

(왼쪽) 풍요로운 자연환경 속에서 자연을 존중하며 살아가는 것이 스웨덴인들의 삶이다. 그 때문에 별장의 나무 하나를 자르는 것도 조심스럽 다. 폰 플라텐 가문의 별장지에 딸려 있는 작은 교회가 이곳의 유서 깊은 역사를 증언해준다.

식당 전면에 걸린 병풍에 얽힌 이야기는 3대를 거슬러 올라간다. 이 병풍은 장미영 씨 시어머니의 어머니가 되는 마가렛 악슨 존슨 Margaret Ax:son Johnson의 중국 예술 콜렉션 중 하나다. 그녀는 상해에서 미국인 어머니와 영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스웨덴으로 시집을 온 이력에 걸맞게 동양 문화에 관심이 많았다(그녀의 남편인 악셀 악슨 존슨 Axel Ax:son Johnson 씨는 스웨덴의 가장 큰 재벌 그룹 중 하나인 악셀 존슨 그룹과 노르셰르난 Nordstjernan의 창시자이자 오너다).

8폭의 자개 병풍은 그녀가 아끼는 작품 중 하나였다. 그녀가 타계한 후 유산으로 남은 병풍은 시어머니의 두 자매에게로 넘어갔다. 추억이 담긴 유물이기 때문에 자매는 병풍을 각기 네 폭씩 소장했고, 헨리크 씨를 아꼈던 큰이모가 타계하면서 네 폭의 병풍을 물려주었다. 나머지 네 폭은 작은이모가 돌아가신 후 앤티크 딜러에게 팔려갈 뻔했다가 간신히 입수해 8폭을 소장하게 되었다. 중간이 잘려 나간 병풍은 궁리 끝에 그림처럼 걸어두는 것으로 온전히 제자리를 찾았다.

컬렉터로 첫발을 내딛다
거실 한가운데 있는 조덕현 씨의 작품에도 가족사가 담겨 있다. 캔버스 위에 연필로 그려넣은 화폭에는 장미영 씨의 시아버지와 남편 그리고 아들이 서 있다. 1995년 타계한 시아버지는 손자를 만나보지 못했다. 그 안타까움을 헤아려 세 명을 한 화폭에서 만나게 주선한 것은 장미영 씨의 아이디어였다. 부자 3대가 그림이라는 마법의 공간 속에서 정을 나눌 수 있게된 것이다. 이 작품을 시작으로 장미영 씨는 평소 관심 있게 지켜보던 우리나라 현대미술가의 작품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돈이 많으니 작품쯤이야 얼마든지 살 수 있지 않겠느냐 싶을 것이다. 그러나 단 한 작품도 허투루 사들인 것이 없다. 갤러리의 설명을 대충 듣고 하나쯤 사보자는 식으로 구입한 작품이 없다는 이야기다.

직접 작품을 보고, 작가와 대화하면서 작가의 세계관을 이해하는 것을 중요시한 장미영 씨는 유럽에서 알려지기 시작한 우리나라 작가들의 전시를 빠짐없이 보러 다녔다. 한국에 가는 기회가 생기면 작가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고 작품을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먼 나라가 되어 가던 모국이 생활 속으로 들어왔다. 흥미로운 점은 전혀 다른 문화권에서 태어난 우리나라 현대미술 작품이 클래식한 전통을 바탕으로 꾸며진 장미영 씨의 집에서 전혀 튀지 않는 점이다. 작품만 그런 것이 아니라 집 안 곳곳에 놓여 있는 부채가 그렇고, 한국에 올 때마다 인간문화재의 작품을 수소문해 구한 다완이 그렇다.

이 집에서 한국 전통 부채는 그저 이국적인 장식품이 아니라 벽난로에 불을 지피는 데 풀무 대신 사용하는 생활용품이다. 전통을 존중하되 얽매이지 않고 참신한 시각으로 전통을 해석한 셈이다. 컬렉션을 위한 작품을 대할 때도 마찬 가지다. 오로지 전통에만 매달리는 게 아니라 우리나라의 오늘을 함께 숨쉬며 동시에 유럽의 문화권에서도 자연스럽게 융화될 수 있는 작품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왼쪽) 미술 서적이 가득한 서재는 편히 책을 볼 수 있도록 차분한 초록 계열로 꾸몄다. 돌아가신 시아버지가 쓴 역사서 <스테딩크 Stedingk>는 베스트셀러가 됐을 만큼 이 가문은 책을 좋아하는 집안이다.


(오른쪽) 한국 부채와 영국에서 구입한 중국 고가구,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스웨덴 장식품이 잘 어우러져 있다.
(왼쪽) 시댁에서 물려받은 자개 병풍은 8폭이 온전히 보관된 귀한 물건이다.


그렇게 공들여 구입한 작품들인 만큼 작품을 표구하고 거는 데도 정성을 들인다. 정연두 씨의 작품은 런던에서 가장 유명한 표구상인 존 존스 John Jones에게 표구를 맡겼다. 또 장미영 씨는 작품과 유리 사이에 공간을 두는 등 작품의 느낌을 최대한 끌어내기 위해 궁리를 멈추지 않는다. 재미난 사실은 우리나라의 목욕 문화를 소재로 한 이 작품을 두고 유럽인과 장미영 씨 사이에 시각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취향은 경험의 산물인 만큼 한 작품에 대해 전혀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은 컬렉션을 시작하고 나서 얻은 수확이다. 작품을 통해 나의 뿌리인 우리나라와 너의 뿌리인 스웨덴의 문화가 서로 만나는 경험은 장미영 씨에게 새로운 삶을 열어주었다. 독립 큐레이터로서의 삶이 그것이다.

인생 3막은 큐레이터로!
그는 2007년 런던의 갤러리 베손 Galerie Besson에서 도예가 노경조 씨의 전시를 기획한 것을 시작으로 큐레이터의 삶을 살고 있다. 2011년 2월에는 스톡홀름의 3대 갤러리 중 하나인 샬로테 룬드 Charlotte Lund에서 김동유, 배병우, 배준성, 신미경, 이동욱, 정연두 씨의 작품을 소개한 <북회귀선 38.5℃, 눈 오는 남쪽 나라>전을 기획했다. 또 4월에는 학문의 도시 웁살라의 ‘웁살라 아트 뮤지엄’에서 <한국 현대미술전>을 개최해 7천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다. 스웨덴의 컬렉터들이 한국 현대미술 작가의 작품에 흥미를 보이는 것은 장미영 씨에게 가슴 벅찬 일이다.

그가 처음 이 나라에 발을 디딜 무렵 한국에 대한 인식은 보잘 것 없었기 때문이다. 스웨덴 사람들은 “한국에도 눈이 오니?”라는 질문을 던졌다. 전시의 제목을 ‘눈 오는 남쪽 나라’로 정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스웨덴인들은 전 국토의 30%를 차지하는, 그들에게 너무나 익숙한 소나무가 등장하는 배병우 작가의 사진 앞에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미니어처 인물 조각이 유리벽에 갇혀 있는 이동욱 작가의 작품 ‘분사이 Bonsai’를 보며 매력에 빠져들었고, 정연두 작가의 비디오 작품 ‘핸드메이드 메모리즈’를 보며 ‘오늘’을 살고 있는 한국의 젊은 작가를 만났다.

장미영 씨가 기획한 전시는 자신의 삶과도 무척 닮았다. 플라텐 가문의 별장 마당에는 장미영 씨가 가꾼 텃밭이 있다. 발트 해가 앞마당까지 깊숙이 들어와 있는, 아름다운 자연이 풍성하게 펼쳐진 곳이다. 그가 심은 상추, 깻잎 같은 우리나라의 푸성귀들은 그곳에서 스웨덴의 태양을 더불어 살아가며 씩씩하게 싹을 틔웠다. 마치 두 나라를 더불어 살아가는 그의 삶처럼 말이다. 독립 큐레이터로서의 경력이 자신의 인생 3막이 될 것 같다고 말하는 장미영 씨. 그의 인생 3막에 응원을 보낸다.

(왼쪽) 독립 큐레이터로서의 한 발을 내디딘 장미영 씨. 따스한 미소는 독립 큐레이터로서 여러 사람을 만나야 하는 그녀의 큰 자산이다.


(왼쪽) 정연두 작가의 작품이 걸려 있는 침실. 직접 아이디어를 짜 표구를 의뢰할 만큼 장미영 씨가 아끼는 작품이다. 일반적 편견과 달리 현대미술 작품이라도 클래식하게 꾸며진 공간과 잘 어우러질 수 있다는 좋은 예가 된다.
(오른쪽) 이기봉 작가의 작품 ‘웨트 피셰 Wet Psyche’가 걸려 있는 현관. 현대미술 작품이 여기저기 걸려 있지만 갤러리처럼 차갑지 않은 공간이다.


사진작가 배병우 선생과 장미영 씨의 인연으로 시작된…
독립 큐레이터 활동을 시작하면서 장미영 씨는 배병우 작가를 만나러 한국에 방문 했다. 한국 현대미술 작품을 소개하고 싶다는 장미영 씨의 열정에 배병우 작가는 작품 전시를 수락했고, 올초 <북회귀선 38.5℃, 눈 오는 남쪽 나라>전이 열린 스톡 홀름에 방문해 장미영 씨와 헨리크 폰 플라텐 남작을 만났다. 이 칼럼은 그렇게 장미영 씨와 인연을 맺은 배병우 작가의 소개로 시작된 기사다. 나이가 엇비슷한 헨 리크 폰 플라텐 남작과 배병우 작가는 친구처럼 뜻깊은 관계가 되었다고 한다.


이지은(오브제 아트 감정사) 사진 마티외 페리에 Mathieu Ferrier

담당 최혜경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1년 8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