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ign house

달맞이 언덕에서는 누구나 시인이 된다
“달맞이길은 해운대해수욕장을 지나 송정해수욕장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오솔길입니다. 15번 이상 굽어진다고 하여 15곡도라 부르는데, 이 길을 따라 벚나무와 소나무 숲이 울창한 드라이브 코스를 형성하고 있어요. 날씨가 좋을 때는 쏟아지는 달빛을 듬뿍 받으며 걸을 수 있어 문탠 로드 Moontan Road 라고 불립니다. 아직은 차로 위주의 길이지만 천천히 걸어 능선을 넘을 수 있도록 곳곳에 산책로를 조성하고 있어요.”
만나자마자 달맞이길 설명을 펼치는 이는 디새 디자인의 스티브함 대표다. 그는 디자인에 대한 갈증이 큰 부산에서 아메리칸 앤티크와 토털 인테리어 디자인을 전파해온 인물이다. 뉴욕에서 생활한 서울 토박이가 이곳 달맞이에 정착한 지 15년째. 지난해에는 ‘인리빙’에서 ‘디새 디자인’으로 상호를 바꾸고 자신이 디자인한 오션 어스 사옥으로 사무실을 이전했다. 달맞이길에서 오션 어스 사옥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다.

야외 음악당이 내려다보이고, 멀리 망망대해 대마도까지 보이는 건물은 모던하면서도 통유리로 완성한 파사드 덕분에 제법 운치가 느껴진다. 뉴욕에 살던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부산에 정착한 연유는 무엇일까? “집안에 화가가 많아요. 뉴욕 도시 생활에 지쳐 있었고, 서울 역시 눈부신 성장을 한 터라 그곳 생활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았죠.” 바닷가 마을에서 일 적게 하며 살고픈 막연한 바람으로 부산에 내려와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활동한 그. 일한 만큼 쉬고, 음악을 좋아해 재즈 바를 운영하며, 가끔 서울 나들이를 즐기는 그가 십수 년 동안 달맞이에 살며 차곡차곡 품어온 ‘달맞이길 예찬론’을 풀어놓는다.
“달맞이고개가 고가의 주택이 밀집한 동네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부산에서 이곳은 ‘불편한 동네’ ‘라이브 카페 길’ 이란 인식이 크지요.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에 달맞이길이 문화 거리로 변모하고 있습니다. 요즘에는 달맞이길 갤러리를 투어하며 브런치를 즐기고, 클래식을 감상하는 것이 멋쟁이 주부들 사이에서 대단한 인기랍니다. 울산이나 경주에서 많이 오고, 가끔 서울에서 관광버스가 내려올 때도 있어요.”

(왼쪽) 라이브 카페가 있던 낡은 상가 건물을 레노베이션 한 오션 어스 사옥. 2층은 디새 디자인(051-721-2644)의 사무실이 있고 7층 꼭대기 층이 주거 공간이다. ‘틈새’에서 영감을 받은 입면이 무척 입체적이다.
(오른쪽) 음악을 좋아하는 스티브 함 씨는 10년 전 부산에 재즈 바를 오픈하기도 했다.

달맞이고개가 주거단지로 개발된 것은 1970년대, 정부에서 서민들을 위해 마련한 AID아파트가 건립되면서부터다. 그 후 본격적으로 달맞이길이 개발되기 시작했다. 가을이면 하얀 꽃이 흐드러지던 갈대밭은 사라지고 좁은 골목까지 연립주택들이 들어섰다. 1990년대부터는 카페, 갤러리까지 합세했다. 대한민국 최초의 문학관
인 김성종 추리문학관이 오픈했고 조현화랑, 코리아아트갤러리, 갤러리 몽마르트, 김재선 갤러리, 맥 화랑, 갤러리 화인 등 크고 작은 화랑이 15곳이 넘게 있다. 요즘은 이곳이 더욱 시끌벅적해졌다. 야외 음악당에서 클래식이 울려퍼지고, 주말에는 관광 명소 해월정에서 아트 마켓도 열린다. 공예가들은 자신이 만든 소담스러운 공예품들을 거리에 내놓는다. 봄이면 벚꽃, 가을이면 낙엽이 흩날리는 낭만적인 길. 갈대밭에서 뒹굴던 아이들은 이제 어른이 되어 달맞이길에서 문화를 향유한다.

더디게 걸어야 진면목을 발견할 수 있는 달맞이길. 디새 디자인이 추구하는 디자인 콘셉트와 닮아 있다.

변화하는 주거 공간, 변화하는 달맞이길
달맞이길은 문화뿐 아니라 지리 역학적으로 무척 중요한 지역이다. 우선 해운대 시가지와 해수욕장을 지척에 두고 있다. 언덕 아래 미포와 해운대 사이에는 워터파크를 조성한다. 수영만 요트경기장 역시 재개발에 들어가 컨벤션 센터가 지어진다. 그리고 2013년, AID아파트를 허문 자리에는 타워형 초고층 아파트와 테라스 하우스, 아트 빌리지가 들어설 예정이다. 이 일대가 큰 변화를 맞고 있는 것이다.
달맞이길에 부는 변화의 바람을 보는 시선은
두 가지다. 낙후된 지역 환경을 개선하는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계획대로 높은 타워형 아파트가 올라가면 언덕 앞쪽과 뒤쪽을 병풍처럼 가로막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다. 둘째, 고급 주택과 서민 주택이 함께 어울려 살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다. 달맞이길에 오랫동안 살아왔던 주민들은 새로운 이웃과 공존 방법을 찾아야 한다.

달맞이길에서 살고, 일하는 스티브 함 대표 역시 이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는 라이브 카페였던 노후된 건물을 레노베이션 하면서 건물에 ‘틈새’라는 콘셉트를 접목했다. 빛이 새어 들어오는 틈새일 수도, 싹이 자라는 틈새일 수도 있다. 이는 기존 마을과 새로운 주거 단지의 조화를 생각한 것이다. 유행하는 콘크리트나 티타늄 대신 돌과 유리를 주재료로 사용해 건물은 모던하면서도 환경 친화적이다. 건물 전체에 햇볕이 잘 들어오게 설계했다. 파사드에는 과감히 통유리를 사용했는데, 낮에는 햇볕에 반사되어 달맞이길 너머의 바닷가와 솔숲이 사진처럼 새겨진다. 오션 어스 사옥 안에 불이 켜지는 밤이면 이내 달맞이길과 소통하는 공간으로 변모한다. 바깥에서는 연꽃을 장식한 로비 전경을 바라볼 수 있고 또 건물 안의 조명은 달맞이길을 은은하게 비춘다.

1.2 스티브 함 대표의 사무실. 새 건물과 고재 가구의 어우러짐이 낯설지 않다.

“바다, 산, 언덕 등 달맞이길이 품은 아름다운 이야기와 경관은 그 자체로 어느 지역도 흉내 낼 수 없는 콘텐츠입니다. 이 좋은 재료에 갤러리와 문학관, 공방을 곁들여 문화라는 색깔을 입혀야겠지요. 그래서 오션 어스 사옥 1층에는 갤러리가 들어설 예정입니다. 야외 음악당과 연계해 공연도 하는 복합 문화 공간을 계획하고 있어요.”

이미 달맞이길의 오래된 주택에 작가들이 입주해 창작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는 등 이곳 일대에 문화 벨트를 만드는 일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벚꽃이 필 때면 특히 일본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는 달맞이길. 해운대가 쇼핑 관광 지역이라면 달맞이길은 좀 더 다른 문화 코드로 접근해야 한다. 무엇보다 이 안에 사는 사람들과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어우러지면서 즐길 수 있는 공통분모가 필요하다. “분명한 것은 달맞이길은 많은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드라이브 코스도 좋지만 사람들이 걸으면서 즐길 수 있으면 더욱 좋겠어요.” 이제 삶의 질을 고민해야 하는 시대다. 우리는 어떤 공간에서 잠을 자고 밥을 먹고 눈을 뜰 것인가, 생각해볼 일이다.

달맞이길 주거의 미래
홍콩은 습기가 많은 기후 특성 때문에 구릉지 지역의 주거를 선호하는데 해안가의 고급 주택가 리펄스 베이가 바로 해운대 달맞이를 축소해놓은 형태다. 일본 오사카와 고베 사이 ‘나지오 뉴타운’이라는 계획 도시. 마을 곳곳에 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친환경 주택으로 화제를 모았다. 또 모노레일을 설치해 산 위의 마을까지 오르는 데 2~3분이면 충분하다. 바다에 대한 조망점을 확보한 구릉지 형태의 주거 단지이면서 편리한 접근성까지 갖춘 것. 생활 편의 시설은 물론 문화 소스까지 잘 갖춘 인프라. 이것이 바로 달맞이 주거 환경의 최강점이며, 미래이다.

로프트 스타일의 탁 트인 구조. 와우산, 청사포는 물론 멀리 대마도까지 바라보인다.

바다, 산, 언덕... 달맞이길이 품고 있는 아름다운 스토리가 부산의 가장 큰 경쟁력 아닐까.

문탠 로드를 닮은 달맞이 꼭대기 집
오션 어스 고문을 맡고 있는 김창석 씨와 아내 김정희 씨는 사옥 꼭대기 층에 산다. 그것도 최고의 조망권을 갖춘 산책로 초입의 7층 로프트 하우스다. 달맞이길의 고도 제한을 감안하면 이 지역에서 가장 좋은 전망을 자랑하는 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다는 기본이요, 와우산, 대마도, 해운대, 청사포까지 모두 내려다 볼
수 있는 지리적 조건에 거칠 것 없는 통창 구조. “부산 사람들은 바다가 옆에 있어서인지 무조건 창이 큰 걸 좋아해요. 이 집은 입면의 각도를 비스듬히 꺾고 통창으로 마감해 앞면뿐 아니라 옆면의 풍경까지 펼쳐지죠.” 디자인을 맡은 스티브 함 대표는 풍경은 기본이니 좀 더 적극적으로 전망을 즐길 수 있도록 공간을 구성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나라 주거 공간으로 흔치 않은 로프트 하우스. 스티브 함 씨는 창가에 둘러앉을 수 있도록 벤치처럼 두터운 턱을 만들었는데, 부부는 평소 이곳에 편하게 걸터앉아 책도 읽고 차도 마신다.
오브제처럼 둔 망원경이 재미있다. 청사포 조개구이집, 달맞이길 산책로, 또 점으로 보이는 통통배까지, 망원경으로 들여다본 풍경은 마치 손에 잡힐 것처럼 가까이 있다.


1 보통 전망 좋은 곳에 메인 침실을 마련하는데, 김창석 씨 부부는 오히려 게스트 룸으로 내주었다. 낯선 사
랑방에서 해돋이를 맞이하라는 배려다. 내추럴한 스타일을 완성하기 위해 가구는 모두 세덱의 원목 라인을 선택. 전망을 좀 더 적극적으로 향유할 수 있도록 창가에 테이블을 배치했다. 
2 사옥과 연결되는 주거 공간은 프라이버시 차원에서 전실이 꼭 필요했다. 현관문 앞에 가벽을 세우니 기다란 복도가 생겼다. 
3 우리 전통의 아름다움에 폭 빠진 김정희 씨. 정성스럽게 손바느질로 지은 한실 이불을 소담하게 두었다.


1 지장처럼 한지로 마감한 붙박이장. 
2 이것이 바로 박공 지붕의 묘미. 창밖으로 옥상이 바라보이는 다락방에 앉아 차를 마신다. 
3 김정희 씨는 고가구와 소소한 우리 공예품을 컬렉션한다. 


박공 지붕 라인을 살려 이국적으로 꾸민 주방. 메이플 원목 주방 가구를 선택해 전체적으로 따뜻해보인다.

이 집의 콘셉트는 한마디로 콜로니아 colonia 스타일(로마가 세운 식민 도시. 여러 스타일을 받아들였다는 뜻)이다. 열린 도시 부산, 변화를 모색하는 달맞이길의 현재를 대변하듯 여러 스타일이 혼재되어 있다. 편안하면서도 내추럴한 유럽 목조 주택을 떠올리게 하는 거실, 이국적 타일과 클래식 가구가 어우러진 게스트 룸, 여기에 안주인 김정희 씨가 좋아하는 코리안 스타일을 접목했다. 또한 획일적 공간 구분을 탈피했다. 네모반듯한 공간을 거실, 침실, 주방으로 나누는 대신, 부분적으로 가벽을 세워 공간감을 더했다. 홍익대학교에서 섬유예술을 전공한 김정희 씨는 직접 염색한 천을 곳곳에 장식했다. “명품 브랜드의 슈트보다 맞춤복을 좋아하는 것과 같은 이유예요. 디자이너는 그 사람의 프레임을 읽습니다. 얼굴색을 보고 컬러를 매칭하죠. 공간 디자인도 마찬가지예요. 가장 자신다운 것을 찾아냈을 때 가장 멋있어 보이잖아요? 사는 이의 취향도 존중해줘야지요.” 유행과는 관계없이 10년, 20년이 지나 낡아도 어색하게 보이지 않는 디자인을 추구한다는 스티브 함 대표. ‘디새’는 순 우리말로 기와를 뜻한다. 지난해 안동에서 2백 년 된 기와를 구했는데, 이끼가 끼어 있는 모습에 감동받아 이름지은 것. 그가 추구하는 스타일은 바다와 산, 해송과 오솔길이 만나 굽이굽이 이어지는 문탠 로드를 닮았다. 더디게 걸어야 진면목을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