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 조태동 교수 가족. 아빠는 가족을 카메라에 담느라 늘 사진에서 빠져 있다.
(오른쪽) 프라하에서 딴 나라 여행객과 2006 독일 월드컵을 함께 응원한 두 딸.
깊은 숨을 몰아쉴 때가 있다. 걷다가 뛰다가 멈칫하는 순간, 시간에 쫓겨 도망치듯 사는 내게 누군가 “무슨 생각해?”라고 물었을 때 나는 숨을 토해내며 “그날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한다. 내 생애 가장 뜨겁고 행복했던 107일간의 기억들.
여행에 대한 철학과 상상은 저마다 다르다. 누군가에게는 기록, 누군가에게는 감동…. 하지만 나에게는 깊은 숨이었다. 따뜻하고 차갑고, 격정적이고 편안한 숨. 내가 몰아쉬는 숨의 의미가 매 순간 달라지듯, 우리 여행은 매일이 달랐고 특별했다. 그리고 ‘특별했다’라는 한마디로 멈출 수 없는 이야기, 내 가슴속을 벗어나 또 누군가의 상상ㆍ모험ㆍ도전이 되기를 바라는 간절함. ‘춤추고 손뼉치고 소리치며 떠나는 우리 가족 여행’은 그렇게 시작됐다.
‘유럽의 지붕’이라 불리는 스위스 융프라우로 가는 기차.
카르페 디엠!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존 키팅 선생이 말했던가. “시간이 있을 때 장미 봉오리를 거두어라. 시간은 흘러 오늘 핀 꽃이 내일이면 지기 때문이다.” 달음박질치는 시간을 붙들 수는 없다. 이것이 자연의 법칙임을 안다. 쉰 살을 앞두고 점점 이기적이 되어가는 내게 왜냐고 묻고 답하지 못하는 일이 잦아지던 즈음이었다. ‘우리만의 드라마가 필요하다! 내 인생 드라마의 클라이맥스는 지금이어야 한다!’ 그 절실함이 나를, 우리를 떠나게 했다.
2006년 5월 16일 새벽, ‘춤추고 손뼉 치고 소리치며 떠나는 우리 가족의 107일간 21개국 여행’은 시작됐다. 여섯 살 된 신형이를 앞세우고 큰딸 신원이와 아내 그리고 나는 중국 베이징에서 국제선 열차를 탔다. 107일 여행의 첫걸음이었다. 만리장성을 뒤로한 채 황량한 고비 사막을 횡단하고, 끝없는 고원을 지나며, 자작나무와 백양나무 숲의 시베리아를 헤치고, 바이칼 호수에 녹아들었다. 그러고는 북으로 북으로 달려 철의 장막 모스크바의 크렘린 궁전과 사탕 나라 같은 바실리 성당, 백야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몽환처럼 돌아보았다.가슴 벅찬 여정은 북유럽 발트 해의 진주로 불리는 핀란드,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로 이어졌는데 열차와 배를 번갈아 타는 고단한 여정이기도 했다. 그 후로 1천 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체코, 슬픈 역사를 안은 헝가리를 거쳐 오스트리아를 여행하며 중세 유럽의 가슴 뛰는 역사를 더듬었다.
(왼쪽) 라벤더가 만개한 남프랑스의 세낭크 수도원.
(왼쪽) 107일간의 여행을 잘 ‘치러낸’ 막내딸 신형이.
(오른쪽)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의 미라보 정원.
지중해 주변을 내달리던 기억은 또 얼마나 강렬한지. 남프랑스의 니스와 앙티브, 칸 국제영화제의 붉은 카펫을 밟은 후 정열의 나라 스페인으로 넘어가 그라나다의 알람브라 궁전, 플라멩코를 탐닉했다. 우리는 곧바로 셰리 주의 본고장인 헤레스와 대서양이 시작되는 유럽의 최서단 포르투갈 호카 곶에 취했다. 마지막으로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북아프리카 모로코까지 치고 나갔다.
그 107일의 기억, 겹치는 기억의 조각을 퍼즐 맞추듯 끼워본다. 미지의 세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건들은 지금은 동화처럼 기억되기도 한다. 몽골에서 사기를 당해 분노하고, 피렌체에서 소녀 털이범을 만나 긴장하고, 모로코에서 만난 강도에게는 생존의 위협까지 느끼고….
(왼쪽) 13세기 중세 도시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체코의 체스키크룸로프 역사 지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왼쪽)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과 바실리 성당.
(오른쪽) 우연히 본 스페인의 결혼식 장면을 기념하며.
이 여행담을 읽으며 누군가는 107일에 21개국 여행이라는, 감당할 수 없는 여정의 무게와 속도에 질려 “이렇게 힘든 여행을 왜 떠나는 거야? 여행은 즐기고 쉬러 가는 거야?”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여행은 ‘카르페 디엠’, 곧 춤추며 손뼉 치고 소리치며 함께 떠나는 가족 여행이었다. 우리는 각 나라의 음악, 미술, 무용을 경험했다. 또 중세 도시의 박물관, 성당, 성곽, 정원, 나라별 풍속과 음식, 패션, 축제를 만끽하며 상식과 교양의 풍요를 맛보았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그 풍요로운 경험은 자유로운 사고와 뜨거운 열정, 겸손과 배려를 우리에게 선물했고, 삶과 행복의 가치를 고민할 수 있는 지혜도 갖게 해주었다.
우리 가족은 지금도 “그때 우린 정말 행복했다”고 말한다. 행복했던 우리의 시간, 잠시 멈춰도 좋다.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나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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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사진 조태동(강릉원주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