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홍대 골목길에 노란 우산을 쓰고 총총 걸어가는 여자가 있다. 블루진에 러닝화를 신고 발걸음도 가볍게 그가 향한 곳은 카페 ‘벼레별씨(시민문화네트워크 티팟과 디자인연구소 간텍스트가 운영하는 복합 문화 공간)’. 빗방울을 가볍게 튕겨내며 ‘파닥’ 하고 우산이 접히자, 그의 모습도 사라졌다. 뒤를 따라가보았지만 카페 안에는 아무도 없다. 어디로 사라진 걸까. 앗, 카페 한구석에 쪽문이 나 있다. 그가 빠져나간 문을 열고 옥상으로 향하는 계단에 오르니 기분 좋은 풍경이 펼쳐진다. 보드라운 상추와 싱싱한 적채가 컨테이너 박스 안에서 무럭무럭 자라는 모습. 이것이 바로 도심 속 텃밭이다.
텃밭의 주인이자 노란 우산 속 그는 32세 싱글녀 이정인 씨다. 디자인사무소 알트씨에서 문화 예술 기획자로 일하며 종로구 옥인동에 조그마한 원룸을 꾸리고 사는 그는 네이버 검색창에 ‘1인 가족’을 치면 가장 먼저 ‘뜨는’ 인물이다. 부모에게서 독립한 지 1년밖에 안 된 신참내기 싱글녀가 이 같은 ‘명성’을 얻은 건 유쾌한 아이디어 때문이다.
(왼쪽) 1인 가족 에코네트워크 프로젝트가 실천하는 ‘도시 농업’ 현장, 벼레별씨 카페 옥상이다.
정인 씨는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했지만 졸업 후 ‘필드(직업 현장)’로 나가지 않았다. 평소 인문학에 관심이 많고 문화 기획에도 흥미를 느끼던 터라 잠시 취업을 미루고 한국디자인문화진흥원에서 운영하는 문화 기획자 과정을 이수하기 위해서였다. 3개월의 수업을 마치면서 그가 과제로 낸 아이템은 ‘1인 가족 에코네트워크’였다. 혼자 사는 사람끼리 모여서 채소도 키워 먹고 여가도 함께 즐기자는 것이 이 공동체의 취지다. 그의 반짝반짝 빛나는 아이디어는 희망제작소 창안센터의 지원으로 현실에서 재현되었고, 소기의 성과도 거뒀다. 1인 가족 에코네트워크 ‘이웃울라라’는 자취 생활에 찌들고 병든 육체를 신선한 채소와 과일로 정화하고, 나날이 좁아져가는 인간관계를 새롭게 도모하기 위해 만든 생태 공동체다. 지난 1년 동안 마포구 합정동 벼레별씨 카페 옥상에서는 ‘이웃울랄라’ 회원들이 농사를 지었다. 4월에는 씨를 뿌리고, 5월에는 잡초를 뽑고, 7월에는 수박을 따고, 10월에는 고구마를 캐면서 회원들은 혼자 사는 외로움을 덜고, 함께 먹는 기쁨을 키워갔다.
“가족을 벗어나면 또 다른 형태의 ‘관계’가 필요하죠” “어릴 때부터 혼자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어요. 나이가 들수 록 부모님의 간섭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어지더라고요. 서른 넘은 딸에게 통금 시간 정해 두고 자꾸만 전화하는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거든요. 그럼에도 엄마랑 밀접하게 지내야 한다는 사실이 목을 조여왔어요. 엄마는 당신만의 공고한 가족 이데올로기가 있죠. 그 틀에 저를 끼워 맞추려고 하니까 계속 싸움이 일어나는 거예요. 제가 독립을 하게 된것도, ‘이웃울랄라’를 만들게 된 것도 8할은 엄마 때문인 셈이에요.”
스스로 모은 얼마 안 되는 돈으로 월세방을 구하다 보니, 서울 하늘 아래서 홀로서기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지 정인 씨는 톡톡히 깨달았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새로운 일을 찾기까지 정인 씨는 도시락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기도 했다. 경제적으로는 어려움이 따랐지만 그래도 싱글 라이프는 달콤 했다. 부모의 간섭에서 벗어나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먹고 싶은 대로 먹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즐거움을 난생처음 맛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혼자 사는 기간이 길어지자 사람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혼자 살면서 가장 목말랐던 건 사람이에요. 가족으로부터 벗어나니까 새로운 관계에 대한 욕구가 생기더라고요. 저는 사람 관계에 많이 의지하는 편이거든요. 나와는 다른 사람, 다른 업종, 다른 세계관, 다른 나이의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어요. 혼자 있으면 계속 침잠하게 되잖아요. 그게 싫더라고요. 혼자 사는 사람이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공공의 일에 관심이 많아요. 에너지를 가진 사람을 만나면서 새로운 삶을 모색하는 걸 다들 원하죠.”
정인 씨는 자신과 생각이 비슷한 사람을 모으기 위해 네이버 블로그에 ‘1인 가족 에코네트워크’ 모집 광고를 냈다. 반응은 예상외로 폭발적이었다. 회원이 되길 원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공동체를 통해 새로운 친구를 만들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취미 삼아 짓는 농사인데 그걸 수확해서 매끼 찬거리를 때울 순 없죠. 농사는 말 그대로 취미로 하는 거고, 그 과정을 통해 공통의 화제가 생기는 게 재미있더라고요. 농사가 실패하면 오히려 더 얘깃거리가 많아지죠. 사실 제가 농사에 대해 뭘 알겠어요. 기껏해야 도시 농부 학교에서 한 달 정도 기본기를 배운 것 정도죠. 운영자이긴 하지만 모르는 건 솔직하게 모른다 하고 같이 해보자는 식으로 사람들을 이끌어요. 대신 도시 농업에 관한 책을 추천한다거나 다른 나라의 생태 공동체 정보를 알려주는 일을 하죠.”
(오른쪽) 벼레별씨 카페 뒷마당에서 커피를 마시며 잠깐의 휴식을 취한다.
이 모임을 하면서 정인 씨가 원한건 ‘이웃울랄라(cafe.naver.com/ecolalala)’ 내에 소모임이 생기는 것이었다. 독서나 가구 만들기 모임 같은 것 말이다. 하지만 개성이 강하고 자기 시간을 중요하게 여기는 회원들은 소모임까지 만드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적당한 시간을 같이 보내고 기분 좋게 만날 수 있는 친구가 필요한 것이지, 끈끈하게 우정을 나누고 가족처럼 정이 드는 관계를 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내 스케줄에 따라 모임을 건너뛸 수도 있고, 모임이 싫어지면 언제든 탈퇴할 수 있는 자유, 그것이 보장돼 있기 때문에 그들의 활동은 지속되어왔다.
“작년 말에 에코네트워크 회원들하고 MT를 갔거든요. 회원들이 그러더라고요. 혼자 사니까 소외감도 느끼고 사람 만날 일이 점점 줄어들어 이 모임에 나왔다고요. 저도 그들도 바라는 건 한 가지인 것 같아요. 모였을 땐 즐겁게 놀고, 사생활은 존중해주고. 혼자 산다는 건 자기만의 견고한 세계를 갖는 거잖아요. 그 세계가 탄탄해지려면 사람과의 소통이 꼭 필요한 것 같아요.”
- [1인 가족] 1인 가족 에코네트워크 ‘이웃울랄라’ 운영자 이정인 씨 혼자 살지만 소통을 원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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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1년 6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