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꼭 한 번 다녀와야 할 감옥! 시골 촌부의 장남으로 태어나 서울대학교 법학과에 단번에 합격하는 행운을 거머쥔 박원순 씨는 부푼 꿈을 안고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1975년 당시 서울대 법대 입학은 대한민국 사회에서 부와 명예를 한꺼번에 누릴 수 있는 유일한 보증수표였다.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을 좌우명처럼 여길지언정 그의 서울 생활은 찬란했다. 동기들과 어울려 밤새도록 대자보를 쓰고 시위와 투쟁을 밥 먹듯이 하며 푸르게, 열렬하게 사람 사는 것처럼 살았다. 하지만 꿈같은 시절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는 대학에 입학한 지 3개월 만에 교내 시위에 연루돼 학교에서 제적을 당하고 감옥살이를 하는 신세가 됐다. 장래가 촉망되던 청년이 하루아침에 삶의 가장 밑바닥으로 추락한 것이다. 회색 담벼락으로 둘러싸인 어둠의 방에는 강도, 소매치기, 강간범, 살인범이 우글거렸다.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시골 청년에겐 무시무시한 세계였다. 박원순 씨는 그 충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정신없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갚아야 할 빚처럼 마음속에 남겨둔 성경을 독파했고, 김동리의 <사반의 십자가>와 마르쿠제의 <이성과 혁명>을 읽으며 그 뜻을 마음에 품었다. 그러는 사이 귀가 열리고 눈이 뜨였다.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순간의 실수로 죄를 저지르긴 했지만 그들도 우리처럼 부모님 얘기만 나오면 눈물 바람이고, 감옥에서 나가면 새 인생을 살아보겠다며 매일 밤 다짐하는 인간이었다. 그들을 바라보면서 박원순 씨는 ‘왜 죄를 짓게 되었는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억눌리고 가난한 사람들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환경을 돌아보게 된 것이다. 그즈음 읽게 된 독일의 법철학자 예링의 책은 그에게 커다란 명제를 안겨 주었다. “법의 목적은 평화이고, 거기에 이르는 과정은 투쟁이다.” 그는 감옥이라는 도서관에서 인생의 좌우명을 얻은 것이다.
(왼쪽) 그가 ‘후’ 하고 불면 희망의 비눗 방울이 세상에 가득 차오른다.
“줄을 잘 선 거죠. 그때 감옥에 가지 않았다면 지금쯤 변호사로 성공해서 큰돈을 벌었겠죠. 가족과 호의호식하면서 인생을 즐겼을 거예요. 그리고 가끔 청문회에 나가 위장 전입한 국회의원들을 변호했겠죠. 그런 삶을 비껴갈 수 있게 해준 감옥소에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그때 만난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전 지금처럼 세상의 중심에 설 수 없었을 거예요. 희망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걸 깨닫지 못했을 테니까요. 가난한 자와 힘없는 자가 세상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몰랐을 거예요.”
유쾌한 상상으로 희망을 꿈꾸는 사람들
대학 입학 3개월 만에 학생운동으로 구속되어 4개월간의 감옥 생활을 마치고 출소한 박원순 씨는 이전과는 다른 심정으로 또 한 번의 입시를 치렀다. 단국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한 그는 1980년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검사를 거쳐 인권 변호사로 일하며 10여 년간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의 인생 멘토인 조영래 변호사와 함께 망원동 수재 사건, 구로 동맹파업 사건, 부천 성고문 사건, 서울대 조교 성희롱 사건 등을 해결하며 참여민주주의와 인권연대를 위한 참여연대를 창립했고, 아름다운가게와 아름다운재단을 설립해 전국에 100개 매장을 열고 300명의 고용을 창출하며 연간 1백50억의 매출을 올렸다. 하루를 48시간처럼 살고 1년 중 300일을 길 위에서 보내며 그가 피워낸 꽃은 세상을 바꾸는 일이었다. 진보적인 사회운동과 나눔의 실천, 기부 문화의 확산으로 외롭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는 것, 그는 이 일에 매달리면서 스스로를 ‘소셜 방안 가득히 넘친 디자이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세상 사람들 아무도 몰랐죠. 제가 어느 날 갑자기 만든 이름이니까요. 아마 세계 최초일 거예요. 마음대로 누구의 허락도 없이 제가 만들었죠. 우리가 흔히 디자인이라고 하면 패션이나 인테리어 같은 외향적인 업그레이드를 말하잖아요. 하지만 제가 말하는 디자인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를 업그레이드하는 거예요. 유쾌한 상상력으로 지금보다 나은 세상, 그런 세상을 만드는 다양한 아이템과 비전을 정리하고 연구해서 세상에 내놓는 거요.”
(왼쪽) “양로원이나 경로당을 다닐 때마다 참 서글퍼요. 일에서 은퇴했다고 인생에서 은퇴한 건 아니잖아요? 인생의 후렴구를 더 잘 부르기 위해 우리는 노년을 다시 설계해야 합니다.”
“지하철을 탈 때마다 일률적인 높이의 손잡이가 아쉽습니다. 키가 큰 어른은 큰 불편 없이 잡을 수 있지만, 키가 작거나 어린이일 경우 너무 높은 손잡이를 잡지 못해 지하철에서 비틀거릴 때가 많아요. 그렇다면 지하철 손잡이 중 몇 개는 낮춰보는 것이 어떨까요. 그럼 키가 작은 어른도, 어린이도, 노인도 편안하게 손잡이를 잡을 수 있지 않을까요.” 남들보다 키가 작은 시민 한 사람이 희망제작소로 보낸 편지가 시발이 되어 2009년 수도권 지하철 9호선에는 높낮이가 다른 손잡이가 등장했다. 기존의 167cm보다 10cm 정도 낮은 위치에 손잡이를 설치해 어린이는 물론이고 키 작은 어른, 노약자, 장애인이 모두 손잡이를 잡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들어오는 시민들의 의견을 들어보면 사람들이 생활 속에서 느끼는 불편함은 너무나 보편적인 것이었다. 지금까지 희망제작소 홈페이지(www.makehope.org)에 올라온 ‘희망 아이디어’는 3000건이 훌쩍 넘지만, 대한민국 시민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이야기다. 그중 몇 가지를 간추려본다.
1 택시 뒷좌석에 기사님 명함을 비치해두면 휴대폰이나 귀중품을 두고 내렸을 때 찾기 쉽지 않을까요?
2 이력서에 주민등록번호 뒷자리는 기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구직자는 왜 열등한 위치에서 개인 정보를 노출해야 하나요?
3 백화점에서 구입한 옷을 환불할 때 영수증이 없으면 환불을 안 해주는데, 물건에 찍힌 바코드로 환불 처리가 가능하도록 시스템을 바꾸면 어떨까요?
4 대부분의 포털사이트에는 해당사의 전화번호나 이메일, 팩스 번호가 안내되어 있지 않습니다. 기사 내용과 관련해서 문의가 많을 텐데 포털 사이트가 베일에 가려 있다는 건 문제가 있습니다.
5 노숙자를 비롯한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길거리 영화 상영이나 콘서트가 활성화됐으면 좋겠어요.
희망제작소는 시민의 소리를 듣기도 하지만 그들을 가르치기도 한다. 이른바 ‘소셜 큐레이팅 social curating’은 세상을 바꾸려는 의지가 있는 사람들을 모으고 그것을 실천하도록 돕는 일을 뜻한다. 박원순 씨는 이 과정을 ‘꿈을 가르치는 수업’이라고 부른다. “우리에게 꿈이 있나요? 여러분은 어떤 꿈을 꾸고 있나요? 부자가 되는 꿈? 아파트 평수를 늘리는 꿈? 외제차를 갖는 꿈? 저는 대한민국 사람들이 진짜 꿈이 없다고 생각해요.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건 꿈이 아니에요. 돼지는 매일 꿈을 꾸잖아요. 오늘 얼마나 맛있는 걸 먹을까. 인간이 그런 꿈을 꾼다면 그건 결코 꿈이라고 할 수 없어요. 사람이 꾸는 꿈은 꿈다워야 해요. 공자님이 지천명이라는 말을 했죠. 하늘이 준 소명이 뭔지 알아가는 게 진짜 꿈이에요.”
농촌이 블루오션이다 박원순 씨가 일하는 희망제작소 사무실에는 책과 파일이 빼곡히 들어차 발 디딜 틈이 없다. 여수에서 배달된 지역 신문 하나까지 버리지 않고 스크랩하는 ‘자료 수집병’을 갖고 있는 그는 아주 작은 정보도 버리지 않는 것이 소셜 디자이너의 첫걸음이라고 강조한다. “제 방이 참 어지럽지요. 하지만 이 안에 버릴 거라곤 하나도 없습니다. 저는 매일 아침 신문을 읽고 중요한 부분을 잘라둡니다. 그걸 스캔 받아서 데이터로 저장해두고 희망제작소 홈페이지나 원순닷컴(www.wonsoon.com)에 올리죠. 정보의 흡수, 분류, 기록, 축적, 공유는 저를 육백만 불의 사나이로 만들어줍니다. 저 하늘에 날아다니는 정보나 뉴스거리도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기거든요. 제가 하는 일이 족족 성공하는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그렇게 쌓인 정보가 바탕이 되어 이 시대가 어디로 흘러갈지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가서 미리 그물을 치고 기다리고 있으면 사람들이 몰려들죠.” 그가 2006년 4월 희망제작소를 창립할 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지역 공동체다.
박원순 씨는 연구원들과 함께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지역 사람들을 만나고 농촌 생활을 피부로 체험하면서 농촌이야말로 21세기의 블루오션이라는 걸 절실히 깨달았다. 농촌의 현실은 암담했지만, 그 속에서도 공동체를 복원하려는 사람들의 집요하고도 다양한 노력이 눈물겹게 이뤄지고 있었다. 거듭되는 농사의 실패로 빚더미에 올라앉은 농민들 가운데에서도 창의적인 발상과 남다른 노력으로 농업의 가능성을 보여준 사람들이 있고, 모두가 떠나간 농촌의 폐교에서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기 위해 위장 전입을 자처하는 교사들도 있다. 개인의 고난과 마을의 갈등을 극복하고 화합으로 지속 가능한 공동체를 이끈 이장들, 지역의 환경ㆍ 여성ㆍ복지ㆍ언론ㆍ지역 정치 등 여러 영역에서 캠페인을 벌여온 활동가들, 비능률과 ‘철밥통’의 관료적 풍토 속에서도 지역 주민과 지역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는 일부 지방자치단체의 장과 지역 관리들, 이들은 이 시대의 진정한 영웅이고 이 사회를 올바르게 이끌어갈 리더이다. 절망과 불가능 속에서 희망이라는 정화수를 길어 올린 두레박 같은 존재, 그들이 있어 농촌은 21세기의 블루오션이다.
지역 주민을 만나러 다니는 노란 버스 우리나라에서는 매년 상당수의 사람들이 영국으로 건너가 박사 학위를 따온다. 하지만 그들 중 현장 학습을 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박원순씨는 지난해 몇 달간 영국을 여행하며 사회적 기업을 이끄는 핵심 브레인들을 만났다. 그들이 도대체 무엇을 고민하고, 어떻게 세상을 바꾸려는지 심층적으로 연구해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다 영국의 한 지역 사회에 ‘노란 버스’가 다닌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다. 그 노란 버스의 정체는 어느 민간단체가 운영하는 ‘자문 버스(consultancy bus)’였다. 이 버스는 마치 이동식 간이 호텔처럼 화장실과 냉난방 시설, 냉장고와 먹을거리를 갖추고 다니며 지역 사회의 민원을 처리하고 이벤트를 주최하는 일을 했다. 장애인을 위해 휠체어도 오르락내리락할 수 있고, 노약자를 위해 간이 의자나 그늘을 만드는 차양도 갖추었다. 박원순 씨가 이 버스를 보기 위해 그 지역으로 갔을 땐 청소년에게 에이즈 예방을 위한 콘돔 사용 권장 이벤트가 열리고 있었다. 그는 이 일을 시작한 RSA사의 대표에게 어떻게 이런 일을 하게 됐냐고 물었다. “우리는 돈을 벌지 않아도 됩니다. 배당할 주식도 없죠. 단지 지역 주민들의 요구에 귀 기울이고 그 요구를 해결해주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지역의 활성화는 외부의 거대 기업이 절대 이끌어나갈 수 없습니다. 지역 안에서 해결하면서 자구책을 찾아야 합니다.” RSA사 대표 토니의 말이다.
박원순 씨가 영국을 여행하면서 든 생각은 하나다.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이 아주 보편적으로 정해져 있다는 것, 다만 우리가 그것을 모르고 있을 뿐이라는 것. 문화와 생태, 정부와 민간, 윤리적 기업과 NGO, 농촌과 리사이클링이 함께 어우러져 순기능을 할 때 지역이 살고 나라가 살고 희망이 가득한 세상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박원순 씨가 제안하는 아름다운 나눔을 위한 십계명
1 돈과 사회적 지위에서 자유로워지면 상상의 세계가 넓어진다.
2 내가 가진 것 한 스푼을 덜어내면 행복 두 스푼이 돌아온다.
3 생활 속 작은 것에서부터 나눔을 습관으로 만든다.
4 나눌 수 없는 가난은 없다. 지갑이 두꺼워야 나눌 수 있다는 생각은 버린다.
5 내 안의 선한 의지를 의심하지 않는다. 나눌 마음이 들면 즉각 실행에 옮긴다.
6 아름다운 나눔은 숨길 일이 아니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도 알게 하라.
7 좋은 일은 전염된다. 특별한 날, 소중한 사람을 위해 1% 나눔을 선물한다.
8 부자를 꿈꾼다면 나눔을 실천할 줄 아는 멋진 부자가 되라.
9 내 자식이 잘되기를 바란다면 재산이 아닌 지혜를 물려주라.
10 세상의 탐욕에 물들기 전에 미리 유언장을 작성해둔다.
참고 도서 <원순 씨를 빌려드립니다>(21세기 북스)<올리버는 어떻게 세상을 요리할까>(이매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