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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병우의 중국기행] 유교는 중국의 미래가 될 수 있을까
중국을 이끌어갈 새로운 사상으로 유교 儒敎가 떠오르고 있다. 중국은 서양보다 압축적으로, 더 빠른 속도로 성장해야 했기에 삶의 의 義와 인 仁과 도 道를 꼬박꼬박 지켜야 하는 유교를 모질게 버렸다. 그 추월의 몸짓에 발목을 잡는다는 이유로. 마음이 급한 건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중국과 우리가 같은 이유로 버렸고, 이제는 또 같은 이유로 황급히 되찾으려는 유교의 가르침은 중국과 우리에게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발걸음의 동력이 될 수 있을까?


공자가 시작하고 맹자와 순자에 의해 학문적으로 풍부해진 유교를 한 국가의 통치 철학으로, 또 개인이 실천할 수 있는 도리로 구체적인 길을 터준 사람은 주희였다. 그가 동료들과 새로운 세상에 대해 ‘박 터지게’ 고민하고 공부한 터가 바로 이곳 주희의 옛집이다. 단정하고 검박하지만 단단해 보이는 이 사각의 공간에서 주희는 주자학을 만들었고, 이 학문은 수백 년간 동아시아를 이끈 공식 학문으로 자리 잡았다.

새해가 시작된 지 열흘을 갓 넘긴 1월 11일, 중국 권력의 심장이라는 천안문 광장에 아주 재미있는 풍경이 생겨났다. 청동으로 만든 9.5m짜리 공자상이 세워진 것이다. 기원전 551년(예수님도 태어나기 전에 말이다) 노나라에서 태어난 학자로 2500년 동안 중국 정신의 뿌리가 된 유교를 창시한 공자. 중국인의 정신세계와 살아가는 도리의 틀을 만든 공자의 목을 벤 사람은 마오쩌둥이었다. 1960년대 새로운 세상, 인민이 주인이 되는 혁명을 꿈꾸면서 그는 세상의 중심이던 중국이 세계사에서 이렇게 뒤처지게 된 것이 모두 공자 때문이라며 공자의 배를 가르고 목을 쳐냈다. 아시다시피 북경의 천안문 광장에는 60m 크기의 마오쩌둥 초상화가 걸려 있다. “공자를 죽여야 중국이 산다”고 말한 마오쩌둥과 불과 400m의 거리를 두고 공자상이 섰으니 두 인물의 마주 봄이 앞으로 펼쳐질 중국, 아니 세계사의 풍경 같아서 꽤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가 될 것 같다.

중국인에게 유교는 어떤 의미일까? 아직도 중국의 일반 가정집에 가보면 그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복 福자 옆에 여전히 부적처럼 공자의 가르침인 논어의 구절이 붙어 있다. 천자와 인민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짬뽕처럼 섞여 돌아가는 혼미한 삶 속에서도 그들이 마음의 고향으로 두고 있는 것은 유교적 가르침인 것이다.


동서양의 고전을 넘나들며 비교철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나가고 있는 로저 에임스 Roger Ames는 <죽은 자의 민주주의>라는 책에서 “미국의 민주주의는 살아 있는 사람만을 위한 민주주의입니다. 그래서 환경과 같은 미래 세대의 권리나 과거 세대의 공헌 등이 이슈가 되지 않습니다. 민주주의가 문화·생활양식·제도·물려받은 문화적 토양에 기반하려면, 과거 조상의 유산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하면서 동양의 유산인 유교와 서양의 유산인 민주주의를 어떻게 합체시킬까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주희의 옛집에서 마주친 ‘孝’라는 글자 앞에서 가슴이 먹먹해지는 건 우리가 너무 쉽게 저버리고 있는 그 오래된 예의 때문이리라.

중국 철학에서 그리고 중국인의 삶에 가장 크고 깊은 영향력을 미친 공자의 가르침에서 가장 중시하는 것은 인 仁과 의 義다. 유럽에서 인본주의 人本主義라는 르네상스 운동이 일어나기 2000년이나 전에 이미 유교는 인간을 사유의 중심에 두고 있었다. 유가 儒家의 주된 의문은 인간은 어떻게 자신을 발전시키고, 현세에서 큰 뜻을 품고,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학식 있고, 지조 있는 군자 君子가 되는것이 모든 것에 우선했고 개인과 사회의 조화와 균형에 관심이 있었다. 공자는 애초부터 우주의 신비나 자아 自我, 그리고 구원 같은 것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공자 평전>을 쓴 안핑친의 말처럼 (“삶의 어려움을 누그려뜨려주지도 못하고 죽음의 두려움을 위로해주지도 못하는 자기 탐구와 자기 개혁의 힘든 일을 좋아할 사람이 많이 있겠는가? 제자들조차 공자의 길을 따라가려면 힘이 부친다고 얘기했다.”) 그의 가르침에는 위로나 위안을 얻기에는 힘에 부치는 많은 의무와 도리가 있다.


주희의 오래된 옛집 앞에는 주희가 직접 심었다는 800년 된 나무가 거대한 거인처럼 서 있다. 유교가 상습적으로 받게 되는 ‘과거에 머물 수밖에 없는 학문’이라는 비난도 저 켜켜이 쌓인 세월의 눈부심 앞에서는 무색해진다. 유교가 ‘오래된 미래’가 될 수 있음도 저 나무의 생명력과 같은 이유에서일 것이다.

이번 중국 기행에서 우리는 공자의 생가 대신 주희가 학문을 펼친 곳이라는 복건성 북쪽 무이산 근처의 주희 고택에 들렀다. 우리네 1960년대 시골 같은 풍경이 펼쳐지는 촌 村마을에서 우리는 주희라는 학자를 만났다. 주희는 공자가 만들어내고 맹자와 순자가 발전시킨 유교라는 큰 사상과 가르침에 선명한 길을 내준 사람이다. 유교를 통치 이념과 삶의 도리로, 이를테면 살아가면서 실천하기 좋은 가이드라인으로 정리한 사람이 주희인데, 그 가르침이 주자학으로 우리에게 전해져 조선의 통치 철학이 된 것이니 우리와도 먼 사람은 아닌 것이다. 중국 역사에서 가장 의미 있는 변혁기인 12세기에 주희는 유교적 가치가 중국 문화의 주류가 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우리가 이해하는 유교는 너무도 작은 범위다.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를 다하고, 부부와 친구 간에는 예를 다하는 기본적인 인간 간의 도리. 어쩌면 유교는 넓은 의미에서 ‘관계’의 학문일 수도 있다. 그리고 세상의 이치를 이해하는 ‘관계’의 시작은 부모, 부부, 친구, 자식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가 앞으로 살아갈 세상은 이런 ‘관계’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이미 우리는 ‘네트워크’라는 거대한 관계망 속에서 삶을 꾸려가야 하는 운명이니 말이다. 천안문 광장에서 공자는 자신의 목을 쳐낸 마오쩌둥의 얼굴을 바라보며 무슨 말을 건네고 있을까? 아마 그는 예의 그 인자한 미소로 이미 마오쩌둥에게 악수를 청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 소나무 사진으로 세계적인 작가가 된 배병우 선생이 중국의 세계문화유산을 찍기 시작했습니다. <행복>에서는 내밀하고 깊숙한 시선으로 중국의 과거를 찍는 그의 여정을 연재합니다. 중국 기행은 중국의 문화유산 여행을 통해 다음 세계를 이끌어갈 키워드를 찾아가고자 하는 한샘의 지원으로 계속됩니다.

글 김은주(디자인하우스 단행본팀 편집장) 사진 배병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1년 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