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세상에 꽃이 핀다. 눈 오고 바람 부는 한세월 지내더니, 사람의 세상에 꽃이 핀다. 삼동을 참아온 그 아이들이 깔깔거리며 피어난다. 그 옆에선 또 다른 한세월을 시작하는 사람의 기지개 소리 들려온다. <행복> 2월호 표지 작품인 ‘생명의 노래-환희’는 그렇게 봄처럼 피어났다. 힘찬 필선으로 뻗어나가는 봄의 기지개. 자세히 들여다보니 이 꽃 그림에는 생명이 혈관처럼, 시내처럼 흐르는 것 같다. 쿵쿵거리는 꽃의 심장도 보인다. 꽃과 사람이 서로를 다정하게 바라보는 듯도 하다. 미술 평론가 이주헌 씨의 글, “서로를 형상이 아닌 존재로 인정하는 진솔한 눈빛에서 생명이 성장하고 행복이 자라난다”라는 알 듯 모를 듯한 글이 떠오른다.
많이 알려졌지만 김병종 화백이 ‘생명’이라는 화두에 몰두하게 된 사연을 새삼 다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최루탄으로 가득 찬 1980년대를 살아내면서 시대를 고민한 그의 첫 개인전 작품은 화단에 충격을 던졌다. 황진이, 춘향, 예수처럼 ‘뜻을 세웠으나 좌절해 피투성이가 된 인물’을 그렸는데 특히 가시면류 관을 쓴 채 눈물이 맺힌 ‘바보 예수’ 연작은 둔기처럼 사람들의 심장을 두들겼다. 그러다 1989년 신림동 고시촌에서 연탄가스에 중독돼 빈사지경까지 갔다 온 후 그의 작품은 변했다. 생명이 뿜어내는 영기로 가득한 ‘생명의 노래’ 연작이 시작된 것이다. “1990년 첫봄, 나는 온전치 못한 몸을 끌고 들로 산으로 숲으로 돌아다녔다. 그러면서 온 천지에 흐르는 생명의 기운을 느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거대한 창조 미술관이었 다. 병약할 때 오히려 생명을 노래하게 하는 그 붓의 끌림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작가 노트 중)
꽃과 나무, 아이와 학, 물고기와 새가 서로 다정하게 바라보면서 생명의 기쁨을 나누는 그림이 그때부터 시작 되었다. 닥종이를 부조처럼 붙여 올린 위에 채색을 하기도, 힘찬 필선과 엷은 바림만으로 화면을 채우기도 하면서 ‘생명’을 그려나갔다. 그 그림은 옛 토담처럼 정겹고 따뜻했다. 미술에 문외한인 이가 들여다봐도 기분 좋아지고 아름답다 느껴지는 그림이었다. 그러면서도 강렬한 힘이 들어 있었다. 고구려 벽화부터 문인화, 민화에 이르기까지 끈질기게 공부한 공력이 그림 안에서 스며나온 것이다.
그렇게 10년 넘게 ‘생명의 노래’ 연작에 몰두하다 어느 날 그는 낯선길 위로 떠났다. 알제리, 튀니지, 쿠바, 페루, 칠레처럼 산업화가 좀 더디게 일어나던 나라에서 그는 또 다른 ‘생명력’을 발견했다. 초록색의 나무와 꽃이 영기를 뿜어대는 마조렐의 정원, 옥빛 바닷물에 아이가 뛰어드는 카리브 해변, 쿠바 여인네들의 현란한 몸짓을 길위에서 만나고, 감격하고, 그림으로 그렸다. “모든 생명은 서로 바라보다가 마음이 이어지게 마련”이라고도 썼다.
왜 ‘생명’이라는 화두에 몰두하느냐는 청맹과니 같은 질문에 그는 성실하게 화답한다. “어둡기로 치면 누구보다 어두운 상황이었죠. 초등학교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떠돌아다니고, 시대의 고민을 안은 채 살아가야 했고, 불구까지 생각할 정도의 사고도 겪고…. ‘결여’와 ‘결핍’이 더 많은 사람이지요. 하지만 내 DNA는 어둡고 침울한 걸 봐도 밝게 표현하려는 DNA인 것 같아요. 아마도 나는 자연이 키운 아이여서 그렇겠죠? 들로 산으로 뛰어다니며 자란 내게 자연이 준 낙천성, 긍정적 에너지. 바로 생명의 에너지죠. 그 생명은 곧 원색과도 연결되죠. 어렸을 때 끝간 데 없이 자운영 꽃이 핀 들판에도, 소꼬리를 잡고 하루 종일 뛰놀던 초원에도 색이 있었어요. 아프리카에서, 중남미에서 만난 것도 그간 내가 잃은 생명의 정서였고요. 그 감격적인 세계를 그림으로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요.” 그래서일까. 그의 작품을 보고 ‘오랜만에 행복감을 느꼈다’ ‘우울증이 치료 됐다’ ‘7년 동안 불임이었는데 아이가 생겼다’는 따위의 소식이 처처에서 편지에 실려 날아오기도 한다.
(오른쪽) 김병종, ‘생명의 노래-순이 이모’
그는 심심파적을 넘어선 글을 쓰는 ‘미술계의 문학인’이기도 하다. 대학 시절 <동아일보> <중앙일보>의 신춘문예에 당선했고, 대한민국 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내게 그림이 밥이라면 글은 반찬이지요. 어렸을 때부터 두 세계가 내 안에 동거해온 것 같아요. 내게 글쓰기는 자연 발생적이고도 무의식적인 거였는데, 그건 아마 직업적으로 쓰는 사람이 아니어서인가 봐요. 누군가 내 글을 읽고 수채화처럼 그림이 펼쳐진다고 느낀다면 성공한 거죠. <라틴 화첩 기행> 같은 책은 여행지에서 스케치하듯이 썼어요. 그냥 내 안에서 풀어져 나왔어요.” 신은 역시 몰아주기를 즐기신다. 그는 유가 철학으로 박사 학위도 받았다.
(왼쪽) 김병종, ‘생명의 노래’
그의 그림을 보면서 우린 이렇게 행복해지는데, 정작 그 그림을 그리는 그는 행복한가?
“<행복 요리법: 행복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란 책(그가 <행복> 기자들이 필독해야 한다고 추천한 책이기도 하다)을 읽고 몇 가지 깊은 생각을 했어요. 스물여섯 살에 분자생물학 박사 학위를 받은 촉망받는 과학자였다가 어느 날 자신의 미래와 문명을 버리고 티베트로 떠나 승려가 된 마티유 리카르가 쓴 책인데요. 그걸 다 읽고 ‘사소하고 작은 행복이라도 의지와 의식을 가지고 가꿔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그때부터 아침에 가족이 식사할 때 듣는 음악을 꼭 내가 선곡해요. 메뉴를 고르듯 그날의 음악을 고르죠. 차려진 음식, 날씨, 분위기 등과 연결 지어 세심하게 골라요. 우리 식구들은 알아채지 못할 수도 있지만, 하하. 행복은 꼭 크고 거창한 것이 아니라 작고 사소한 것을 가꾸며 음미하는 데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디지털 시대를 고되게 달리는 우리에게 따뜻한 손을 흔들어주는 그의 그림. 생명이 충만한 이 세상으로 잠시 건너오라고 손짓하는 그의 그림. 봄처럼, 꽃처럼 가슴에 붉게 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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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종 씨는 1953년 남원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회화를 전공했다. 서울, 파리, 시카고, 브뤼셀, 바젤, 도쿄, 베를린 등에서 수십 차례의 개인전을 가졌고, 수백 회의 국내외 기획전에 참여했다. 대영 박물관, 온타리오 미술관,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등이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미대 학장을 역임했고, 현재 서울대학교 미대 교수로 재직중이다. 유가 철학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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