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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 하우스]외암리 84번지에 펼치는 아티스트의 꿈 인생이라는 오페라 무대에서
시대를 주름잡은 헤어 스타일리스트로, 동물적 감각으로 꽃을 스타일링한 플로리스트이자 카페 모우의 운영자로, 또 화가로 변신을 거듭한 아티스트 이상일 씨. 그가 얼마 전 충남 아산 외암리에 한옥 아틀리에를 마련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전통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고자 꽃으로, 붓으로, 펜으로 ‘행 行함’을 실천하는 그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보자.

“여보! 내가 땅을 파고 항아리를 묻을 테니, 당신은 그 안에 차곡차 곡 꾹꾹 눌러 넣어요. 아, 비닐봉지는 씌우지 말고 뚜껑만 덮어요. 항 아리는 숨을 쉬어야 한대요.” “넓은 배춧잎으로 덮고 굵은소금을 슬 쩍 뿌려야 맛의 변질이 덜하대.” “그런데 신기하지요? 설이 지나면 귀신같이 김치 맛이 변하는 게…. ” 태풍이 휩쓸고 간 지난여름 막바지에 온양 시장 종묘상에서 배추 씨앗과 무 씨앗을 사다 채마밭에 뿌리 고 비료 대신 아궁이에 남아 있던 재를 뿌려 뒤엎어 키운 배추와 조선 무가 싹을 틔운 지 벌써 1백일이 지나갑니다. 지난 주말, 슴슴하게 소금에 절여서 약간의 고춧가루, 파, 마늘, 생강에 생새우를 넣고 버무려 담근 납작한 푸른 배추김치는 그렇게 뒤뜰에 묻었지요. 무는 듬성 듬성 썰어 넣었는데, 깜박하고 마른 고추 씨앗 넣는 걸 잊어버렸어요. 명석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던 아내가 자꾸 깜박하는 걸 보면, 세월이 참…. -이상일이 보내는 겨울 편지 중

파크뷰 by 헤어뉴스의 헤어 스타일리스트, 머리카락처럼 꽃을 만지는 플로리스트이자 카페 모우의 전시 큐레이터(현재도 패션 디자이 너 구본국 씨의 드레스 전시를 기획했다), 화가…. 누군가는 ‘넘치는 끼를 주체하지 못하는 트렌드세터’라 부르고, 누군가는 수많은 영역을 넘나드는 아티스트라 표현한다. 이상일. 그의 팔색조 같은 모습 을 익히 알고 있다면 최근 한옥 아틀리에를 얻었다는 소식에 ‘또?’라 는 말이 앞설터. 8년 전 카페 모우를 오픈하고, ‘블랙 란제리’란 이름의 전시에 수줍게 초댓말을 적어 보낸 몇 해 전처럼 엷은 한지에 길게 써 내려간 겨울 편지는 김장 에피소드로 첫 구절을 시작한다.
“휴일이면 저희 부부는 이곳에서 흑백사진처럼 담백한 추억을 만들며 조촐하게 시간을 보냅니다.” 마치 일기처럼 쓴 그 편지는 사람의 마음을 동하게 했다. 그가 보낸 시 같은 주소, ‘빛나는 구름이 머무는 곳, 온양 외암리 광운루’를 찾은 주말. 집으로 향하는 돌담 길을 함께 걷다 그가 충청도에 얽힌 재미난 농담을 하나 들려준다. “하루는 좁은 길에서 경운기가 덜덜거리며 앞을 막고 가기에 간신히 추월해 붙잡아 세웠어요. 뒤에 차들이 줄줄이 막혀 있는데 좀 비켜주지 그러느냐는 원망 섞인 말에, ‘그렇게 바쁘면 어제 오지 그랬슈?’ 하더래요.” 그날 넓은 대청마루를 한칸 한칸 걸레질하는데 힘이 들다 가도 자꾸 그 유모 속 촌부의 말이 생각나 웃음이 나오더란다. 고마 워유, 아저씨! 참을성 가르쳐주셔서.

(왼쪽) ‘아티스트’ 이상일. 헤어 스타일리스트에서 플로리스트로, 다시 작가로 그 영역을 넘나들며 창작 활동을 펼치고 있다.

3막 1장, 나의 고향 나의 뿌리

충청도 사투리가 입에 척 붙는 그는 충청도 사람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옛사람이 그리워 주말여행 삼아 내려온 충남 아산 외암리(그가 나고 자란 고향 충남 당진이 바로 이웃 동네다). 문득 어린 시절 아버지가 고향 친구 만나는데 따라나선 일이 생각났다. 그 동네가 왠지 여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것도 운명일 터.
마침 반복되는 도시 일상에 염증을 느낀 아내는 한옥 스테이가 있으면 하룻밤 자고 가자 말했고, 이왕이면 솟을대문이 가장 높은 집이 좋지 않겠냐 해서 찾은 곳이 이득선 어르신 댁이다. 68 호의 집 중 하룻밤의 연으로 머문 이득선 어르신 댁의 별채가 바로 84 번지 한옥 아틀리에.

“사랑채에서 자는데, 꿈에서 할아버지를 만났어요. ‘잘 왔다’ 하시는거예요. 무심히 깨서 색연필로 스케치를 하다 동 틀 무렵 문을 열었더니 지금 아틀리에로 쓰고 있는 별채가 보이는데 기분이 묘하더라고요.” 마당 구석의 빗자루를 집어 마당을 쓸고 있으니 언제 일어났는지 안사람이 옆에서 말없이 가랑잎을 주워 삼태기에 주섬주섬 넣고 있더란다. 그리고 새벽에 일어나 동서남북 하늘과 대화하는 어르신의 모습을 보았다. “자손 평화롭게, 동네 평화롭게”라며 이로운 말을 중얼거리는 어르신의 모습을 보니 온몸에 전율 이 일었다. 다음 주, 그다음 주에도 또 내려갔다.

어르신께 좋은 기와집이 있으면 한 채 사고 싶다 말하니 마음에 맞는 떡이 있겠냐는 답이 돌아왔다. 무신경한 인스턴트식의 사고에 ‘아차’ 싶어 근처에 기거할 곳이 있으면 알려달라 한 뒤 서울로 올라 와서 또 한 달. 마음을 비우니 기회가 찾아왔다. “이곳의 모습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생각하면 돼요. 마루도 다 일어나서 일일이 손으로 깎고 다시 들기름을 먹이고, 방바닥에도 콩기름을 발랐어요. 저쪽 연못을 보세요. 물이라는 걸 집 안에 끌어들인다 는 것은 굉장히 조심스러운 일이면서 축복이지요. 땅을 파고 큰 돌을 나르면 아내가 돌을 쌓아 연못을 만들고 그 옆에 텃밭을 일궜지요.” 남의 것을 내 것 이상으로 가꾸어 마음이 풍요로워지는 길을 선택했다는 부부. 집으로 들어서니 ‘역시 이상일’이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자신의 추억을, 살아가는 모습을, 예술적 영감을 한옥이라는 공간에 이렇듯 풍성하게 풀어놓았으니 말이다.


(왼쪽)
복을 전하는 바램을 담은 새해맞이 퍼포먼스.
(오른쪽) 말간 달항아리와 하얀 무명 커튼이 마치 신년 인사를 하듯 단아하게 손님을 맞이한다. 방은 한지로 정성스레 도배하고 두 달간 콩댐을 먹여 정갈하게 꾸몄다.

3막 2장, 생활이 곧 예술
마당으로 들어서니 테이블 위에 하얀 리넨 천이 늘어져 있다. 더울 때 빛을 차단하기 위해 대나무를 세워 설치 했는데, 마치 시골 잔칫집 같아서 종종 활용하는 아이디어다. 대청마루는 앉은뱅이 고재 죽부인으로 만든 조명등, 얼마전 마을 축제 때 구입한 짚 공예품을 고가구에 조르르 올려 장식했다. 창호지를 정갈하게 바른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서니 마치 신년 인사라도 하듯 단아 한 표정으로 손님을 맞이하는 달항아리. 여기에 명주 커튼과 목화 나뭇가지 장식이 빠지면 서운하다.
대청에 앉으니 우물을 화분 삼아 트리처럼 서 있는 나무가 보인다. 자세히 살펴보니 바닥을 장식한 푸른 잎이 모두 배춧잎이다! ‘김장’을 모티프로 한 오브제는 크리스마스트 리이자 신년을 맞이하기 위한 의식이다. 외국에서 생활하다 연말에 한 국을 찾는 아이들을 위한 새해맞이 데커레이션. 다른 평범한 집과 달 리 데커레이션은 항상 아빠인 그의 몫이기에 아이디어는 언제나 무궁 무진하다. 탱자나무에 이 지역에서 나는 채소와 과일을 매달고, 직원 들의 소망을 적은 달걀을 매달아 장식했다. “음식물과 식물을 꽃으로 승화시키니 재밌지요. 꼭 꽃이 만개해야만 아름다운게 아니잖아요. 화기도 필요 없어요. 하다못해 요강도 화기가 될 수 있죠.”


부부의 일상하고는 극과 극을 달리는 한옥을 선택한 이유가 내내 궁금했는데 비로소 의문이 풀린다. 너무 다르기에 또 다른 상상력을 자 극하고, 마음껏 펼치며 본연의 나를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될 터이니! 그뿐만이 아니다.

한옥은 무척 과학적인 주거 공간이다. 별과 달, 해가 모두 처마 위 네모 하늘 안에 서 노닌다. “저 멀리 집에서 어르신이 평소 음성으로 ‘이상일씨’ 하고 부르면 마치 마이크를 대고 말한 것처럼 또렷하게 들리지요. 옛날에는 큰집과 작은집이 나란히 살았겠죠. 낮은 담벼락과 텃밭, 또 중문을 지나야 하니 그 모습은 보이지 않아 서로의 사생활은 지키되, 기척 소리는 들리는 거예요. 그러고 나면 ‘아, 몇 발짝이면 도착하겠다’ 감이 잡히지요. 한옥은 이 모든 것을 염두에 두고 지은 거예요. 큰 소리를 낼 필요도, 인터폰 같은 기계의 힘을 빌릴 필요도 없죠. 옛 선조의 지혜는 물론 생활에 배어 있는 예의와 조심성까지 배우는 거예요.”

한옥의 구조나 환경을 보면 현대건축이 아무리 발달해도 결코 따라 잡을 수 없는 고매한 정신이 담겨 있다. 그것이 바로 엄청난 카리스마 다. 하지만 관에서는 보수를 핑계로 옛것을 새것으로 교체하기 바쁘다. 이 아틀리에는 대들보만큼은 지켰다고 한다. “저 연못을 팔 때 지 방 紙榜이 나오더라고요. 보수팀이 다 떼어서 땅에 묻은 거죠. 붓으로 살살 털어서 그대로 걸어둔 것이 작업실로 쓰는 행랑채에 걸어 장식한 저것이에요.” 새벽에 일어나 커피 한 잔 들고 마당을 서성이면 집의 에너지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여명과 함께 마당을 정리하고, 그러다 상상력이 발동하면 돌을 가르는 갈퀴나 물 호스로 땅에 드로잉을 한다. 종일 사부작사부작 움직이다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미리 주워 둔 나뭇가지를 챙긴다. 처음에는 장작을 사서 쟁여두고 싶었는데 그 것 또한 일종의 전시라는 생각이 들더란다.

(왼쪽) 대나무를 지지대 삼아 리넨 천을 드리우니 리조트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불편하지요. 근데 나뭇 가지 주우면서 풀잎이나 가랑잎 같은 것을 보면서 스케치하거나 꽃꽂이에 활용해요. 그냥 쉬는 게 아니라 재창조의 시간이라고 생각하 면 귀찮지 않죠.” “아궁이 불은 내가 지필게요” 하는 아내. 또 솥에 있는 뜨거운 물을 세숫대야에 채워주는 남편. 두툼한 명주솜 이부자리 깔고 책을 읽다 외국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의 신랑감, 며느릿감 이야기를 잠깐 하다가 문득 “내일 아침에는 김칫국 끓여 먹을까?” 한다. 굳이 이치를 따지거나 싫은 소리를 하지 않아도 되는 소소한 얘깃거리와 자연스러운 침묵이 이어진다. 한옥은 이 모든 것을 몸으로 느끼고, 가슴으로 체험해야 한다. “요즘 도시 사람들이 농촌을 체험하기 위해 많이 내려오지만, 방법이 문제예요. 차가 막히니까 저녁에 도착하면 고기 구워 술 진탕 먹고, 아침에는 차 막힌다고 일찍 나가요. 한옥을 제대로 즐기지 못한다는 거죠.”

이웃사촌이 된 이득선 어르신이 한마디 거든다. “사람은 1백 년을 못 살아요. 오래 살아야 90년 사는 걸 급할 ‘급’ 자를 써가며 모두 바쁘게 움직이죠. 대대손손 먹을 것까지 다 벌어두느라 욕심낼 필요가 없어요. 전기 발전으로 생활이 편리해졌다고는 하지만 해 없이 어떻게 살겠어요? 우리 선조들은 모두가 다 자연의 흐름과 같이 더불어 살았지. 꽃을 두면 벌이 오듯 사람도 마찬가지야. 자연이 하는 대로만, 흉내만 내며 살아도 성공한 인생이지.”


1 고재 나무 장식장에 원단을 커튼처럼 씌운 아이디어. 부부의 깔끔한 성격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2 오후 내내 햇볕에 말린 이불은 정갈하게 개어 정돈한다.



3 초가지붕 사이를 엮는 짚풀 축제가 열려 마음에 드는 바구니와 멍석, 함을 한가득 사왔다. 고재 함 위에 올리니 멋스러운 오브제가 된다.
4 신주를 모시는 곳은 연꽃 스타일링으로 예를 갖췄다.


3막 3장, 라이프 디자이너에서 철학자로
대대로 사대부 집안인 이 참판 댁 종손 이득선 씨는 그에게 영감의 원천이자 선진으로서 묵중한 책임감을 갖게 한 인물이다. 선조에게 물려받은 문전옥답이라 하더라도 개발이 된다고 하면 무조건 팔고 편히 서울 생활을 택할 법도 한데, 오히려 고향으로 낙향한 인물이 바로 그다. 선친께서 돌아가신 뒤 낙향해 묘에서 3년 동안 시묘를 했다니, 그 점만 보더라도 이상일 씨가 남은 인생을 살아가며 배우고 싶은 멘토로 삼은 이유가 충분하다. “외국은 히스토리에 대한 자료가 무궁무진한데, 우리나라는 전통을 망각하는 일이 ‘트렌디’라는 이름으로 잘못 포장되어 있어요. 그래서 나라도 기록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어요. 요즘은 주말마다 어르신을 모시고 인터뷰를 합니다. 된장, 고추장 담그는 것부터 아이들 교육 방법까지 어떤 것을 물어도 현답이 돌아옵니다.”

(왼쪽) 세월의 흔적을 품고 있는 두터운 돌담과 느티 나무. 전통과 현대의 가교 역할을 자처한 그는 매주 주말 이득선 어르신을 인터뷰(?)한다.

기계문명이 발달하고, 디지털 문화가 활성화되었어도 근본은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외암리를 지키고 있는 이득선 씨. 외암리는 한옥 체험 마을로 우리나라 관광객은 물론 외국 학술팀이나 학생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드라마 촬영지처럼 인위적으로 만든 마을이 아니라 실제 사람이 살고 있는 마을이라 더욱 흥미를 갖는다. 외국인은 기와에 대해 묻거나 돌담에 낀 이끼를 바라보며 오감으로 느끼고 감동을 받는다. 하지만 정작 우리는 모두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충분히 느끼질 못한다. 속된 말로 이런 곳에 살면 참 좋겠다라는 말은 하지만, 막상 와서 살아보라고 하면 하루 먹고 떠들다 새벽에 차 막힌다고 올라가는 사람들, 이것이 현실이다.

“후배들을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생각했어요. 갤러리스트, 화가, 투자 전문가 등 각 분야에서 한몫하는 후배 몇 명을 초대 해 2박 3일을 묵었어요. 여느 때처럼 새벽에 일어나서 마당을 쓸기 시작했죠. 한옥은 정리 정돈이 되어 있지 않으면 좋은 기운이 금방 사라 지거든요. 늦잠도 자고 푹 쉴 줄 알았는데 새벽부터 사부작사부작 움직이는 모습을 보더니 다들 놀라더라고요. 젊은 사람들은 배추에 고춧가루만 뿌리면 김치가 되는 줄 알아요. 그 김치가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는지에 관한 교육이 너무 부족하지요.”

고전을 먼저 알아야 현재와 미래를 디자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조상들이 떠나기 전에 누군가 다리 역할을 해야 하지 않을까. 이상일 씨는 감각 있는 자들이 먼저 ‘행함’으로 보여주면 후배들에게 굉장한 자극을 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는 한옥 아틀리에를 젊은 아티스트들이 모여서 활동할 수 있도록 갤러리처럼 만들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김장하다 즉석에서 배춧잎으로 퍼포먼스를 하는가 하면, 아내와 뜨끈한 아랫목에 누워 도란도란 얘기도 하면서 이런 시간도 있구나 행복해하지요. ‘아, 너무 좋다’라 느끼면 그것 이 바로 좋은 임프레션, 에너지가 되는 것이 아닐까요?”


3막 4장, 한옥에서 펼치는 아 티스트의 꿈
“몽당연필부터 새 연 필까지, 키가 다 다르지요? 펜화는 1mm짜리 연필선이 다섯 번씩 지나 가는 세밀화이기 때문에 집중력을 요하지요. 한옥은 공간이, 방이 작 잖아요. 그래서 더 몰입할 수 있어요.” 그는 이곳에서 시를 짓듯 일기를 쓰고, 일기를 쓰듯 그림을 그린다. 한옥은 정적인데 그림 속에 나오는 등장인물은 팔이 길고 마치 공중을 날아다니는 3차원 영상처럼 느껴진다.

“미술학적으로 보면 사람 팔이 비정상적으로 길다 하겠지요. 저는 전공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법도, 소재도 더 자유로와요. 이 그림은 화장실에 갔는데 휴지가 없던 상황을 그린 거예요. 어린 시절의 그림 일기 같은 거죠. 저희 부부가 경험한 것을 마치 제3자의 시선으로 관 망하고 그때 느낀 감정을 강조하는 방식입니다. 이 그림에서는 안사람이 부뚜막에 앉아 불을 지피고 있고, 그 옆에서 제가 걸레질을 하고 있죠. 저녁상을 차리고 또 서로 등도 긁어주고, 한옥에서의 이런 소소하고 바지런한 일상이 모두 소재가 됩니다.”

(왼쪽) 주말이면 한옥 아틀리에를 찾는 부부. 외암리의 일상을 세밀화로 그려낸다.

꼭 준비한 게 있다고 해서 두 번째 찾은 날. 대문을 열고 들어서니 마치 오페라의 무대처럼 거대한 작품이 설치되어 있다. 3배 확대해서 실사 프린팅한 열 폭짜리 작품은 외암마을에 처음 왔을 때의 느낌을 세밀화로 표현한 것. 설화산 줄기와 동네를 감싸고 있는 돌담 그리고 아래쪽에 그린 소나무, 연꽃, 느티나무는 모두 이 지역에 자생하는 식물이고, 여백은 마음으로 보는 것이라 설명한다. 호수가 될 수도, 하늘이 될 수도 있다. 카페 모우에서 설치 작업으로 종종 활용하던 사슴 오브제가 앞마당에 설치되고, 웅덩이처럼 파인 가마솥에 장작불을 피우니 마치 한 편의 오페라 무대를 보듯 웅장한 느낌이 든다.


마을을 감싸고 있는 설화산과 돌담을 그린 작품과 사슴 오브제로 연출한 오페라 무대.


1 마당을 정리하고 갈퀴로 드로잉을 하는 그는 영락없는 아티스트다.
2 아직 ‘성견’이 되지 않아 대청을 뛰어다니며 창호지 문을 구멍 낸다는 강아지 코카.


3 세밀화는 무척 집중을 요하는 작업이다. 한옥에서 그 에너지를 듬뿍 받는다는 이상일 씨.
4 명확히 장르를 구분지을 수 없는 그의 작품은 외암리 일상을 소재로 한다.


인생은 무대다. 3막 4장의 오페라 무대에서 3막을 맞이했다면 무엇을 먼저 해야 할까? 끝까지 자기 역할을 충실히 하고, 역할과 내가 혼연일체가 되어 연기 혼을 불태워야 할 터. “문득 농사꾼의 셋째 아들이 맘 편히 농사일하면서 살 걸 도시엔 왜 왔나 싶을 때도 있습니다. 서울에서 누릴 것 다 누렸으니 나오는 또 다른 건방진 생각인가 하곤 숙연하게 마음을 낮추기도 하고요. 한옥 아틀리에는 단순한 주말 주택이 아니에요. 나를 온전히 내려두고 비우는 절간이자, 무엇이든 채워 넣을 수 있는 원더랜드 같은 공간이죠. 풀 한 포기 보면서 울고, 웃고, 즐기고, 또 색다른 크리에이티브를 펼치는 시간. 외암리 84번지에와서 ‘이상일’이 변했습니다.”


충남 아산 외암리 88번지 이 참판댁은… 이득선 어르신의 조부는 조선 고종 때 판소(지금의 내무부 장관)를 지냈습니다. 당시의 정치 세태를 비관해 임금에게 상안치서를 올렸으나 반영되지 않고 자꾸 되돌아오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습니다. 평생 학문을 연마하다 시골로 내려 오니 먹고살기가 여의치 않았지요. 그 얘기가 임금에게 전해져 세차례 재물을 내려보냈다고 합니다. “임금을 버리고 온 내가 왜 국민의 혈세를 축내느냐”라며 매번 돌려보내자 이번 에는 집을 하사합니다. “선비 가정으로 조촐하게, 그 사람 성품에 맞게 지어줘라”라고 하명해 지은 사랑채는 서울 낙선 재에서 딱 두 칸 떼어낸 형태입니다. 88번지 안채에는 종손인 이득선 어르신 내외가 살고, 84번지 별채는 이상일 씨가 아틀리에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솟을대문과 고종이 하사한 사랑채는 현재 보수 중입니다. ‘예와 법도’를 갖춘 관광객이 라면 누구나 환영한다는 이득선 어르신. 그곳에 가면 이득선 어르신이 직접 담근 전통술 연엽주도 맛볼 수 있습니다.

이 참판 댁 종손 이득선 씨가 말하는 이상일 씨 “만화쟁이인줄 알았더니 재주가 참 많아”
처음에는 행색이 요란하고 말수는 적고, 또 연필로 끼적끼적하기에 그림을 그리는 사람인가 보다 생각했지요. 그림을 그리다 꽃을 꽂고, 심지어 측간에도 꽃을 두는 것을 보니 보통 사람은 아니다 싶다가도 사부작사부작 말없이 마당을 쓰는 걸 보면 요즘 사람치고는 진중하다는 생각이 들었지. 듬직하고 아는 것도 많고, 여러 가지로 평가하면 85점은 되겠더라고. 이곳에 있으면서 여간해서는 바깥출입을 안했는데 요즘에는 별채 마실 다니는 재미가 생겼어요. 유명한 사람 중에는 100% 진짜인 사람은 없다 생각했는데, 이상일 씨는 시간이 지날수록 믿음직해. 나한테 배울게 많다지 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젊은 사람에게 내가 배울 게 더 많아. 이렇게 감각 있는 사람이 시골에 많이 내려와야 우리 전통을, 뿌리를, 문화를 세계에 알릴 수 있지 않겠어요?
글 이지현 기자 사진 박찬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1년 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