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하늘에 청청하게 나부끼는 깃발 해 질 녘 산등성이를 따라 낮게 나는 흰 새. 종교에 몸을 기대본 적 없는, 여기저기 흙 묻은 채 오물처럼 살아가는 인간에게 신부님의 이름은 희고 거룩하다. 신의 대역으로 검은 장막 너머에서 인간의 죄를 사해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저 너머의 세계까지 감싸안는 초월자. 그 앞에 서기 위해 난해하고 숭고한 언어로 쓴 그의 역사를 읽고, 죽음이나 종교, 예술이나 진리 같은 추상 언어를 품어보지만 모든 것이 무의미했다. 헤이리 ‘논밭 학교’가 문을 열던 날, 우리는 한길사 북하우스 1층 커피숍에서 처음 만났다. 한길사 김언호 대표의 주선이었다. 희끗희끗한 머리칼을 좌에서 우로 가지런히 빗어 넘기고 화이트 칼라가 송곳니처럼 뾰족한 회색 양복을 입은 신부님이 달처럼 환한 미소로 내 앞에 다가와 인사를 건넨다. 장맛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여름의 정점에서 따뜻한 커피 한잔을 사이에 두고 어리석은 나는 ‘왜 당신에 대해 쓰고 싶은지’ 중언부언했다. 내 말을 조용히 듣고 난 신부님은 사려 깊은 표정으로 당신의 일상을 보여주겠노라 약속했다. 세 개의 꼭짓점으로 이어진 조형적인 구도의 다락방은 한 줄기 빛과 함께 고요를 빚어내고 있었다. 사람 키보다 큰 식물을 들여놓은 ‘생태적 거실’을 지나 침실 천장에서 내려온 사다리를 타고 오르자 마치 요새처럼 ‘비밀의 다락방’이 숨어 있다. 매일 아침 그곳에서 1시간가량 신문을 읽고 명상을 하는 것으로 그의 청빈한 하루는 시작된다.
인천가톨릭대학교 조형예술대학 설립 멤버이자 현재 학장을 맡고 있는 조광호 신부. 사제이면서 화가이고, 행정가이자 생태주의자인 그는 달처럼 환한 얼굴에 미소가 부드러운 시인이자 수필가이기도 하다. 1947년 강원도 삼척에서 태어난 그는 가톨릭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하고, 1979년 성 베네딕트 수도회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 후 독일에서 유학하며 판화와 동양화를 연구하고 셀 수 없이 많은 작품을 남겼다. 세간의 주목을 끈 작품으로는 부산 남천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성화와 서울 지하철 2호선 당산역과 합정역 사이를 잇는 당산철교 벽화를 꼽을 수 있다. 1998년에는 문화 영성지 <들숨날숨>을 창간해 천주교 문화 운동에 앞장섰고, 숨 가쁜 이력 사이사이에 짬짬이 쓴 에세이를 모아 단상집 <그대 문의 안과 밖에서>, 그림 에세이 <꽃과 별과 바람과 시>를 쓰고 그렸다. 신부이자 화가로 살아온 40년 흔적을 담은 평론집 <코리아 판타지 Korea Fantasy>, 시인 정호승과 소설가 공지영 등 친분이 두터운 문인의 작품집에 그려넣은 일러스트까지 치면 작가로서의 포트폴리오도 탄탄하게 다진 셈이다. 어느 학자가 만들어낸 개념을 빌리자면 그는 사회, 문화, 종교, 예술, 행정, 건축, 환경 분야를 모두 아우르는 ‘제너럴리스트 generalist’, 즉 ‘전인 全人’에 가깝다.
뜻 모를 그리움 ‘블루 로고스’ 맨해튼의 스카이라인을 닮은 송도 앞바다의 이국적 풍경을 배경으로 우리는 자그마한 통통배에 몸을 실었다. 동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삼척에서 나고 자란 조광호 신부를 위한 배려였다. 아무 조건 없이 그를 안아줄 유일한 품. 그는 바다를 기억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메마른 사막을 가로지르는 길고 긴 강에서, 태곳적 하늘을 품은 북극 호수에서, 그리고 세상과 작별하며 마지막 고백성사를 하던 사랑하는 친구의 눈빛에서 보던 푸른 바닷빛. “세상의 엄청난 부조리 앞에 절망할 때마다 바다는 강렬한 생명력과 아름다움으로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넘어 빛났습니다. 인간의 언어가 끝나는 지점에서도 벙어리 냉가슴에 꽂힌 큐피드의 화살처럼…. 그 빛은 눈에 보이는 것 너머에 대한 그리움이고, 목마름이었지요. 시공에 갇혀서도 초월을 꿈꾸고, 끝없는 추락에도 비상을 시도하는 인간에게 그 빛은 이 세상에서는 결코 풀리지 않을 암호와도 같은 ‘하느님의 눈빛’이었어요. 뜻 모를 그리움의 언어 ‘블루 로고스’. 나는 멀고 먼 길을 돌아 이 자리에 섰습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의 뜻이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시곗바늘처럼 언제나 제자리로 돌아와지는 지루하고 답답한 운명. 길거리에 나뒹구는 검은 비닐봉지처럼 목적도 없이, 방향도 없이 부유한 시간들. 그 무수한 방황의 끝에 마주한 자아는 맑고 고요했다. 신의 축복을 받은 자의 명징한 깨달음. 그 ‘믿음의 눈’ 덕에 세상이 환해졌다.
우주의 신비를 벗겨내는 인간의 위대함을 얘기하지만 지금까지 그 누구도 스스로 자기 육안으로 직접 자기 얼굴을 본 사람은 없다. 사람은 누구나 다 거울과 같은 반사 매체를 통해서 자기 얼굴을 본다. 인간의 외적 조건이 이러하다면 하물며 인간의 내면세계는 말할 것도 없이, 사람은 누구나 ‘만남’을 통해서만 자기 자신의 모습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사람은 한 눈으로 거리를 측정할 수 없듯이 우리 내면세계의 눈도 ‘마음의 눈’과 또 다른 ‘믿음의 눈’을 지닐 때만이 자기 실존의 위치를 알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대 문의 안과 밖에서> 중에서
이미지의 충돌, 그 거대한 ‘문화 레이어’ 작업 “독일의 현대 사상가 아도르노는 ‘예술이란 행복에 대한 지켜지지 않는 약속’이라고 했어요. 그의 말대로 지켜지지 않는 약속이기에 더 간절했던 지난 40여 년 동안의 작업은 참으로 고단한 여행이었어요. 어쩌면 그 여행은 경험하지 못한 미지의 세계, 열리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는 심연의 문밖에서 서성이는 바람처럼 예측할 수 없고, 가늠할 수 없는 모험과 도전이었을 거예요. 내가 수십 년 동안 주제로 삼고 작업한 ‘로고스의 암호’는 감히, 이러한 바람의 흔적을 기록한 것이라 말할 수 있어요. 그림을 통해, 이미지와 상징을 통해 가시적 세계 저 너머의 세계, 인간 내면과 초월자를 향해 닫힌 미지의 문을 열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희망은 때때로 회의와 의문으로 내 삶을 흔들어놓았습니다. 예술가의 삶은 화려한 장식이 아니라 하느님과 사람에 대한 헌신과 봉사를 서원한 사제의 삶에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물음표가 되기도 했습니다. 부족하기 짝이 없는 나의 지혜와 안목으로는 천재적 감수성으로 심연과 초월의 세계를 열어주던 천재 예술가들을 좇을 수 없었죠. 나는 그들과 달리 오로지 쉼 없이 손수 밭을 가는 가난한 농부처럼 작업에만 열중했어요. 그 방법 가운데 하나가 뚜렷한 주제를 가지고 몇 년 동안 연구하면서 작업하는 것이었지요. 죽음, 시간, 희생, 순교, 얼굴, 천사 등으로 이어진 주제는 수십 년 동안 내 작업을 지탱해준 화두였어요.”
“라디오에서 ‘강추’한다는 말이 들리기에 무슨 뜻인가 곰곰이 생각했어요. ‘강력히 추천한다’는 뜻이라면서요? 허무해서 한참을 웃었어요.”
신윤복의 ‘미인도’에서 튀어나온 미인들이 최신형 노트북을 들고 마주 앉아 있다. 신윤복의 그림은 담채에 가깝지만 조광호의 유화는 오방색으로 화려하다. 그가 지난 5년간 몰두한 ‘코리아 판타지 Korea Fantasy’ 작업은 화가로서, 그리고 한국인으로서 살아온안지난 40년에 대한 반추이다. 지난해, 혜원 蕙園 신윤복 申潤福의 탄생 100주기를 기념해 그린 ‘Korea Fantasy-happy birthday to you’는 과거와 현재의 이미지를 중첩한 ‘문화 레이어’ 작업의 대표작이다. ‘문화 레이어 culture layer’란 말 그대로 특정 문화 현상을 화폭 위에 중첩시켜 그 이미지의 충돌이 빚어내는 제3의 이미지를 탄생시키는 것이다. 신윤복은 죽었지만 그의 그림 속에 살아 숨 쉬던 미인들이 타임머신을 타고 현재에 출몰한다. 과거의 여인들이 최신형 노트북에 그의 탄생 100주기를 기념하는 축하 메시지를 띄워 보여주는 장면은 현재와 과거의 공존을 극명하게 대비시킨다. 한 시대의 문화는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것, 그 이미지의 충돌은 새로운 방식으로 또 다른 메시지를 탄생시킨다는 것. 그가 이 작업을 통해 궁극적으로 닿고자 하는 이상향이다.
전통적 의미의 회화가 종식되는 지점에 서서, 나는 선이 태동되고 그 선이 동작을 형성하는 과정을 기록하고자 한다. 방향과 속도, 힘과 리듬, 무게와 부피 등의 무한한 정신적 표출이 가능한 선을 통하여 살아 숨 쉬는 내 육필의 가장 뜨거운 숨결을 붙잡아두고자 한다. 빛과 색채가 사라진 자리에서 내 육필로 긋는 선이야말로 가상과 실재의 마지막 경계로 남아 있을 가장 견고한 언어이기 때문이다. -<코리아 판타지 Korea Fantasy> 본문 중에서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을 때 옷깃 단단히 여미고 나그네처럼 떠날 수도 있겠지요.” 그의 고백에 마음이 찡하다.
자웅동체의 운명을 거부할 수 없는 종교와 예술 조광호 신부는 문화 레이어 작업이 이미지를 넘어 텍스트로도 이어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문화 전반을 전문적 수준까지 섭렵하고 그것을 통합해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듯 독창적인 시각과 사고를 끌어내는 것. 디지털 시대에 차별화된 경쟁력을 갖추는 방법은 누구도 생각해내지 못한 창조적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다. 그렇게 완성한 ‘코리아 판타지’는 글로벌 시대에 대처하는 비밀 병기가 될 것이다. 이 과정에는 창조와 모험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생각만 하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결코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아낼 수 없다. 그가 ‘생태적 거실’을 꾸민 것도 일종의 문화 레이어 실천이라고 볼 수 있다. 조광호 신부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식물과 곤충은 대부분 그가 집 안에서 키우는 것들이다. 자연을 실내로 끌어들이는 작업에 몰두하게 된 건 ‘코리아 판타지’ 작업을 시작하던 즈음이었다. 코리아 판타지 작업 중 ‘Korea Fantasy-Apoc’은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곤충과 식물이 방사능에 의해 지구에서 영원히 사라지는 생태계 파괴를 그리고 있다. 일상에 떠오른 화두와 세기의 현상이 중첩되는 장면. 그의 작품에는 마치 운명처럼 두 가지 시선이 공존한다. 사제의 가슴으로 품어야 하는 세상, 그리고 예술가의 눈으로 그리는 세상. 이 거대하고 상이한 두 갈래 운명을 두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충돌한다기보다는 긴장이 살아 있죠. 종교라는 것과 예술이라는 것이 크게 보면 상당히 닮아 있을 뿐만 아니라 구조는 굉장히 비슷해요. 종교도 그렇지만 특히 미술도 눈에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니까요. 인간은 진리 앞에서 감동하죠. 그런 면에서 종교와 예술은 가장 친화적 요소를 가진 셈이에요. 유일하게 다른 점이 있다면, 종교적 진리는 목적의식이 분명하지만 예술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죠.”
- [귀 기울여 들어보니]인천가톨릭대학교 조형예술대학 학장 조광호 신부 신부와 화가, 두 갈래 운명과 세상이라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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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는 어느 화가의 집에 세 들어 산다. 그들은 태초부터 자웅동체였으나 신의 권력을 위협할 만큼 강한 힘을 가진 죄로 둘로 나뉘었다. 떨어져 나간 반쪽을 열렬히 갈망하던 자웅동체는 신부와 화가의 이름으로 다시 태어나 우연히 한집에 머물게 되었다. 영혼의 파이프라인으로 이어진 두 갈래 운명, 그 앞에 던져진 세상이라는 질문.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0년 9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