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근, 여행-여름, 캔버스에 유채, 72.7x91cm, 2010.
1989년에 내국인의 해외여행 규제가 풀린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래서 1990년대 초반에 대학을 다닌 제 또래가 해외여행 1세대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어려웠던 집안 형편을 돕기 위해 방학 때면 과외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던 제게 해외여행은 그림의 떡이었습니다.
그러다가 1995년, 드디어 생애 첫 해외여행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호주에 사는 펜팔 친구가 방학 동안 자기 집에서 지내도 좋다며 저를 초청한 것이지요. 학기 내내 온갖 아르바이트를 하며 비행기 값과 여행 경비를 모았습니다. 숙박비를 아끼게 된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위안이 되던지요. 설레는 마음으로 출국 몇 달 전부터 여행 가이드북을 사서 밤마다 외다시피 읽었습니다. 마침내 2학기 기말고사가 끝나자마자 호주 동부 퀸즐랜드 주의 브리즈번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몸만이 아니고 큰 짐 두 보따리도 함께. 두 달 가까이 머물 예정이었기 때문에 옷가지에 읽을 책이며 비상식량 등, 사전 준비를 철저히 했지요. 공항에 내리자 적도 넘어 남반구의 정반대 계절이 생경하게 다가왔습니다. 한국은 곧 크리스마스인데 그곳은 피부가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여름의 정점을 향하고 있었거든요. 친구 케빈이 마중 나와 있었습니다. 악수를 청하는데 양손에 짐 보따리를 가득 쥐고 있느라 엉거주춤 폼이 나오질 않았습니다. 한국에서 입고 온 겨울 점퍼 덕에 땀은 비 오듯 흐르는데 악명 높은 호주의 햇빛이 유독 피난민 행색을 한 저만 비추는 것 같았습니다.
케빈이 소개해준 집에서 한 달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큰돈 쓰지 않고 오히려 약간의 목돈을 더 모을 수 있었습니다. 그 돈으로 퀸즐랜드 주 종단 계획을 세웠습니다. 케빈이 캠핑카를 빌려오는 동안 저는 2주간 이어질 여행을 위해 짐을 쌌습니다. 이불, 베개, 헤어드라이어, 미니 선풍기, 다음 학기 예습할 책까지는 괜찮았을지도 모르는데 문 앞에 내놓은 전기밥솥을 보고는 케빈이 “Oh my God!”을 외치더군요. 케빈의 짐을 보니 달랑 어깨에 멘 작은 배낭 하나가 전부였습니다. 타협 끝에 결국 전기밥솥과 몇몇 덩치 큰 가재도구는 가져가지 못했습니다. 브리즈번을 출발해 동부 해안을 타고 호주 대륙의 북쪽 끝 케언스를 향해 달렸습니다. 캠핑카에 작은 침대와 싱크대, 식탁이 구비돼 있어 교대로 운전하고 중간 중간 거치는 야영지에서 자면서 가이드북에 나오는 곳을 샅샅이 훑었습니다. 케빈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이런 기회를 다시 갖기 어려울지도 모를 저를 위해 인내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누사, 선샤인 코스트를 거쳐 허비 베이에 머물다가 브리즈번과 케언스의 딱 중간 지점에 해당하는 번더버그 해안가에 도착했습니다. 그곳 몬 레포스 해변은 바다거북이 여름 내내 밤마다 떼로 몰려와 알을 낳고 가는 산란지로 유명하지요.
밤 12시쯤 거북이 구경을 하러 가기로 하고 저녁을 해먹는데 기어이 일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그새 한국 김치에 맛을 들인 케빈이 제가 준비해온 김치를 잘게 찢어 먹지 않고 한입에 배춧잎 한 장씩 먹고 있지 뭡니까! 여행이 끝나려면 아직 열흘이나 남았는데! 한인 가게에서 얼마나 비싸게 주고 산 김치인데! 한국 김치는 한꺼번에 많이 먹으면 해롭다고 협박까지 했는데도, 괜찮다며…. 결국엔 제가 심술을 부리고야 말았습니다. 짜증 한번 낸 적 없는 케빈도 “Hey, Relax”라는 한마디만 남기고 식사도 끝내지 않은 채 나가버렸습니다. 이따가 바다거북 보러 가야 하는데, 어떻게 가는 건지 난 잘 모르는데…. 그렇게 케빈을 기다리다 까무룩 잠이 들어버렸습니다. 눈을 떠보니 이미 새벽 4시, 어느 틈에 왔는지 케빈은 저쪽에서 자고 있습니다. 거북이들은 이미 알 낳고 돌아갔을 시간. 속상한 마음 반, 괜한 심술을 부려 케빈에게 미안한 마음 반. 혼자서 일어나 바닷가로 나갔습니다. 바닷가 새벽바람과 찰싹거리는 소리는 해운대 백사장만큼 실망스러웠습니다. 거북은 고사하고 지나는 사람도 없고…. 에잇, 거북 알 하나 보이지 않네. 그러다 갑자기 저쪽 어스름 속에서 시커먼 뭔가가 철퍼덕거리는 게 보였습니다. 쭈뼛거리며 다가가 보니 큰 솥단지만 한 거북이 뒷다리에 그물같은 것에 걸려 바다로 되돌아가지 못하고 바둥거리고 있었습니다. 거북이 물거나 뒷다리로 찰까 봐 무서워 혼자서는 어쩌지 못하고 캠핑카로 돌아가 케빈을 깨워 함께 칼과 가위로 그물을 끊어주었습니다. 때마침 수평선에서 서서히 떠오르는 태양. 그것을 향해 느릿느릿 발자국 남기며 되돌아가는 검은 거북의 뒷모습이 영화의 엔딩 크레딧처럼 제 기억 속에 선명하게 찍혔습니다.
삶은 치열해야 한다고, 치밀하게 준비해야 빨리 성공할 수 있다고 그 엄숙한 교의 敎義에 순종을 서약하고 두 눈 질끈 감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진정한 감동은 늘 준비되지 않은 순간에 마주하게 된다는 걸, 거북이 보답으로 제 마음속에 심어주었습니다. 올여름, 잠시 치열함을 내려놓고 아무 계획 없이 빈손으로 떠나보는 건 어떨까요? 해야 할 것, 봐야 할 것, 사야 할 것이 적을수록 비용과 시간도 남고, 무엇보다 새로운 인연과 내밀한 감동을 담아올 수 있는 여유가 넉넉해지죠. 아, 그래도 작은 디지털카메라 하나는 꼭 챙겨가야 합니다. 그 거북이 사진 못 찍어온 게 지금도 너무 아쉽거든요.
글을 쓴 김정우 씨는 서울대와 경희대에서 각각 의학과 한의학을 전공했다. 북촌 계동의 소담한 한옥 수락재에 ‘한국해피에이징연구소’를 열고 행복하고 아름답게 나이 드는 법을 연구하며 강연과 기고 활동을 한다. 동시에 청담동 라티아 안티에이징 클리닉 (clinic.ratia.co.kr)과 대한동서노화방지의학회를 이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