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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행복> 나눔 캠페인 인도 둥게스와리 마을 아동 돕기<행복>나눔 바자회, 그후
지난 6월 5일 <행복>이 개최한 인도 둥게스와리 마을 아동 돕기 바자회를 통해 6천3만8천5백 원의 수익금이 모였다. 기대 이상의 큰 성과를 거두면서 우리는 ‘나눔의 힘’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둥게스와리 마을 ‘수자타 아카데미’의 전 교장 선생님이자 더 큰 나눔을 실천하고자 동국대학교에서 불교학을 공부하고 있는 프리앙카를 통해 불가촉천민의 삶을 돌아봤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그들을 도와야 할 이유가 더욱 분명해졌다.


한국에서 보내온 오렌지 하나에 둥게스와리 아이들의 얼굴이 환해집니다. 부족한 비타민 C를 보충해주고 갈증까지 해소해주는 다디단 선물입니다.

한국에 온 지 얼마나 되었으며, 어디에서 생활하고 있나요? 2006년에 왔으니까 벌써 5년이 다 되어가네요. 현재 한국 조인투게더 소사이어티(JTS) 기숙사에 머물면서 동국대학교에 다니고 있어요. 불교학을 공부하고 있죠.
왜 한국에 오게 됐고, 불교학을 배우게 됐나요? 둥게스와리 마을에 처음 갔을 때 법륜 스님이 세운 수자타 아카데미를 보고 감동을 받았어요. 당시 저는 인도 사회의 계급 문제 때문에 가족과 불화도 심하고 마음이 많이 괴로웠거든요. 그때마다 법륜 스님이 따듯한 조언을 해주셨죠. 전 스님의 말에 힘입어 나눔을 실천할 수 있었고, 여기까지 오게 된 것 같아요.
얼마 전에 방영된 당신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봤어요. 인도의 최상위 계급인 데도 둥게스와리 마을에 들어가서 천민들과 함께 생활했더군요. 우리 가족은 ‘브라만’이에요. 인도의 카스트 제도 중 최상위 계급에 속하죠. 브라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모든 것을 보장받죠. 저희 집엔 제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는 하인이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집 안 곳곳에서 일해요. 제가 샤워를 하면 그들 중 누군가가 달려와 대야에 물을 받아주고, 볼일을 보고 나면 화장실에 들어와 청소를 해요. 어느 순간부터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똑같은 사람으로 태어나 누구는 최소한의 인권도 보장받지 못한 채 살아가고, 누구는 그들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처럼 길들여지고.
몸은 편하겠지만 마음은 송구스러울 것 같아요. 맞아요. 늘 한쪽만 도움을 받죠. 그런데도 양민(사성 제도에 속하는 계급)은 절대 그들을 인정하지 않아요. 하인은 ‘불가촉천민’이니까요. 불가촉천민이란 ‘절대 닿아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카스트 제도에 속하지 않는 최하층 계급이에요. 그들은 농사짓기, 가축 도살, 청소, 설거지 같은 허드렛일을 하며 살아요.
불가촉천민의 비극적인 삶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줄 수 있나요? 그들은 구걸하는 삶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태어날 때부터 그랬으니까요. 아버지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아버지 때부터 그런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요. 다른 삶은 상상할 수 없죠. 양민처럼 되고 싶어하지도 않아요. 그건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글을 읽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문화생활도 누리지 못하죠. 멀건 죽 한 그릇도 먹기 힘들어 결핵에 걸리고, 결핵에 걸려도 약을 제때 먹지 못해 죽는 경우가 많아요. 비타민이 부족해 괴혈병을 앓고, 대부분의 산모가 저체중아를 낳아요. 모든 환경이 비위생적이라 신생아가 늘 위험과 질병에 노출돼 있지만 아무도 그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아요. 병원이 딱 한 곳 있지만 그곳까지 가려면 걸어서 몇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아픔을 참죠. 제가 처음 둥게스와리 마을을 찾아갔을 때만 해도 그런 모습이었어요.
어떻게 둥게스와리 마을을 찾아가게 됐죠? 인도에선 천민이 길어다 주는 물로 목욕은 하지만 그 물을 마실 순 없어요. 더럽다는 이유 때문에요. 어느 날, 저는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하인이 길어다 준 물로 목욕을 한 후 그 물을 마셨어요. 어머니께서 저를 야단치셨지만 전 반박했어요. 천민이 물을 주고 기른 농작물을 먹고 사는데, 그들이 떠다 주는 물을 마시지 말라는 건 모순이라고요. 그들의 배고픔을 외면하는 건 인간 도리가 아니라고요. 저의 기나긴 투쟁은 그렇게 시작됐죠.
둥게스와리 마을에서의 생활은 어땠나요? 처음 그곳을 방문했을 때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어요. 한국 사람들이 불가촉천민 아이들을 위해 ‘수자타 아카데미 Sujata Academy’라는 학교를 짓고 글을 가르치고 있었죠.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눈물이 났어요. 인도 사람조차 무시하고 외면하는 천민들을 다른 나라 사람들이 돌보고 있었으니까요. 전 그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기로 마음먹었어요. 일주일에 두세 번씩, 집에서 1시간을 걸어 수자타 아카데미에 나갔죠. 가족에게 이 사실을 알렸는데 모두가 저를 말렸어요. 하물며 이웃들까지 제 부모님을 욕했어요. 왜 브라만 계급의 딸이 불가촉천민 마을에 가서 글을 가르치느냐고요. 그보다 서러웠던 건 둥게스와리 마을 사람조차 저를 적대시한 거예요. 한번은 학교 아이들과 소풍을 갔는데, 둥게스와리 마을 어른이 저희 집에 찾아가 “프리앙카가 아이들을 팔아먹으려고 어디론가 데려갔다”며 소동을 피웠어요. 웃지 못할 일이죠.

(오른쪽) 인도의 최상위 계급인 브라만인데도 불가촉천민을 돕고 있는 프리앙카. 현재 동국대학교에서 불교학을 공부하고 있다.

학교에 나가는 것에 대해 가족의 반대는 없었나요? 어느 날 오빠가 학교에 찾아와서 저를 끌어냈어요. 제가 강하게 저항하자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저를 마구 때렸죠. “도대체 네가 왜 이 더러운 소굴에서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다”라며 소리를 질렀어요. 그날 무척 슬펐어요. 오빠가 왜 그렇게까지 했는지 이해가 안 되더라고요. 그때 법륜 스님(정토회 의장으로 수자타 아카데미를 설립)께서 그러셨어요. “오빠가 너를 왜 때렸는지 아느냐?” 저는 모른다고 대답했죠. “너를 너무 사랑해서 그런 거다”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저는 그제야 오빠의 깊은 사랑을 이해하고 마음을 풀었어요. 그 사건 이후부터 가족도 서서히 저를 인정하기 시작했어요.
아이들이 학교에 잘 나오나요? 처음 수자타 아카데미에 나갔을 때만 해도 학교에 나오는 아이들이 드물었어요. 부모가 아이들이 학교에 나가는 걸 싫어했거든요. 당장 먹을 게 없어 배가 고픈데 글은 배워서 뭐 하느냐고, 양민이 모여 있는 곳에 가면 괜히 문제만 생긴다고 질색을 했어요. 그들을 설득할 방법이 필요했죠. 아카데미 선생님들과 저는 마을을 돌아다니며 부모와 아이들을 만났어요. 학교에 나오면 공짜로 밥도 주고, 글도 가르쳐준다고요. 밥을 준다는 말에 배고픈 아이들이 하나둘 학교에 나왔고, 글을 배우고 싶어 찾아오는 아이들도 생겼어요. 그렇게 서서히 아이들이 늘어났고, 지금은 둥게스와리 마을 아이들의 100%가 최소한의 교육을 받고 있죠.
당신의 노력이 둥게스와리 마을을 변화시켰군요.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나요? 먹을 음식도 부족한 형편이지만 전 아이들에게 교복을 만들어 입혔어요. 교복을 입고 학교에 나와 글을 배우고 사고를 넓히는 것이 살아가는 기쁨이라는 걸 알려주고 싶었어요. 이건 아이에게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에요. 어른의 의식 전환도 절실히 필요한 부분이에요. 사실 둥게스와리 마을 사람들은 외국에서 물자를 지원해줘도 고마움을 느끼지 않아요. 도움받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니까요. 하지만 언제까지 남의 도움만 받으며 살 순 없잖아요. 어른의 의식이 변해야 마을에도 진정한 발전이 있을 거예요. 수자타 아카데미가 마을 사람이 한데 모여서 공부도 하고, 취미 생활도 할 수 있는 대안학교로 거듭나면 좋을 것 같아요. 20대 청년부터 40대 가장, 70대 어른이 같이 모여 마을에 대해 연구하고 기술을 배워 생산성도 높이고. 둥게스와리 마을 사람들이 가난에서 벗어나 경제 활동을 하면서 당당하게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날이 빨리 오길 바라요.
당신이라면 그 꿈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아요. 학업을 마치면 다시 인도로 돌아갈 건가요? 글쎄요, 아직까진 잘 모르겠어요. 고향으로 돌아갈지, 이곳에 남아 다른 일을 할지. 배움이 커지면 답이 보이겠죠. 법륜 스님은 저보고 한국에 남아 있으라고 하시더군요(웃음).

둥게스와리 마을의 현실은…
아이들은 글을 읽지 못했습니다 둥게스와리 마을에 생긴 최초의 교육 기관인 수자타 아카데미는 1994년 정토회 의장인 법륜 스님이 설립했다. 전정각산으로 성지 순례를 떠난 법륜 스님은 이 마을에서 수백 명의 아이가 학교도 다니지 않고 구걸만 하는 모습을 보고, 6개월간 그곳에 머물며 자원봉사자과 함께 수자타 아카데미를 지었다. 처음 이 학교를 지을 당시만 해도 마을 사람들의 반발이 만만찮았다. 먹고살 길이 막막한 마을 사람들에게 학교는 불필요한 공간이었다. 하지만 자원봉사자의 끊임없는 노력과 설득 끝에 지금은 마을의 모든 아이가 수자타 아카데미에 다닌다. 이처럼 놀라운 결과를 이끌어낸 데는 수자타 아카데미 상급생의 부단한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상급생은 17개 마을을 돌아다니며 5~7세 아이의 명단을 조사했다. 유치원에 다녀야 할 아이가 제대로 출석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만약 장기간 유치원에 나오지 않는 아이가 있으면 상급생들이 그 집을 방문해 아이가 유치원에 나오지 못하는 이유를 조사했다. 이유를 파악한 상급생이 그들의 부모를 찾아가 배움의 필요성을 열심히 설명한 덕분에 현재 둥게스와리 17개 마을의 입학 대상자 100%가 유치원에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수자타 아카데미 자원봉사자와 상급생의 노력 덕에 둥게스와리 지역 아이들은 현재 100% 교육을 받고 있다.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은 2006년에 비해 2010년 중학생 입학률이 낮다는 것이다. 둥게스와리 마을이 발전하려면 중학생의 비율도 점차 높아져야 한다.


유치원 교육을 받은 아이들은 초등학교 교육도 받고 싶어한다. 집안일을 돌봐야 하는 여학생에 비해 남학생의 출석률이 좀 더 높은 편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중학교 학생수는 턱없이 부족하다. 12~15세가 되면 아이들이 경제 활동을 시작하기 때문에 학교에 다닐 시간이 없다.


한 가지 다행스럽고 긍정적인 변화는 지난 5년간 수자타 아카데미의 여학생 비율이 조금씩 늘고 있다는 것이다. 매년 1%씩 여학생 비율이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은 어려운 가정 형편에도 배움에 대한 필요성과 욕구가 커지고 있다는 반증이다.


불가촉천민들은 ‘검은 물’을 마십니다
인도 북부에 위치한 둥게스와리 마을은 석가모니가 6년 동안 고행한 전정각산을 중심으로 17개 마을이 형성돼 있고, 1만 2천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땅이 척박하기로 유명한 이 지역은 1년 중 3개월의 우기를 제외하곤 연일 40℃가 넘는 폭염과 건조한 기후가 계속되기 때문에 물 부족이 심각하다. 마을 조사 통계에 따르면 주민 1백 명당 한 개의 공용 수원을 사용하는데, 건기가 되면 물이 말라 이용자 수가 1백50명으로 증가한다. 더 큰 문제는 우물마저 바닥을 드러내거나 오염된 경우, 무리한 사용 때문에 핸드 펌프가 고장 날 때다. 실제로 4백여 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안투비가 마을은 현재 단 한 개의 핸드 펌프만이 가동 중이다. 그마저도 석탄 성분이 섞인 검은 물이 나오는 실정. 둥게스와리 마을은 전체적으로 산자락에 위치해 있는데 땅속이 석탄 암반층으로 구성돼 있어 우물에서 석탄 물이 솟는 경우가 잦다. 이 물을 뜨면 좁쌀 같은 석탄 알갱이가 눈에 보이는데도, 목마른 아이들은 그 알갱이까지 함께 마시며 갈증을 해소한다. 안투비가뿐만 아니라 가왈비가, 스리람푸르, 아마르푸르, 아자드비가도 마찬가지 상황이다. 사람들은 목마름을 참지 못해 이웃 마을로 물 동냥을 가고, 부족한 물 때문에 주민들 간에 다툼이 생기기도 한다.

인도 둥게스와리 마을 지도 17개의 불가촉천민 마을이 모여 있는 둥게스와리 지역. 마을 한가운데 정토회 법륜 스님이 세운 최초의 교육 기관 ‘수자타 아카데미’가 있다. 한국 사람의 도움으로 수자타 아카데미와 반대편 마을을 잇는 다리가 생겼고, 길이 험해 학교 다니기가 불편했던 아이들은 이제 마음 놓고 학교에 다닐 수 있다.


1 둥게스와리 아이들의 14%가 저체중아로 태어났습니다.
2 아이들에게 한 달에 두번씩 영양식을 주었습니다.
3 그 결과, 이제 굶어 죽는 아이는 거의 없습니다.



1 마을 병원에 앰뷸런스 지원했습니다 .
2 사람들이 병원을 찾아가기 쉬워졌습니다.
3 보건 교육도 받고 스스로의 건강도 챙깁니다.


둥게스와리 마을이 이렇게 변했습니다
한국 조인투게더 소사이어티(JTS)가 인도 둥게스와리 마을에 뿌리를 내린 지 올해로 16년이 되었다. 그동안 이 마을을 거쳐간 자원봉사자만 해도 수백 명에 달하고, 마을 곳곳에서 크고 작은 변화가 생겨났다. 최초의 교육 기관인 수자타 아카데미가 들어서면서 아이들은 글을 깨우치게 되었다. 열악한 환경이지만 지바카 병원이 생기면서 어른은 위생 교육을 받게 되었다. 해외 기업의 후원금으로 한 대에 1백만 원이나 하는 핸드 펌프가 마을 곳곳에 설치되었다. 척박한 토양 때문에 우물이 자주 마르고 물에서 석탄 알갱이가 섞여 나오지만 그래도 전보다는 식수 공급 형편이 나아졌다. 이 모든 변화는 나눔을 실천하는 따뜻한 사람들 덕분에 이뤄진 것이다. 이제 둥게스와리 사람도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됐다. 따뜻한 마음이 나눔의 순환 고리를 만들어낸 것이다.


1 구걸이 삶의 전부인 줄 알았습니다.
2 학교가 생긴 후 아이들은 글을 배웁니다.
3 내가 배운것을 다시 후배에게 가르칩니다.



1 물이 없어 목이 타 들어갑니다.
2 사람들의 도움으로 마을에 우물이 생겼습니다.
3 시원한 물 한 모금으로 마음가지 촉촉해 집니다.


정성이 모여 큰 힘이 됩니다.
6천만원이라는 큰 금액이 모일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뙤약볕에서 하루 종일 동동거리며 바자회 물품을 팔 때까지만 해도. 고작 하루 고생했을 뿐인데, 상상도 못할 큰돈이 모였습니다. 작은 정성이 모여 큰 강을 이루었습니다. 여기서 멈추지 말고 강을 바다로, 바다를 대양으로 만들어주세요. 인도의 아이들이 웃을 수 있도록.

인도 둥게스와리 마을을 도우려면
석탄 물을 마시며 갈증을 해소하는 둥게스와리 마을 아이들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으시다고요? 하루 커피 한 잔만 줄이면 그들의 갈증을 해소해줄 망고 한 쪽, 물 한 모금을 나눠줄 수 있습니다. 한국 조인투게더 소사이어티(JTS) 홈페이지(www.jts.or.kr)에 접속하시면 인도 둥게스와리 마을 아이를 도울 수 있는 회원 가입 신청서를 다운로드할 수 있습니다. <행복> 편집부에 전화하시면 언제든 가입 신청서를 배부해 드립니다. 문의 <행복> 02-2262-7232, 02-2262-7196, 한국 조인투게더 소사이어티(JTS) 02-587-8756

(오른쪽) 배우 한지민 씨는 한국 JTS 사회공헌팀에서 자원봉사자로 활동하고 있다.

정세영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0년 8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