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검질과 암대극이 아름드리 피어오른 물고기카페 마당 풍경. 2 한옥 구조를 그대로 살린 카페 내부. 3 80년 전 지어진 이 집에서 가장 ‘미스터리한’ 점은 바로 저 태극 문양이다. 4 별 모양으로 구멍이 뚫린 저 나무 문을 열면 뭐가 있을까? 5 물고기카페에서 대평 포구로 나가는 길목을 마을 사람들은 ‘오즈깨’라고 부른다.
화순과 대평을 감싸 안은 기암절벽 아래로 한 폭의 산수화가 펼쳐진다. 그 옛날 ‘용왕님이 살던 넓은 들판’이라는 뜻으로 ‘용왕 난드르’라 불린 마을. 한가로운 마늘 밭에서 일렁이는 바다의 무늬로, 그 너머에 우뚝 솟은 주상 절리대에서 갈매기 나는 포물선으로, 좌에서 우로 고개 한번 돌렸을 뿐인데, 세상은 아름답다. 멀리 있는 것을 보느라 담장 따라 피어난 하양, 빨강, 분홍 해당화에게 인사가 늦었다. 세 가지 색이 한 나무에서 피기란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렵다는 이 꽃은 어질고 착한 사람이 사는 곳에만 모습을 드러낸다. 따스한 햇살에 눈꺼풀이 껌벅껌벅 내려앉고 사위가 조용해 귓구멍에 솜을 틀어막은 것처럼 청각이 먹먹해지는 서귀포시 안덕면 대평 포구. ‘영화감독’ 아니, ‘서귀포 최고의 웨이터’ 장선우가 여기에 산다. 제주도를 밥 먹듯이 들락거리는 영화판 지인부터 글깨나 쓰고 음악깨나 듣는다는 예술가까지, 약속이나 한 듯 번갈아 가며 드나드는 ‘물고기카페’. 그가 이곳의 주인장이 된 지 벌써, 5년.
그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자면 영화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을 말아먹고, 한동안 몽골에서 말을 타다가 ‘마두금(몽골의 민속 현악기로 두 줄의 현에 말 가죽으로 싼 몸통, 몸통 위쪽 끝에는 말 대가리 장식이 달려 있다)’의 전설에 매료돼 악기를 소재로 한 영화를 찍어보겠노라고 안간힘을 쓴 시절이 있다. 하지만 그 영화는 결국 세상 빛을 보지 못한 채 몽골의 초원에 묻혀버렸다. 주인공으로 발탁돼 배역에 몰두하던 신인 배우들은 공황 상태에 빠졌고, 모든 책임이 그에게 돌아왔다. ‘어린 아이 울리고 잘된 사람 없다’는 몽골 속담 운운하며 엉엉 우는 여배우를 달래면서 다시는 영화를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남의 인생 말아먹고 내 인생 편할 리 없다는 만고의 진리에 마음이 흔들린 것이다.
그는 한국에 있는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리 제주도에 내려가서 살자.” 아내는 두말 않고 ‘안덕면’이 좋겠다고 화답했다. 이 엉뚱한 부부는 다짜고짜 안덕면 동주민센터에 전화를 걸어 “그 동네에 빈집이 있냐”고 물었고, 친절한 동주민센터 직원은 안덕면 대평 포구에 있는 허름한 집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그는 얼마냐고 묻지도 않고 “파실래요, 빌려주실래요?” 그랬단다. 그렇게 전세로 얻은 집에서 3년쯤 살다 보니 서울에서 손님들이 하도 내려와 ‘이럴 바엔 찻집이나 하자’ 그런 생각을 하게 됐다. “살림집 근처에 빈집이 하나 더 있는데, 거기가 또 명당인 거예요. 쓰레기 주워 모으는 게 취미인 할머니가 사시던 집인데 독특하게 지었더라고요. 창문에 태극 문양을 넣은 것 하며 전복 껍데기로 벽 장식한 거 하며, 누가 지었는지 센스가 철철 넘쳐요. 할머니 자식들이 태어난 집이라 팔 순 없다고 해서 또 전세를 얻었죠. 공사하는데 바퀴벌레가 오백 마리쯤 나왔고 수리비가 전셋값의 두 배나 들었어요.” 대평포구가 정면으로 바라다보이는 독특한 옛 가옥은 제주식 복합 문화 공간 ‘물고기카페’로 거듭났다. 서울에 사는 것도 아니면서 새로 나온 음반, 유행하는 의자는 가장 먼저 들여놓고, 대한민국 문화계의 따끈한 소식도 가장 먼저 섭렵하는 ‘이 집 식구들’, 심지어 얄밉기까지 하다. 주체할 수 없이 많은 지인들이 내려와 물고기카페 옆집에 또 한 채의 전세를 얻었다고 하니, 도대체 이 동네 전셋값이 얼마나 하는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다. ‘전셋값이 얼마냐’고 물어보려던 것이 “저 꽃 이름이 뭐냐”는 말은 왜 튀어나온 건지.
“사람들이 이 꽃 이름을 하도 물어서 이름표를 붙일까 해요. 암대극이라는 꽃인데, 바닷가에서 짠물을 먹고 자라요. 겨울에 피고 여름에 죽는다는 게 특이하죠. 그 옆에 분수처럼 치솟은 풀은 검질이에요. 제주 사람은 절대 키우지 않는 잡초죠. 억새 씨가 날아와서 아무렇게나 자란 풀이지만 조형적으로 훌륭한 것 같아요.” 안덕면 대평 포구는 풍수지리적으로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마을이지만 억센 해녀들의 억척 덕에 자연이 덜 훼손된 마을이기도 하다. 기질이 세고 솜씨가 좋아 물질 대회에서 만날 일등만 하는 해녀들은 “난드르년이오다!”를 무기처럼 외치며 어업계를 주름잡는다. 그들과 지척에 사는 덕으로 전복에 문어에, 해삼, 멍게에 소주를 곁들이는 것도 사는 낙. 소주 한 병 달랑달랑 들고 옆집으로 건너가 대낮부터 술판을 벌인 날은 해녀들처럼 오리발을 들고 포구로 나가 스쿠버 다이빙을 즐긴다. 이 동네에 이사와 처음 3년 동안 한결같이 몸을 내맡긴, 그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오즈깨(대평 포구로 나가는 길목)’는 속을 알 수 없는 여자의 마음 같다. 3년 동안 단 하루도 같은 얼굴을 보여준 적 없는 오즈깨에게 ‘천 개의 바다’라는 애칭을 붙여준 것도, 앞으로 10년은 여기서 더 살 거라며 그때는 오즈깨 이름을 ‘만 개의 바다’로 바꾸겠다는 농담도 그가 바다를 사랑한다는 증거다. “큰 스승을 만났어요. 좋은 술 마시며 살 부비고 좋은 차 타는 게 행복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아니에요. 마당에 나앉아 바다를 보고 있으면 마음의 일렁거림이 없는 순간이 찾아오죠. 그게 행복이더라고요.”_사진 한홍일
장선우 1980~90년대 충무로를 주름잡은 영화감독이며 대표작으로 <우묵배미의 사랑> (1990), <화엄경>(1993)등이 있다. 몽골을 배경으로 한 영화 <천 개의 고원>이 무산되면서 영화감독을 그만두고 서귀포시 안덕면 대평리에서 ‘물고기카페’를 운영하며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