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2 년 영친왕비가 순종을 알현할 때 입은 적의. 쌍의 꿩과 소륜화 개가 등으로 짜여 있다. 꼬임이 없는 생사를 사용해 평직으로 짠 직물로 만든 것이 특징.
올해는 우리가 일본 제국에 나라를 빼앗긴 지 1백 년이 되는 해다. 경술년에 일본이 우리나라를 집어삼켰다 해서 올해를 ‘경술국치 1백 년’이라고도 한다.
지난 4월 27일부터 5월 23일까지 국립고궁박물관에서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가의 복식과 장신구를 모아 <영친왕 일가 복식 특별전>을 열었다. 그동안 나는 박물관에서 수많은 전시를 주관했지만, 영친왕 이은과 영친왕비 일가의 복식전은 좀 남달랐다. 왕과 왕비 그리고 그 아들이 입고 치장한 3백33점의 복식을 전시했을 때, 그 순간 숨이 멈추는 듯했다. 지금껏 이처럼 품격과 아름다움을 지니면서 정교함이 배어 있는 유물을 보지 못했다. 조선 최고 장인들의 혼과 기교를 마주하고 보니 절로 황홀경에 빠졌다. 무엇보다 나라를 빼앗긴 왕과 왕비, 왕자 진 晉과 구 玖의 복식 유물이 고스란히, 그것도 깨끗하게 보존됐다는 사실이 경이로웠다. 한 번의 전시로 끝내기에는 너무 아쉽고 선대와 후대에 죄를 짓는 것 같아 <행복>의 지면을 잠시 빌려 감히 이 글을 쓴다.
황태자로 태어났지만 한 번도 태자로 살아보지 못한 사람 비운의 황태자, 영친왕. 그는 한 나라의 황태자로 태어났지만, 한 번도 태자로 살아보지 못한 인물이다. 영친왕 이은은 고종 황제의 일곱째 아들로, 1897년 고종 황제와 순헌황귀비 엄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배다른 형제인 순종 황제가 병약해 소생을 두지 못하자 1907년 10세 되던 해 영친왕이 황태자로 책봉된다. 그러나 바로 그해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손에 이끌려 강제로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말이 유학이지 조선 왕실의 독립을 견제하기 위한 볼모나 다름없었다. 영친왕이 군복 차림으로 일본 신바시 역에 도착하자, 일본 왕태자를 비롯해 왕족, 원로대신, 조야의 명사, 귀부인 등 1천여 명이 그를 맞았다.
어린 영친왕이 일본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부모 품으로 돌아가겠다고 떼를 쓸까 걱정한 일본은 여행, 그네 타기, 병정놀이 등 영친왕의 환심을 사기 위해 전전긍긍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여름방학이 되면 어머니를 만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민족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는 이듬해(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당했다. 1910년 일본은 강제 합병으로 국권을 강탈하고, 순종 황제를 이왕으로 폐위했으며 영친왕도 황세자에서 왕세자로 강등했다. 영친왕이 일본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위가 되었을 무렵인 1919년 1월 21일 그에게는 큰 사건이 터졌다. “오후 1시, 비보. 생각하지 못한 비보가 내 귀에 울려 펴졌다. 그것은 경성(서울)에 계시는 이태왕 고종 전하께서 오전 1시 35분 뇌일혈이 발병해 오전 7시 50분 중태에 빠지셨다는 소식이었다. 아아, 지금까지의 기쁨은 이내 슬픔으로 변했다.” 영친왕비 이방자 여사는 이렇게 일기에 쓰고 있다. 영친왕과의 혼인을 사흘 앞둔 날이었다. 고종의 승하로 이들의 혼인은 이듬해인 4월 28일로 연기됐다(올해는 영친왕과 영친왕비가 혼인한 지 90주년 되는 해다). 당시 영친왕에게는 간택된 약혼녀 민갑완이라는 규수가 있었다. 일본 왕족인 마사코 또한 유력한 황태자비였다. 결국 이루어진 영친왕과 마사코의 혼인은 일본의 내선일체 정책에 의해 강요된 정략결혼이었다. 1922년 영친왕 부부는 첫아들 진을 안고(비록 두 나라 왕족 간의 이질적인 사랑의 결실이지만) 현해탄을 건너 창덕궁에서 순종 황제를 알현했다.
당시 조국은 나라의 원흉인 일본인 아내와 그 아내가 낳은 왕자를 어떻게 맞아야 할지 걱정했다. 하지만 순종과 순종비는 그들을 따뜻하게 맞았다. 영친왕 부부는 순종과 순종비 윤황후에게 근현례 覲見禮를 올렸다. 이때, 영친왕 부부와 아들 진이 입은 옷과 머리 장식들이 이번 전시에 선보였다.
(왼쪽) 봉황 모양으로 만든 비녀머리. 진주, 산호, 청파리, 홍파리, 비취모 등으로 장식했다.
다시 보기 쉽지 않은 보물들의 전람회 사람들이 조선 왕실 하면 바로 떠올리는 것이 대개 고궁, 종묘, 왕릉, 실록 등이다. 그 밖에 남아 있는 유물도 별로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조선 왕조는 그렇게 허술한 나라가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보다도 더 철저하게 시스템으로 운영된 국가였다. 조선 시대의 왕실 문화는 품위와 격조를 갖춘 당대 문화의 정수들을 집적하고 있다. 왕실의 의복과 음식, 기물 또한 당대 최고의 장인들이 가장 좋은 재질로 만들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왕실의 생활용품들은 실용적이면서도 왕실의 위엄과 고귀함을 함께 갖추었다. 한마디로 국왕과 왕실의 위엄을 가시적으로 잘 보여주는 물건이다. 굳이 시대를 멀리 거슬러 오르지 않아도 된다. 1백여 년 전 왕과 왕비, 왕자의 신분이던 영친왕 일가의 3백33점 복식 유물이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감히 세계 어느 왕실의 유물에 비유해도 손색이 없다고 자부한다. 더욱이 한 왕족 일가의 유물이 고스란히, 그것도 이렇게 깨끗하게 보존되기란 더더욱 어렵다.
이번에 전시된 영친왕가의 옷과 장신구 3백33점은 전부 보물급에 해당하는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었다. 그중 어느 것 하나 중요하고 귀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그래도 눈여겨볼 만한 것을 꼽으라면 영친왕비가 사용한 치장구들이 아닌가 싶다. 화려하고 섬세한 비녀・뒤꽂이・댕기 등의 머리 장식, 노리개・가락지 등의 치레 도구, 그리고 이동식 화장대라 할 수 있는 경대와 그 안에 들어 있던 화장 소품들, 장신구를 곱디곱게 싸서 보관한 비단 장신구 함과 보자기들, 1922년 4월 순종과 순종비를 알현할 때 입은 영친왕의 익선관과 곤룡포, 꿩 문양이 그려진 영친왕비의 적의 등도 빼놓을 수 없다. 더욱이 영친왕의 아들 진과 구가 입은 옷은 약방의 감초와도 같다.
1 진과 구 왕자의 까치두루마기로, 별문숙고사로 지었다. 형태는 보통 두루마기와 같으나 각 부분의 색을 달리한 것이 특징이다. 남자아이는 깃・고름・돌띠를 남색, 무를 홍색이나 자색으로 했다. 2 무문단으로 만든 향주머니로 매화와 잎새, 줄기 그리고 양 끝에 나비를 금사로 수놓고 진주를 부착했다. 3 초화장단 겹보자기. 4 영진왕비가 신던 당혜. 신발 바닥에 ‘궁’ 자가 쓰여 있다. 5 장신구 상자. 뚜껑의 고리 끝에 메뚜기를 달아 몸체 고리에 끼워 고정한 걸로 보이나 메뚜기는 결실되었다. 6 진과 구 왕자가 입던 풍차바지. 뒤가 트여 있어 기저귀를 갈기에 편리한 어린이용 바지다. 7 머릿기름을 담아두던 청화백자 합. 8 꽃문양이 그려진 면빗. 9 일제강점기에 제작한 주칠 단 경대.
영친왕과 영친왕비 옷이 세상에 남아 영친왕이 입은 옷은 저고리・바지・조끼・마고자・두루마기・전복・허리띠(세조대) 등으로 왕의 옷치고는 매우 수수하다. 하지만 바느질이 매우 정교해 당시 궁중 침선방 針線房 궁녀들의 솜씨가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특히 입는 사람의 편의를 고려해 바지는 용변 보기 편하도록 사폭 트임을 줬고, 배자에는 주머니를 많이 달고 일반 단추로 여밀 수 있게 하는 등 기능성을 강조한 것이 특징이다.
영친왕비가 입은 옷으로는 적삼・저고리・당의・치마・버선・당혜 등이 있다. 옷감에는 다양한 꽃과 열매, 갖가지 길상무늬 등을 아낌없이 수놓고 그렸다. 색상은 분홍색, 송화색, 연두색, 남색 등으로 비교적 절제되었지만 무늬는 매우 화려하다. 무엇보다 세트로 갖춘 왕비의 복식이 지금까지 전해져온 것이 놀라울 정도다. 속적삼부터 ‘저고리 삼작’이라 하는, 속에 입는 두 벌의 저고리와 당의까지 빠짐없이 갖추었다. 또한 당의와 대란치마, 전행웃치마는 각각 단 緞과 사 紗로 만들어 하절기와 동절기용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
특히 1922년 4월 왕과 왕비가 처음으로 고국을 찾아 창덕궁에서 순종 황제를 알현할 때 입은 곤룡포와 익선관, 옥대, 목화도 만날 수 있다. 왕비의 것으로는 원삼에, 적의는 중단・폐슬・패옥・하피・대대・후수・옥대・청말・청석・규 등 완벽하게 일습이 남아 있다.
(왼쪽)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의 결혼사진 (1920년).
영친왕 일가가 차고 다닌 주머니들 영친왕 일가가 사용한 주머니는 홍색・황색・옥색・진분홍색 등의 비단에 부귀와 장수, 복을 바라는 갖가지 길상무늬를 오색실로 화려하게 수놓은 것들이다. 금실로 징그면서 수놓는 징금수 기법을 비롯해, 천연 진주를 붙이거나 금박을 입히고, 주머니 끈에는 국화・도래・가락지・날개 매듭 등을 맺어 화려하게 장식했다. 주머니는 복주머니를 비롯해 황두 黃豆를 넣은 왕자의 돌 주머니, 향주머니, 약주머니, 붓 주머니 등이 있다.
영친왕비의 노리개 노리개는 금・은・옥・자마노・공작석・산호 등의 재료로 만든 주체 主體와 띠돈・매듭・술・끈목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 개의 노리개만으로 이뤄진 것을 단작 單作 노리개라 하고, 세 개의 노리개가 한 벌로 연결된 것을 삼작 三作 노리개라 한다.
영친왕비가 사용하던 노리개는 동자・나비・주머니・장도 長刀・향갑 香匣 등의 모양에 쌍봉 술과 낙지발 술을 드리웠다. 이 중에는 영친왕의 이복형인 의친왕비가 1941년 영친왕비에게 선물한 삼작노리개도 포함되어 있다.
영친왕비의 머리 장신구 영친왕비는 1922년 순종을 알현할 때 적의를 입고 가체(大首라고도 함)로 머리를 장식했는데, 이는 궁중에서 가장 화려하고 격식을 갖춘 머리 양식이다. 가체는 비녀와 꽂이류, 머리띠인 대요로 장식한다. 진주장잠과 백옥, 선봉잠, 진주동곳, 백옥떨잠은 세로로 꽂고, 용잠과 오두잠, 가란잠, 후봉잠 같은 비녀는 가로로 꽂는다. 이 밖에도 영친왕비가 원삼을 입을 때 머리에 장식한 족두리와 비녀, 꽂이류를 비롯해 이들을 보관한 상자도 잘 보존되어 있다.
이동식 화장대인 경대와 화장 도구들 경대는 왕비가 썼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소박하고 단아하다. 경대 서랍에는 영친왕비가 화장할 때 쓰던 분갑을 비롯해 빗치개, 다양한 크기의 얼레빗과 참빗 등이 들어 있다. 3cm 크기의 얼레빗은 너무 작아 앙증맞기까지 하다.
왕자의 옷들 영친왕에게는 아들 진과 구가 있었다. 큰아들 진은 생후 8개월 만에 고국에 들어와 그만 병사했지만 둘째 구는 2005년 일흔다섯 살이 될 때까지 살았다. 아이 옷은 대부분 둘째 아들 이구가 입은 것이다. 색동옷을 비롯해 돌복이 있는데, 오방색과 분홍색ㆍ자색 등의 간색 間色을 풍부하게 사용해 화사함과 화려함을 느끼게 한다. 조끼, 사규삼, 두루마기에는 왕자의 부귀・건강・장수・자손의 번창을 기원하는 뜻을 담아 다양한 문양과 길상어문을 부금했다. 특히 조끼는 양장의 도입으로 생겨난 새로운 형태의 복식이며, 저고리와 바지의 누비는 재봉틀을 이용한 것으로 1900년대 이미 왕실에 재봉틀이 도입되었음을 알려준다.
영친왕비가 사용한 머리 장식들. 1 날개를 활짝 편 봉황 형태로 만든 꽂이. 2 홍산호로 매화와 댓잎을 조각한 비녀로, 군데군데 벌레 먹은 곳을 밀랍으로 보수한 흔적이 보인다. 3 백옥의 비녀머리를 꽃문양으로 조각한 뒤 그 위에 은으로 세공한 매화, 모란, 국화 등으로 꾸민 백옥영락초롱잠. 4 백옥떨잠으로 이름처럼 백옥 판 위에 ‘목숨 수 壽와 새, 불로초, 박쥐, 영지를 장식했다. 5 백옥영락초롱잠의 장식 세부. 진주와 비취모로 국화 모양을 만들었다. 6 비취로 박쥐 모양을 조각한 뒤꽂이.
왕가의 유물이 고국으로 돌아오기까지 영친왕 일가의 궁중 복식은 일본에서 영친왕비 이방자 여사가 보관해오던 것이다. 의복을 관리하기 어려웠던 영친왕비는 1957년 이를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에 기탁했다. 1963년 5월 영친왕과 왕비가 환국한 후 귀중한 이 유물들은 도쿄박물관의 깊숙한 수장고에 잠든 채 잊히는 듯했다. 하지만 1980년대 한국의 복식학자 김영숙 선생의 조사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당시 낙선재에서 여생을 보내던 영친왕비의 재가와 협조를 얻은 문화재관리국(문화재청의 전신)은 이를 환수받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그러던 1990년 5월 24일, 한일 정상회담에서 본격적으로 환수 문제가 논의되어 마침내 1991년 10월 15일에 영친왕 일가의 복식이 한국으로 돌아오게 됐다. 이 왕실 유물의 환수를 계기로 정부에서는 이를 보존하고 전시하기 위해 국립고궁박물관의 전신인 궁중유물전시관을 건립했다.
비운의 황태자 영친왕의 마지막 올해는 영친왕 타계 40주년이 되는 해다. 영친왕은 일본에 억류되어 있는 동안 일본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을 거쳐 오사카 사단장을 역임했다. 패전 이후 일본 황족으로서의 특권이 박탈된 후 재산을 몰수당하고 평민 신분으로 1963년까지 일본에서 간고의 세월을 보냈다. 1945년 광복된 조국에 환국하고자 했으나 한일 국교 단절과 이승만 대통령의 반대에 부딪혀 환국이 좌절되었다.
그러다 1963년 11월, 박정희 국가최고회의장의 주선으로 국적을 회복하고 이방자 여사와 함께 56년 만에 환국하기에 이른다. 당시 영친왕은 이미 뇌혈전증으로 인한 실어증에 걸려 병마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는 살아생전에 영친왕비와 함께 심신장애자를 위한 재활원인 자행회와 신체장애자 훈련원인 명휘원을 설립하고 사회봉사의 뜻을 펴고자 했다. 그러나 병고에 시달리다 1970년 5월 1일 73세를 일기로 한 많은 생을 마쳤다. 영친왕비 이방자 여사 또한 1989년 89세로 낙선재에서 지난한 삶을 마감했다. 영친왕과 영친왕비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홍유릉 안의 영원에 안장돼 있다.
책으로 만나는 왕족의 나날 <영친왕 일가 복식> 특별전에 전시된 유물 3백33점을 모아 책으로 묶었다. 왕실 복식의 이모저모를 세세한 부분 사진과 설명까지 더해 집대성한 책으로 고품질의 사진이 특별히 눈에 띈다. 12만 원에 구입할 수 있다. 문의 02-745-83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