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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화 들여다보기]조상들에게 배우는 웰다잉 한평생 잘 살았으니 또한 잘 죽읍시다!
웰다잉법정 스님의 입적, 유명 배우 남매의 자살 사건을 바라보며 우리는 요즘 부쩍 아름다운 마무리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태어나는 것은 마음대로 할 도리가 없지만, 아름다운 죽음은 충분히 준비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옛 어른들이 죽음을 바라보고 준비하던 모습에서 21세기에 필요한 참된 ‘웰다잉’의 비법을 발견할 수 있다.

이동웅, ‘심향 002’, 캔버스에 유채, 2010


아름다운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이유 지난 3월 11일, 법정 스님이 성북동 길상사에서 입적했다. 세수 78세. “장례식을 하지 마라. 수의도 짜지 마라. 평소 입던 무명옷을 입혀라. 관도 짜지 마라. 강원도 오두막의 대나무 평상 위에 내 몸을 놓고 다비해라. 사리도 찾지 마라. 남은 재는 오두막 뜰의 꽃밭에 뿌려라.” 법정 스님의 생애 生涯 마지막 말이다. 실로 법정 스님다운 아름다운 생의 마무리 말이 아닐 수 없다.
법정 스님의 죽음은 우리의 삶에 대해, 그리고 참 죽음(곧 웰다잉 well-dying)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누구나 아름답고 건강한 죽음을 맞는 것은 아니다. 또 아무나 유언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법정 스님처럼 ‘죽음을 준비한 사람’만의 권리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언 없이 생을 마감한다. 유언 없이 죽는 것은 졸지에 죽는 것이나 다름없다. 졸지에 죽는다면 얼마나 억울한 일이겠는가. 어떤 죽음도 슬프지 않은 것이 없지만, 그 가운데서도 슬픔을 감동으로 승화하는 힘이 바로 웰다잉이다. 아름다운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몇 해 전 일본의 한 절을 방문했다. 법당 천장에 우리나라 절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것이 매달려 있었는데, 머리카락으로 튼 똬리였다. 하도 이상해서 스님께 여쭈었더니 신도들이 죽을 때 고통 없이 죽게 해달라고 기원하며 공양한 것이라고 했다. 일종의 육신 공양, 즉 머리카락 공양이라는 것이다. 너무 현실적이고 소박한 그 이야기에 놀랐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떠한가. 죽을 때 고통 없이 죽게 해달라고 절에 가서 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은 죽어서 극락이나 천당에 가기를 빌거나, 아니면 자식 잘되고 가정 편하고 부자 되기를 기원한다. 한국과 일본 사람이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은 이렇게 차이가 난다.
내 무덤에 비석을 세우지 마라 내가 꿈꾸는 참다운 웰다잉, 그 한 자락을 퇴계 선생의 유언에서 발견했다. 1570년(선조 3년) 12월 8일, 대유학자 퇴계 이황 선생은 ‘매화 화분에 물을 주라’고 제자에게 명하고는 오후 5시 무렵에 누운 자리를 정돈하게 했다. 그러곤 부축 받고 일어나 앉더니 그 자세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경상도 안동의 도산에서였다. 퇴계 선생은 다섯 가지 유언을 글로 남겼다. 그중 하나가 “비석을 세우지 마라. 다만 작은 돌의 앞면에다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 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도산으로 물러나 만년을 숨어 산 진성 이씨의 묘)’라고 간략하게 써라”였다. 세상을 뜬 직후 나라에서 판서(지금의 장관급)보다 높은 찬성과 영의정에 추증(관료 사후에 직급을 높이는 일)했다. 당연히 비석에 이 벼슬의 직함을 새겨 길이 알려야 함에도 퇴계 선생의 묘비에는 그 흔한 벼슬 이름도, 그에 대한 찬사도 남아 있지 않다. 단지 ‘도산으로 물러나 만년을 숨어 산 진성 이씨의 묘’라고 쓴 열 자의 비문만 적혀 있을 뿐이다. 조선 최고 유학자의 단아함과 겸허함을 엿볼 수 있다. 그의 죽음 또한 그러했다.
내가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2009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조선 왕릉은 많은 사람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하지만 세조의 유언 한마디로 조선 왕릉 제도에 커다란 변화가 있었음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조선 초기만 해도 왕릉은 석실이 일반적이었다. 돌로 방을 꾸민 무덤에 시신을 안치한다고 생각해보라. 얼마나 많은 인력과 시간과 돈이 들어가겠는가. 이 제도를 바꾼 것이 다름 아닌 세조의 짤막한 한마디 유언이었다.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석실과 석곽을 마련하지 마라. 또 석실은 유명무실한 것이므로 이를 쓰는 것은 옳지 못하다”라고 유언을 남겼다. 이로 인해 세조가 묻힌 광릉부터 석실 대신 회격 灰隔(관을 구덩이 속에 내려놓고 그 사이를 석회로 메워서 다짐)으로 내부를 만들게 되었다. 그 이후 조성되는 조선의 모든 왕릉은 석실이 아닌 회격 형태를 띠게 됐음은 물론이다. 또 세조는 왕릉의 봉분을 둘러싸는 병풍석도 설치하지 않도록 했다. 왕릉의 무덤 속 현궁 玄宮(임금의 관을 묻던 구덩이 부분)을 석실로 축조하면 지하 광중 壙中 작업에만 6000명의 인부가 투입되어야 한다. 하지만 세조의 유언대로 석실을 회격으로 바꾸면 작업 인원이 절반인 3000명으로 줄어든다. 이처럼 석실묘에서 회격묘로의 변화는 일대 혁명이었으며, 엄청난 비용과 시간의 절감을 가져왔다. 그것은 왕릉 제도의 변화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의 무덤 축조 방식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쳐 수많은 인력과 돈이 수반되는 석실묘가 사라지게 됐다. 세조는 석실과 같은 왕릉의 조영 방식에 따른 폐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부터 몸소 검소함을 보이고 백성에게 짐을 지우는 폐단을 과감히 없앤 것이다.
최고의 부조는 만장 법정 스님의 다비식은 조촐하기 그지없었다. 스님의 유언 때문에 그 흔한 만장 하나 만들지 않았으니 말이다. 만장 輓章은 망자의 공덕을 비단이나 종이 등에 적은 글로 만사 輓詞, 만가 輓歌, 만시 輓詩라고도 부른다. 망인의 공덕을 기려 좋은 곳으로 인도하게 한다는 뜻을 담은 물건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장례 때 가장 큰 부조가 만장 부조라 했다. 부모가 돌아가시면 이름 있는 사람의 만장 하나 받는 것을 큰 영광으로 여겼다. 그래서 만장 숫자로 장례 규모를 가늠하기도 했다.
만장의 시원은 춘추전국시대의 만가에서 비롯되었다. 친척이나 친구가 죽으면 상여의 뒤를 따라가며 애도하는 노래를 불렀는데, 옆에 따르던 사람이 받아 그 노래를 기록한 것이 만사의 시초다. 조선 왕조 500여 년 역사상 가장 애절한 만사 하나를 들라면 단연코 선조 때 정승을 지낸 백사 이항복이 지은 만사가 아닌가 생각된다.
입을 두고도 감히 말을 못하고(有口不敢言)
눈물이 있어도 감히 곡을 못하네(有淚不敢哭)
베개를 만지되 남이 볼까 무섭고(撫枕畏人窺)
소리를 삼키며 몰래 눈물 삼키네(呑聲潛飮泣)
그 누가 날 선 칼날을 가지고서(誰將快剪刀)
굽이굽이 맺힌 간장 잘라내줄꼬(痛割吾心曲)


이 만사에 얽힌 사연은 이러하다. 1589년(선조 22년) 정여립의 모반과 연루되어 정승 정언신이 갑산으로 귀양을 가게 되자, 아들 율이 단식 끝에 피를 토하고 죽었다. 하지만 연루죄로 얽혀들까 집안 사람들조차도 두려워해 그의 장사를 제대로 치러주지 못했다. 그 원통함을 안 당시 백사 이항복이 가족도 모르게 시 한 수를 지어 관 속에 넣었다. 30년이 지난 뒤 장성한 율의 아들이 이장하기 위해 관 뚜껑을 열어보니 만사가 놓여 있었다. 그 만사는 방금 쓴 것처럼 종이와 먹빛이 그대로였다고 한다.

(왼쪽)<이동웅, ‘심향 002’, 캔버스에 유채, 2010

내가 만장 도둑이 된 사연 1993년 11월 4일 성철 스님의 다비식 때는 무려 1000장의 만장을 만들었다. 오색찬란한 만장의 물결은 말 그대로 장관이었다. 성철 스님의 법구를 화장할 연화대 골짜기는 10만 명은 될 법한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다비식은 오후 2시 40분부터 진행되었는데 4시쯤 되자 많은 인파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비에 젖은 만장 등으로 다비식장 주위는 몹시 어수선했다. 오후 5시쯤 현장을 관장하던 한 스님이 비에 젖어 지저분하게 널려 있는 만장을 인부들에게 태우라고 지시했다(원래 유교식 장례에서는 만장을 상청에 두었다가 모든 내용을 기록해 문집으로 만들어 후세에 전한다. 그러나 불가에서는 다비식이 끝나면 유해와 함께 만장을 태우는 것이 관례다).
우연히 이 이야기를 들은 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신분을 밝히고 내게 줄 수 없느냐고 여쭈었다. 한동안 나를 쳐다보던 스님은 다른 스님들과 상의하더니 오방번기만 빼놓고 가져가라고 했다. 오방번기는 모두 5개로 동서남북에서 오는 잡귀를 막아주고 불보살의 위덕과 무량한 공덕을 나타내며, 죽은 사람의 영혼을 극락세계로 인도하는 깃발이다. 한번 제작하는 데 수백만 원이 들기 때문에 다음에 재사용할 요량으로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사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문화유산을 연구하는 내 눈에는 만장이 태워지거나 찢겨 없어지는 게 너무 안타까웠다. 먼저 인부들에게 담뱃값으로 5만 원을 건네주면서 만장을 한곳으로 모아달라고 부탁했다. 스님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오방번기가 탐이 나 얼른 하나를 가방 속에 몰래 챙겨 넣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만장을 가져가도록 허락해준 스님께서 오방번기 하나가 없어졌다며 내게 묻는 것이었다. 본의 아니게 도둑질한 것이 되어 지금도 스님께 미안한 마음 금할 길 없다. 졸지에 만장 도둑이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상례 후 태워 없어질 처지에 있던 성철 스님의 만장은 국립민속박물관의 유물 776점으로 잘 보관되어 있다(오방번기도 마찬가지다). 776장의 만장 중에는 재미 교포가 보내온 “I miss you….”라는 영문 만장에서부터 불가의 화두를 원용한 ‘이 뭣고’ ‘삼삼은 구’ ‘산은 산 물은 물’ ‘無’라는 글귀의 만장까지 참으로 다양했다. 776장의 만장을 하나하나 세탁해 박물관 뜰에 말리던 때의 모습은 가히 장관이었다.
1000장의 만장 중 200여 장은 현장에서 스님들과 신도들이 기념 신표로 가져갔다. 만장으로 아이들에게 속옷을 지어 입히면 장수하고, 허리띠로 사용하면 허리 병이 낫는다는 속신 때문이다. 물론 성철 스님의 만장이 당장에는 문화적ㆍ자료적 가치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한 세대가 흐른 후에는 성철이란 인물 연구에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문화유산이라면 흔히 특별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또 ‘지금’ ‘우리 곁’의 것이라고 중요하지 않게 여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세월이라는 두께가 입혀지면 중요한 문화재가 되는 것이다.
아름답게 죽는다는 건 무언가 하루하루 행복하고 건강하게 지내면 됐지 무얼 더 바라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죽음은 언제, 누구에게 먼저 닥쳐올지 모른다. 태어나는 순서는 있어도 죽는 순서는 없다고 하지 않던가. 기왕이면 죽음을 아름답게 맞이하는 게 곧 아름다운 생이 아닐까. (아직 죽음을 생각할 나이는 아니지만) 나는 세 가지 유언을 준비해놓았다.
첫째, 내가 죽으면 지금 소장하고 있는 수천 권의 책은 모두 모교 대학에 보내 학생들이 부담 없이 볼 수 있게 하라. 이것은 나의 은사님께서 갑자기 돌아가시자, 그 자녀들이 아버지의 책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던 모습을 보고 결심하게 됐다.
둘째, 나의 장례식 때 절대로 부의금을 받지 마라. 아름다워야 할 우리의 부조 문화가 부익부 빈익빈 형태로 변질되어가는 모습이 안타까워 이런 생각을 하게 됐다.
셋째, 매장이고 납골이고 다 부질없는 일이니 시신은 화장하여 흔적도 남기지 마라. 처음에는 집사람에게 내 유골을 화장해 부모님 산소에 뿌려달라고 했다. 그러자 “그럼 죽어서까지 시부모님하고 함께 있어야 돼?” 하기에 맞다 싶어 그럼 뿌리고 싶은 데 뿌리라고 했다. 우리나라 고고학 1세대인 삼불 김원룡 박사도 화장 후 산골하도록 유언해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죽으면 가장 빨리 흙이 되어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 이렇게 가장 자연 친화적인 매장법이야말로 웰다잉의 귀결 아니겠는가.
최혜경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0년 5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