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개한 벚꽃 아래 환하게 웃는 드라마 작가 노희경 씨.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낙산 공원의 어느 집 앞에서
1996년의 어느 일요일 오후. 할머니가 당신 자리라고 지정해놓은 소파에 앉아 꾸벅꾸벅 조는 사이 나는 숨죽여 드라마를 본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이라는 제목의 4부작 단막극으로 말기 암에 걸려 죽음을 앞둔 엄마의 가슴 아픈 가족애를 그린 드라마였다. 늙은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주인공 나문희 씨의 연기가 어찌나 절절하던지 세상에 태어나 그때처럼 가슴 저미게 울어본 적도 없는 것 같다. 암에 걸린 며느리가 죽음이 머지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날, 치매에 걸려 대소변도 못 가리는 시어머니를 붙들고 서럽게 울던 장면. “어머니, 이렇게 살려거든 차라리 나랑 같이 죽자.” 내가 죽고 나면 저 노인네를 누가 돌보겠나 싶어 설움에 차 울던 며느리는 마침내 시어머니의 목을 조르고 만다. 이 시대의 어떤 며느리가 감히 그 심정을 이해할까. 아니, 그런 진심을 가진 며느리가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드라마가 눈물 쏙 빼던 시절은 갔지만 드라마를 통해 인간의 진심을 이야기하려는 작가는 남아 있다. 작은 체구에 또렷한 이목구비가 눈에 띄고 거침없는 화법과 선한 웃음이 매력적인 드라마 작가 노희경 씨. 인터뷰를 위해 여의도 한복판의 번화한 커피숍에서 그를 만나는 동안 ‘연예인’이라 이름 붙은 사람들이 다가와 깍듯하게 인사를 하고 갔다. 동석한 나는 괜히 마음이 우쭐해졌는데 그건 아마도 오랜 팬으로서 그의 성공을 지지했기 때문, 세상이 각박해도 여전히 진심은 통한다는 걸 목도했기 때문.
사실 나 같은 ‘열팬’을 두고도 노희경 씨의 드라마는 시청률이 높지 않다. 그래서 ‘시청률은 낮지만 마니아층을 확보한 작가’라는 위로를 받곤 한다. 자신이 쓴 드라마를 보는 게 시청자들에겐 힘들고 어려운 일일 수 있다는 걸 그도 잘 안다. 악다구니 쓰며 살아가는 시장통 사람들 이야기를, 불륜을 일삼고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의 극악함을, 지극히 현실적이어서 외면하고 싶은 진실들을 굳이 드라마를 통해 보고 싶지 않다는 것을. 하지만 그렇게 모두가 외면하는 삶의 진실들을 노희경 씨는 진심을 다해 쓴다. 그것은 결코 외면할 수 없는 내 어머니와 형제의 이야기요, 지긋지긋하게 배고팠던 가난한 내 어린 시절의 초상이므로.
“제가 마흔넷이니까 지금으로부터 33년 전이죠. 정확히 기억해요. 열한 살 때였어요. 그 시절엔 한 달에 두 번씩 동회에서 밀가루를 타다 먹었죠. 늘 배가 고팠기 때문에 그날만 손꼽아 기다렸어요. 밀가루를 받으러 가면 나는 큰 소리로 또박또박 말해요. 우리 아버지 이름은 노상석이고요, 마포구 도화동 산 2번지에 살아요. 그럼 5kg짜리 밀가루를 두 포대 줘요. 그걸 받아 들고 돌아오는 길엔 신이 나서 콧노래를 불렀죠. 수제비 해 먹을 생각에 한겨울에도 땀을 뻘뻘 흘리며 산비탈을 올랐던 기억을 어떻게 잊겠어요.”
그나마도 밀가루가 없는 날엔 풀대죽으로 연명했던 지긋지긋한 가난의 시간들. 그 속에서 어머니가 보여준 온정은 돌이켜 생각해도 위대한 것이었다. 감자 몇 알 삶아도 끼니 거르는 이웃집 할머니를 챙기고, 김치를 담그면 부모 없는 아이들 집에 한 보시기 나눠주고. 1년에 한 번 별식으로 잡채라도 만드는 날이면 그는 어머니가 이웃집에 음식을 나눠줄까 봐 신신당부를 했다. 학교 갔다 와서 한 번 더 먹을 거니까 내 몫은 누구 나눠주지 말고 꼭 남겨두라고. “제 말이 떨어지자마자 엄마는 버럭 소리를 지르셨어요. 그게 밥도 아닌데 조금씩 맛만 보면 됐지 뭘 그렇게 배 터지게 먹으려고 야단이냐고. 그땐 엄마가 참 야속했는데 다 커서 생각해보니 그 가르침이 참 깊다는 걸 알게 됐죠.” 열여섯에 시집와 한평생 가난에 찌들어 살았던 어머니는 쉰여섯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나보다 못한 이웃과 나누며 사는 게 인간의 도리라는 커다란 가르침을 남긴 채.
어머니가 떠나고, 그는 이제 오빠의 아이 둘, 언니의 아이 둘을 포함해 총 네 명의 조카를 키우며 산다. 오빠가 이혼을 하면서 아이들이 거처를 옮겨 다니는 걸 보다 못해 맡기로 했고, 글 쓰느라 돌보지 못하는 살림을 떠맡길 요량으로 언니네 식구까지 끌어들였다. 사실 처음에는 속 편히 조카들 유학이나 보내고 학비나 댈까도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그 아이들을 돌보지 않으면 나중에 녀석들이 커서 칼 들고 쫓아오겠구나(고모조차 조카들을 외면한 셈이니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시작된 조카들과의 동거는 예상치 못한 즐거움과 깨달음을 주었다. 조카들은 고모(혹은 이모)가 저네들 키워준다고 조금이라도 생색을 내면 기가 막히게 알아차렸다. 진심으로 보듬고 살피지 않으면 재수 없는 어른,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을 그도 금세 깨달았다.
조카들이 깨닫게 해준 반면교사의 모습은 또 있었다. 진정성 운운하며 착한 척은 있는 대로 하는 드라마 작가가 현실에서는 어떤 실천도 하지 않는다? 1년에 1억 벌면서 한 달에 3 만원, 5 만원 기부하는 걸로 여기저기 생색은 다 내고 다니고? 이 얼마나 이율배반적인 일인가. 그는 조카들에게 말과 행동이 다른 어른으로 기억되고 싶지 않았다. 또 가난의 고통을 뼈저리게 아는 사람으로서, 누군가의 도움으로 수제비 한 그릇의 기쁨을 만끽해본 사람으로서 이 땅에서 죽어가는 수많은 아이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는 오랜 부채감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1 선물 받은 귤을 머리에 올리고 사진을 찍는 아이들. 2 새 신발 하나로 아이들의 기분은 하늘을 날 것 같다.사진 제공 조인투게더(JTS)
노희경 씨는 6년 전부터 유엔 산하 기구인 조인투게더(JTS Join Together Society)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JTS는 유엔경제사회이사회 특별 지위 등록 단체로 국제 기아, 질병, 문맹 퇴치에 앞장서고 있는 비영리단체다. 수없이 많은 나눔 단체 중 유독 JTS에 끌린 건 가난했던 어린 시절 유엔이 지원해준 밀가루를 받아 먹으며 배를 채웠기 때문만은 아니다. 인종, 종교, 민족, 사상, 이념에 관계없이 삶의 최전방에서 죽음의 위협을 받는 아이들을 우선으로 돕는다는 점, 수혜자의 입장을 고려해 개인이 아닌 단체나 지역을 돕는다는 점, 최소한의 도움을 보다 많은 사람에게 나누고 그 사람들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 나눔을 순환하도록 유도하는 점 등이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사실 처음 활동할 때만 해도 지금처럼 열렬해질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그런데 1년 넘게 그곳에서 활동하는 자원봉사자들의 열정을 지켜보면서 자연스럽게 마음이 동했다. 그는 JTS 내에 사회공헌팀을 만들고 주변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그와 오랜 호흡을 맞춰온 표민수 감독의 아내 전은선 씨와 배우 배종옥, 김여진, 한지민 씨 등 그의 지인들은 이제 이곳 사무실에 출퇴근할 정도로 열성적이다.
“사람들이 그러더라고요. 작가가 글이나 쓰지 쓸데없이 저런다고. 그런 말을 들으니까 처음엔 주눅이 들더라고요.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골프 치러 가자고도 친구를 꾀고, 남의 뒷담화하자고도 친구를 꾀는데, 남 돕는 일에 왜 친구를 못 끌어들여요? 돈 꿔달라는 것도 아닌데 괜히 미안해하고 굽신거리지 말자, 당당하게 나서자 생각했지요.” 그렇게 마음먹고 나니까 저금통 들고 버스에 오르는 일도, 더 많은 후원자를 모으기 위해 잡지 촬영을 하는 일도 아무렇지 않게 느껴졌다. 내 얼굴을 팔아서 더 많은 아이들을 살릴 수만 있다면 기꺼이 카메라 앞에 선다. “표민수 감독의 아내 전은선 씨가 저와 오랜 친구예요. JTS에서 함께 활동하는데 그분이 그러더라고요. 자기는 집에 있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일을 하면서 사는 게 너무 즐겁다고요. 만 원이면 몇 명의 아이가 끼니를 해결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만 머릿속에 맴맴 돈대요.”
6년 전부터 조인투게더(JTS) 사회공헌팀에서 일하고 있는 노희경 씨는 이제 ‘나눔은 삶의 일부’라고 말한다.
그 역시 만나는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하는 이야기가 나눔을 실천하라는 것이다. 버는 돈의 1%만 나눠도 세상은 달라진다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 다만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안타까울 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나라에도 굶어 죽는 애들이 많은데 왜 남의 나라 아이들을 돕느냐고 꾸짖기도 한다. 처음엔 그도 같은 생각을 했다. 그런데 10년 전 지방의 어느 보육원에서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됐다. 자원봉사를 하고 싶다고 찾아갔더니 보육원 관계자가 솔직한 심정을 털어놨다. 봉사자가 오면 그 사람들이 할 일을 만들어주느라 자신들이 더 피곤하다고. 게다가 보육원 창고에는 분유며 기저귀가 차고 넘쳤다. 대한민국에 불우하게 사는 아이들은 많지만 굶어 죽는 아이들은 더 이상 없고, 우리가 시급하게 도와야 할 사람들은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 있다. JTS의 핵심이 바로 그것이다. 국가가 최소 생계비를 보조해주는 빈곤층이 아니라 죽음의 경계에 놓인 극빈층 아이들의 생명을 살리는 것. 한글을 깨친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주는 것이 아니라 한글도 깨치지 못한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것. 삶의 최전방에서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최소한의 즐거움조차 모르고 떠나는 아이들을 줄여나가는 것. 그것이 진정 가치 있는, 아니 가장 시급한 나눔의 조건이다.
인터뷰 말미에 그는 얼마 전 있었던 북한 아이들 돕기에 대해 설명했다. 북한은 이맘때(춘궁기)쯤이면 굶어 죽는 사람들이 발생하지만 북한 지도부에서 도움받는 것이 창피해 외부 지원 자체를 거절한다고. 조인투게더(JTS)는 오랜 시간 그들을 설득해 지난 4월 6일 구호 물품을 보내는 데 성공했다.
“밀가루, 두유, 이유식, 기저귀, 신장계, 체중계 같은 물자를 실은 컨테이너 박스가 떠나는데 눈물이 핑 돌더라고요. 북한 아이들이 저 구호 물품을 받으면 기분이 어떨까? 내가 동회에서 밀가루 받아 오던 날처럼 콧노래를 부르겠지? 제가 그 마음을 아는데, 사는 동안 어떻게 그들을 외면할 수 있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