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배부르게 한 것들은 나를 파괴한다 안젤리나 졸리에게 불우한 어린 시절이 없었다면 그가 이 시대 최고의 영향력을 지닌 명사로 군림할 수 있었을까. 안젤리나 졸리는 보통 아이들과는 달랐다. 또래 아이들이 강아지를 사달라고 조를 때 그녀는 뱀을 키웠다. 죽음의 이미지에 매료되어 장의사나 흡혈귀가 되고 싶다는 엉뚱한 꿈을 꾸었고,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내고 자살을 시도하며 10대를 보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를 성공시킨 자양분 또한 어두운 과거에 있다. 방황과 일탈을 통해 그녀는 삶에 무엇이 중요한지, 자신을 어떻게 변화시켜야 하는지 정확히 알게 됐다. 또 이러한 경험들은 고스란히 연기에 녹아들어 그를 거칠지만 아름다운 빛을 내는 보석으로 만들어주었다.
그의 내면을 단단하게 만든 또 하나의 사건은 부모로부터의 독립이었다. 졸리에겐 결혼과 이혼을 수없이 반복한 아버지가 있다(졸리 자신도 두 번의 이혼을 겪었다). 유명 배우 존 보이트. 그가 아버지의 후광을 누리기로 마음먹었다면 할리우드 키즈로 화려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졸리는 자신의 이름에서 아버지의 성을 떼어냈다. 그리고 어머니 마르셀린 베르트랑을 따라 전 세계를 떠돌며 자신의 근원을 찾아 헤맸다. 영국에 머물던 시절엔 모델을 꿈꾸며 수없이 오디션을 보러 다녔다. 그러나 독일계 아버지와 프렌치 인디언의 피가 흐르는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독특한 외모는 콤플렉스로 작용할 뿐이었고, 그는 어린 나이에 쓰디쓴 패배의 경험을 맛봐야 했다.
당시 인생에 대해 열렬히 고민했던 졸리는 자신의 등줄기에 이런 구절의 문신을 새겨 넣었다. “나를 배부르게 한 것들은 나를 파괴한다.” 강렬한 자기반성이자 스스로를 채찍질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졸리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아주 천천히, 그리고 빠르게 주류를 장악했다.
결혼이 행복의 해법은 아니다 14세 때부터 남자 친구와 한방에 살았을 정도로 과감한 연애 편력을 가진 안젤리나 졸리는 스스로 바이섹슈얼임을 주장할 정도로 자유로운 연애관을 가졌다. 어떤 연애이든 한번 사랑을 하면 열렬히 빠져드는 그는 첫 번째 남편 조니 리 밀러와의 결혼식에서 각자의 피로 쓴 문구를 새긴 티셔츠를 입고 입장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밀러는 졸리의 흥행작이기도 한 <툼 레이더> 게임에 빠져 졸리를 나 몰라라 했고, 둘은 이혼했다. 아픔을 딛고 만난 두 번째 남편 빌리 밥 손턴은 그에게 최고의 남자였다. 자신의 팔뚝에 ‘Billy Bob’이라는 문신까지 새겨 넣을 정도로. 졸리는 이번에도 손턴의 피를 병에 담아 목에 걸고 결혼식장에 들어가는 기괴한 의식을 치렀다. 하지만 그의 두 번째 결혼 역시 손턴이 음악에만 빠져 가정을 돌보지 않는다는 이유로 막을 내렸다.
두 번의 이혼을 거치면서 졸리는 할리우드 최고의 가십 걸이 되었다. 대중과 언론은 연이어 깨진 결혼에만 주목했을 뿐 그의 내면에 뜨겁게 흐르는 가족애나 모성애는 조명하지 않았다. 언론의 속성을 잘 알고 있는 졸리는 세상을 조롱하듯 당당하게 외쳤다. “이제 다시는 결혼하지 않겠다.” 그 선언 이후 졸리가 보여준 브래드 피트와의 연애와 동거, 입양과 출산은 시사하는 바가 컸다. 그는 할리우드 최고의 화제남 브래드 피트와 동거 형태의 결혼 생활을 하며 첫 딸 샤일로와 쌍둥이 남매를 낳았고, 전남편 손턴과 입양한 캄보디아 남자아이 매덕스와 에티오피아에서 입양한 자하라를 함께 키워냈다. 어딜 가나 사랑하는 남편과 아이들을 대동하고 다녔고 ‘브렌젤리나’ 가족은 행복과 풍요, 다국적 가정의 상징이 되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그가 이끈 가족의 형태가 결혼이라는 틀에 구속되지 않았음에도 충분히 아름답고 온전해 보인다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자신을 조롱한 언론에 대한 통쾌한 역공이었고, 이 땅의 모든 여성들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내 위치를 최대한 이용해 좋은 일을 하라 안젤리나 졸리는 영화 <툼 레이더> 촬영을 계기로 캄보디아 국민들의 고통을 알았고 정치적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는 배우로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유엔에 직접 전화를 걸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묻기도 했다. 그 일을 계기로 유엔의 봉사 활동에 참여하게 된 졸리는 마침내 유엔 친선 대사가 되었고, 가난한 나라의 아이들을 입양하는 자애로운 어머니로 변화해갔다. 졸리가 최초로 입양을 결심한 건 영화 <툼 레이더>의 촬영지인 캄보디아에서였다. 말라리아 약을 복용하고 트레일러에서 모기를 피하면서도 그는 캄보디아의 묘한 매력에 푹 빠져 지냈다. 야생의 기질이 농후하고 종교적이고 신비한 것에 강하게 이끌리는 그에게 앙코르와트는 마치 놀이터 같았다. 영화 촬영을 마치고 앙코르와트 일대를 여행하던 도중 만난 캄보디아 남자아이에게 단번에 사랑을 느낀 것은 아마도 필연이리라.
그는 당시 남편이었던 빌리 밥 손턴과 상의해 입양을 결정했고, 아이에게 매덕스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매덕스를 입양함과 동시에 자체 발족한 환경 운동 단체 ‘캄보디아 발전 비전(Cambodian Vision in Development, CBD)을 통해 그는 캄보디아 국민을 돕는 다양한 형태의 자선 활동을 펼쳤다. 자선 파티를 주선해 150만 달러 이상의 기금을 마련하고, 그 돈을 이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환경보호 의식 고취 교육과 산림 감시원 양성 등에 사용했다. 단순히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보다는 지속 가능한 발전과 나눔을 위해 노력한 것이다. 그는 유엔의 친선 대사로서 헌신적으로 활동한 것을 인정받아 유엔기자협회에서 수여하는 ‘세계시민상’과 미국 유엔협회에서 수여하는 ‘세계인도주의자상’을 수상했고, 2008년 미국 경제지 <포브스>가 발표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3위에 올랐으며, 현재까지도 수입의 3분의 1을 자선 사업에 기부하고 있다.
남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라 여섯 아이의 엄마로, 할리우드 최고의 배우로, 유엔이 임명한 친선 대사로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하는 안젤리나 졸리에게 어느 기자가 물었다. “당신에게 영화는 어떤 존재인가요?”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영화를 사랑하지만 평생 연기를 하고 싶진 않아요. 내 삶은 내가 연기하는 어떤 역할보다 더 충만하거든요.” “만약 연기를 그만두게 됐을 때 무엇이 되고 싶은가요?”라는 질문에 졸리는 엄마와 비행사가 되겠다고 대답했다. 사실 그는 이미 다국적을 가진 여섯 아이의 엄마이고, 전용 비행기를 조종할 수 있는 자격증까지 갖춘 전문 비행사다. 할리우드 최고의 가십 걸로 살아가면서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가치 있는 일들을 완벽하게 이루고 사는 여자. 우리가 그에게 배워야 할 점은 바로 ‘삶의 열정’ 아닐까.
뉴욕 대학에서 연기를 공부한 후 연극 무대를 전전하던 안젤리나 졸리는 1993년 B급 영화 <사이보그 2>(1993)의 주연을 맡으면서 배우 생활에 입문한다. 할리우드 데뷔작이자 첫 번째 남편 조니 리 밀러와 함께 출연한 <해커스>(1995)를 거쳐 에이즈로 세상을 떠난 전설의 모델 지아 마리 카란지의 일생을 그린 영화 <지아>(1998)를 통해 에미상 여우조연상에 노미네이트됐다. 이후 <본 콜렉터>(1999), <처음 만나는 자유>(1999) 등 개성 강한 캐릭터로 연기력을 인정받은 그는 최고의 흥행작 <툼 레이더>(2001)를 만나면서 명실공히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배우로 자리매김한다. 그리고 최근작 <체인질링>(2008)을 통해 여섯 아이의 엄마로서 농익은 연기를 선보였다.
그의 내면을 단단하게 만든 또 하나의 사건은 부모로부터의 독립이었다. 졸리에겐 결혼과 이혼을 수없이 반복한 아버지가 있다(졸리 자신도 두 번의 이혼을 겪었다). 유명 배우 존 보이트. 그가 아버지의 후광을 누리기로 마음먹었다면 할리우드 키즈로 화려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졸리는 자신의 이름에서 아버지의 성을 떼어냈다. 그리고 어머니 마르셀린 베르트랑을 따라 전 세계를 떠돌며 자신의 근원을 찾아 헤맸다. 영국에 머물던 시절엔 모델을 꿈꾸며 수없이 오디션을 보러 다녔다. 그러나 독일계 아버지와 프렌치 인디언의 피가 흐르는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독특한 외모는 콤플렉스로 작용할 뿐이었고, 그는 어린 나이에 쓰디쓴 패배의 경험을 맛봐야 했다.
당시 인생에 대해 열렬히 고민했던 졸리는 자신의 등줄기에 이런 구절의 문신을 새겨 넣었다. “나를 배부르게 한 것들은 나를 파괴한다.” 강렬한 자기반성이자 스스로를 채찍질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졸리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아주 천천히, 그리고 빠르게 주류를 장악했다.
결혼이 행복의 해법은 아니다 14세 때부터 남자 친구와 한방에 살았을 정도로 과감한 연애 편력을 가진 안젤리나 졸리는 스스로 바이섹슈얼임을 주장할 정도로 자유로운 연애관을 가졌다. 어떤 연애이든 한번 사랑을 하면 열렬히 빠져드는 그는 첫 번째 남편 조니 리 밀러와의 결혼식에서 각자의 피로 쓴 문구를 새긴 티셔츠를 입고 입장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밀러는 졸리의 흥행작이기도 한 <툼 레이더> 게임에 빠져 졸리를 나 몰라라 했고, 둘은 이혼했다. 아픔을 딛고 만난 두 번째 남편 빌리 밥 손턴은 그에게 최고의 남자였다. 자신의 팔뚝에 ‘Billy Bob’이라는 문신까지 새겨 넣을 정도로. 졸리는 이번에도 손턴의 피를 병에 담아 목에 걸고 결혼식장에 들어가는 기괴한 의식을 치렀다. 하지만 그의 두 번째 결혼 역시 손턴이 음악에만 빠져 가정을 돌보지 않는다는 이유로 막을 내렸다.
두 번의 이혼을 거치면서 졸리는 할리우드 최고의 가십 걸이 되었다. 대중과 언론은 연이어 깨진 결혼에만 주목했을 뿐 그의 내면에 뜨겁게 흐르는 가족애나 모성애는 조명하지 않았다. 언론의 속성을 잘 알고 있는 졸리는 세상을 조롱하듯 당당하게 외쳤다. “이제 다시는 결혼하지 않겠다.” 그 선언 이후 졸리가 보여준 브래드 피트와의 연애와 동거, 입양과 출산은 시사하는 바가 컸다. 그는 할리우드 최고의 화제남 브래드 피트와 동거 형태의 결혼 생활을 하며 첫 딸 샤일로와 쌍둥이 남매를 낳았고, 전남편 손턴과 입양한 캄보디아 남자아이 매덕스와 에티오피아에서 입양한 자하라를 함께 키워냈다. 어딜 가나 사랑하는 남편과 아이들을 대동하고 다녔고 ‘브렌젤리나’ 가족은 행복과 풍요, 다국적 가정의 상징이 되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그가 이끈 가족의 형태가 결혼이라는 틀에 구속되지 않았음에도 충분히 아름답고 온전해 보인다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자신을 조롱한 언론에 대한 통쾌한 역공이었고, 이 땅의 모든 여성들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내 위치를 최대한 이용해 좋은 일을 하라 안젤리나 졸리는 영화 <툼 레이더> 촬영을 계기로 캄보디아 국민들의 고통을 알았고 정치적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는 배우로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유엔에 직접 전화를 걸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묻기도 했다. 그 일을 계기로 유엔의 봉사 활동에 참여하게 된 졸리는 마침내 유엔 친선 대사가 되었고, 가난한 나라의 아이들을 입양하는 자애로운 어머니로 변화해갔다. 졸리가 최초로 입양을 결심한 건 영화 <툼 레이더>의 촬영지인 캄보디아에서였다. 말라리아 약을 복용하고 트레일러에서 모기를 피하면서도 그는 캄보디아의 묘한 매력에 푹 빠져 지냈다. 야생의 기질이 농후하고 종교적이고 신비한 것에 강하게 이끌리는 그에게 앙코르와트는 마치 놀이터 같았다. 영화 촬영을 마치고 앙코르와트 일대를 여행하던 도중 만난 캄보디아 남자아이에게 단번에 사랑을 느낀 것은 아마도 필연이리라.
그는 당시 남편이었던 빌리 밥 손턴과 상의해 입양을 결정했고, 아이에게 매덕스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매덕스를 입양함과 동시에 자체 발족한 환경 운동 단체 ‘캄보디아 발전 비전(Cambodian Vision in Development, CBD)을 통해 그는 캄보디아 국민을 돕는 다양한 형태의 자선 활동을 펼쳤다. 자선 파티를 주선해 150만 달러 이상의 기금을 마련하고, 그 돈을 이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환경보호 의식 고취 교육과 산림 감시원 양성 등에 사용했다. 단순히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보다는 지속 가능한 발전과 나눔을 위해 노력한 것이다. 그는 유엔의 친선 대사로서 헌신적으로 활동한 것을 인정받아 유엔기자협회에서 수여하는 ‘세계시민상’과 미국 유엔협회에서 수여하는 ‘세계인도주의자상’을 수상했고, 2008년 미국 경제지 <포브스>가 발표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3위에 올랐으며, 현재까지도 수입의 3분의 1을 자선 사업에 기부하고 있다.
남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라 여섯 아이의 엄마로, 할리우드 최고의 배우로, 유엔이 임명한 친선 대사로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하는 안젤리나 졸리에게 어느 기자가 물었다. “당신에게 영화는 어떤 존재인가요?”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영화를 사랑하지만 평생 연기를 하고 싶진 않아요. 내 삶은 내가 연기하는 어떤 역할보다 더 충만하거든요.” “만약 연기를 그만두게 됐을 때 무엇이 되고 싶은가요?”라는 질문에 졸리는 엄마와 비행사가 되겠다고 대답했다. 사실 그는 이미 다국적을 가진 여섯 아이의 엄마이고, 전용 비행기를 조종할 수 있는 자격증까지 갖춘 전문 비행사다. 할리우드 최고의 가십 걸로 살아가면서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가치 있는 일들을 완벽하게 이루고 사는 여자. 우리가 그에게 배워야 할 점은 바로 ‘삶의 열정’ 아닐까.
뉴욕 대학에서 연기를 공부한 후 연극 무대를 전전하던 안젤리나 졸리는 1993년 B급 영화 <사이보그 2>(1993)의 주연을 맡으면서 배우 생활에 입문한다. 할리우드 데뷔작이자 첫 번째 남편 조니 리 밀러와 함께 출연한 <해커스>(1995)를 거쳐 에이즈로 세상을 떠난 전설의 모델 지아 마리 카란지의 일생을 그린 영화 <지아>(1998)를 통해 에미상 여우조연상에 노미네이트됐다. 이후 <본 콜렉터>(1999), <처음 만나는 자유>(1999) 등 개성 강한 캐릭터로 연기력을 인정받은 그는 최고의 흥행작 <툼 레이더>(2001)를 만나면서 명실공히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배우로 자리매김한다. 그리고 최근작 <체인질링>(2008)을 통해 여섯 아이의 엄마로서 농익은 연기를 선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