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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컬렉터를 찾아서] 최초 공개, 컬렉터 라울 라 로슈의 '라 로슈 빌라' 르코르뷔지에의 키다리 아저씨가 이 집에 살았다
재무 전문가 라울 라 로슈와 그의 괴팍한 친구이자 건축가 르코르뷔지에가 함께 만든 합작품이 ‘라 로슈 빌라’다. 집주인은 라 로슈였지만 르코르뷔지에가 그림 위치까지 지정하고 관리한 이 빌라에는 그들의 묘한 우정 이야기가 담겨 있다. 르코르뷔지에가 직접 짓고 거주한 ‘몰리토르 아파트’도 최초 공개한다. 프랑스 매체에도 공개된 적 없는 이 빌라에는 세간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위대한 건축가와 그보다 더 위대한 건축주가 남긴 비밀의 집 두 채.


라 로슈 빌라의 갤러리. ‘컬렉터의 집’이라는 이름으로 콘셉트를 잡아 지은 빌라인 만큼 라 로슈가 소장한 그림을 걸기 위해 지은 이 갤러리는 빌라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이다. 통상적으로 갤러리라 하면 연상되는 하얀 벽과 사각형 공간에서 벗어난 상상력이 돋보인다. 르코르뷔지에는 큐비즘 미술의 특징인 기하학적인 조형성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이러한 공간을 구상했다. 풍부한 빛과 그림자가 공간에 또 다른 그림을 그리는 서정성이 눈길을 사로잡는 아름다운 공간이다. 르코르뷔지에는 라 로슈 빌라를 위해 다양한 색채를 손수 조색했을 뿐 아니라 L/C 의자 시리즈라고 부르는 여러 의자를 디자인하기도 했다. 벽면에 붙어 있는 전구를 이용한 조명등은 요즘 디자이너의 것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현대적인데, 이 조명 역시 르코르뷔지에의 작품이다.


1 개인 사진을 거의 남기지 않은 그림자 같은 컬렉터 라울 라 로슈.
2 건축가로서도 유명했지만 개성 있는 스타일로도 유명했던 르코르뷔지에.


‘저 집에 살면 어떤 기분일까?’ 지나칠 때마다 동경의 마음으로 기웃거린 집이 있다. 그 집에서라면 하늘도 다르게 보일 것 같은 하얀 집. 햇볕이 들면 벽면에 그림자 그림이 한가득 그려지는 서정적인 집이었다. 라 로슈 빌라 Villas La Roche라는 명패가 달린 그 집의 주인은 작고한 컬렉터라고 했다. 사실 그 집은 라 로슈라는 집주인보다 집을 지은 건축가 르코르뷔지에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곳이었다. 그러나 건축사 책을 도배하는 르코르뷔지에보다 그 집에서 큰 유리창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을 라 로슈, 그가 더 궁금했다.
파블로 피카소 Pablo Picasso, 조르주 브라크 Georges Braque, 페르낭 레제 Fernand Leger, 후안 그리스 Juan Gris, 자크 립시츠 Jacques Lipchitz…. 한때 그 집주인이 집 안에 걸어놓고 밤낮으로 바라보았다는 그의 컬렉션 리스트를 접했을 때 의문은 더욱 커졌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컬렉터는 죽어서 컬렉션과 그 이름을 남기는 법인데, 어찌 된 일인지 이 남자는 자기가 살던 집에 명패 하나만 남겼을 뿐이다. 그가 수집한 큐비즘 미술의 보석 같은 작품들은 그의 사후 전 세계 박물관으로 흩어져, 라 로슈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이가 더욱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키다리 아저씨 같은 컬렉터였을까? 그림자로만 자신을 알리며 결정적 순간에만 모습을 드러내는 키다리 아저씨 말이다. 그와 르코르뷔지에는 대체 어떤 관계였을까?


3 과거의 빌라 라 로슈의 갤러리 풍경, 페르낭 레제, 피카소 등 라 로슈의 컬렉션이던 큐비즘 계열의 유수한 작품들이 걸려 있다.

1889년 바젤에서 출생한 라울 라 로슈는 역사에 길이 남을 컬렉터가 되기에는 너무나 온건한, 소위 말해 ‘재미없는’ 인물이었다. 스위스에서 상업학교를 졸업하고 파리의 상업은행에서 근무하면서 착실하게 재산을 모은 인물이다. 당시 세계 금융과 사업의 중심지인 파리로 입성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실력 있는 재무 전문가였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귀족인 부모에게 큰 재산을 물려받은 것도 아니요, 사업을 일궈 성공한 입지전적 인물도 아닌 데다 스캔들도 없었으니 이야깃거리가 되는 컬렉터는 아니다. 1912년에 입사한 회사를 은퇴할 때까지 42년이나 다녔다니, 그 사실만으로도 조용하고 침착한 성정을 짐작할 수 있다.
라 로슈가 르코르뷔지에를 만난 것은 1918년, 스위스를 떠나 막 파리에서 자리 잡고 취미 삼아 그림 몇 점 사볼까 화랑을 기웃거리던 무렵이다. 엘리트라면 미술 작품 몇 점쯤은 사두어야 파티 때 체면치레를 할 수 있다고 여기던 시절이었으니 그가 특별히 미술에 관심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당시 르코르뷔지에는 막 건축 사무실을 연 풋내기 건축가였다. 타지에서 만난 동향인만큼 반가운 이가 없다고, 둘 다 스위스 북쪽 태생이라는 이유만으로 쉽게 친해졌다.
보수적인 금융계에 종사하던 라 로슈에게 르코르뷔지에는 신선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르코르뷔지에는 새로운 시대를 주창하는 건축가답게 여행도 많이 다닌 데다 괴짜 친구들이 많았다. 프랑스 화단의 이단아 아메데 오장팡 Ame′de′e Ozenfant, 가장 컨템퍼러리한 갤러리를 운영하면서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 거래를 도맡은 로젠버그 Rosenberg 등 르코르뷔지에 주위에는 난다 긴다 하는 미술계 인사가 많았다. 어찌 보면 라 로슈에게 르코르뷔지에는 미술 과외 선생이었다. 그림이라면 루브르 박물관의 고전주의 작품만 떠올리는 라 로슈의 취향을 르코르뷔지에가 바꿔놓았다. 라 로슈는 서서히 세잔, 쇠라 등 인상파 화가의 작품부터 1920년대를 좌지우지한 큐비즘 작품까지 눈을 돌렸으니 아주 착실한 학생인 셈이었다. 때로 피카소 작품보다 르코르뷔지에 작품을 더 비싼 가격에 사들이고도 불평이 없을 만큼 그는 르코르뷔지에가 만들어낸 컬렉터였다. 라 로슈는 점차 르코르뷔지에의 후원자가 되었다. 르코르뷔지에가 편집장을 맡은 잡지 <에스프리 누보 L’Esprit Nouveau>를 후원했고, 건물을 지을 만한 여력이 되는 유력자들을 소개해주었다.


1 라 로슈의 서재에서는 유리창을 통해 바로 아래 갤러리가 훤히 내다보인다. 고개를 들면 천창을 통해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서재로 르코르뷔지에 특유의 색채 감각이 돋보이는 공간이다.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르코르뷔지에는 색채로 공간을 분할하는 아이디어를 큐비즘 미술에서 얻었다고 한다.


2 갤러리와 식당 사이의 벽에는 기하학적 유리창이 벽 전면을 뒤덮고 있다. 보수적인 당시의 건축관으로는 상상도 하지 못할 파격이었는데, 아직 집에 통창을 달기에는 단열 기술이 모자랐던 탓에 엄청나게 추운 집을 만들어낸 원인이 되기도 했다.
3 창밖의 풍경이 그림처럼 실내를 압도하는 식당. 빌라 라 로슈 바로 앞에는 마로니에를 비롯한 다양한 수종의 나무 정원이 있는데 르코르뷔지에는 직접 수종까지 지정했다. 창밖에 보이는 풍경까지 디자인한 완벽성!


1923년 르코르뷔지에는 오랜 협상 끝에 라 로슈 빌라가 있는 파리 16구의 땅을 라 로슈의 자금으로 구입했다. 말하자면 라 로슈가 살 곳을 르코르뷔지에가 지정해준 셈이다. 1925년 드디어 공사가 끝난 라 로슈 빌라는 르코르뷔지에가 추구하는 건축의 이상형을 보여주는 기념비적 건축물이었다. ‘컬렉터의 집’이라는 이름이 붙은 라 로슈의 집은 하나부터 열까지 새로웠다. 집을 짓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세워야 하는 기둥을 온갖 장식으로 감추는 당시의 건축 방식과는 달리, 르코르뷔지에는 기둥을 보여주기 위해 집 한쪽 면을 기둥 위로 올려 짓는 혁신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마당이 아닌 지붕 위에 정원을 꾸몄을 뿐 아니라 단출한 쇠창살만으로 유리창을 냈다(화려한 장식으로 유리창을 치장한 유행과는 달리!). 계단과 복도를 이용해 분리한 일체형 큰 공간은 당시엔 상상할 수도 없는 발상이었다. 르코르뷔지에는 그림을 걸 위치, 페인트 조색까지 지정해 직접 관리했다. 그러니까 라 로슈 빌라는 바닥부터 천장까지 모든 게 르코르뷔지에의 작품인 것이다.
그러나 ‘작품’ 안에 들어가서 살아야 하는 라 로슈의 입장에서 이 빌라는 결코 살기 편한 곳이 아니었다. 보통 건축가라면 건축주의 눈치를 보게 마련이다. 하지만 애당초 르코르뷔지에는 라 로슈의 의견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손님을 초대하는 일이 잦으니 식당이 넓었으면 좋겠다’ ‘그림을 걸어야 하니 빛이 풍부한 공간을 갤러리로 쓰고 싶다’ ‘침실은 넉넉한 크기여야 한다’…. 건축주로서는 소심해 보이기까지 하는 단출한 요구 사항을 르코르뷔지에는 무 자르듯 잘랐다.

르코르뷔지에에게 보낸 라 로슈의 편지는 눈물겹다 못해 코믹하기까지 하다. ‘전구 몇 개만 설치한 갤러리는 너무 어두워 밤에는 책조차 읽을 수가 없다’ ‘공간의 아름다움을 위해 라디에이터를 너무 적게 설치해 추워서 겨울을 날 수가 없다’ 등등. 엄청난 돈을 들여 집을 지었음에도 라 로슈의 침실에는 달랑 간이침대 하나가 놓여 있을 뿐이었다. 식당은 또 어떤가? 크기가 너무 작아 파티조차 열 수 없고, 바닥을 온통 타일로 마감한 탓에 미끄러지기 일쑤였다. 이쯤 되면 편지를 읽는 사람도 답답해진다. 그렇다면 직접 조명등을 설치하고 난방 장치를 들여놓을 수도 있었을 텐데 라 로슈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니 감히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하는 게 맞겠다. 그에게도 이 집은 마음대로 손댈 수 있는 자기 집이 아니라 위대한 건축가가 지은 전무후무한 작품이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그림을 옮겨 거는 것까지 르코르뷔지에에게 의견을 물었던 라 로슈는 8년 동안 르코르뷔지에를 조른 끝에 결국 약간의 레노베이션을 하는 데 성공했다. 그랬는데도 결국 너무 추워서 스위스의 본가에서 매해 겨울을 보내야 했다.

1 르코르뷔지에의 아파트에는 빌라 라 로슈에서 보여준 르코르뷔지에 건축의 기본 원칙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 시대 다른 어떤 건물에서도 보기 어려웠던 자유로운 공간 구성, 다양한 색채의 조합, 실용성을 우선으로 한 간결한 공간 등 평생 르코르뷔지에가 추구한 건축 이념이 작은 가구 하나에까지 구현되어 있다. 특히 L/C 의자 시리즈 중 하나인 가죽 소파는 이 아파트에서 구상한 것으로 현재 사진에서 보이는 의자가 최초의 모델이다.


2 르코르뷔지에의 작업실. 거장 건축가답지 않게 작고 소박한 작업실이다. 손수 디자인한 책상과 평생 그가 애호한 토네 Thonet의 의자가 잘 어울린다.
3 지붕 밑 다락방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르코르뷔지에 아파트의 상징이나 마찬가지다. 그의 아파트는 라 로슈 빌라와는 달리 원색을 많이 사용했다.


이쯤 되면 라 로슈와 르코르뷔지에의 관계가 이상하게 여겨질 지경이다. 라 로슈는 불평을 터뜨리면서도 빌라를 팔거나 개축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르코르뷔지에와 친분을 평생 이어나갔으며, 그가 유명해진 뒤에도 충실한 후원자로 남았다. ‘왜 그랬을까?’라는 의문은 빌라 라 로슈에서 멀지 않은 르코르뷔지에의 아파트를 방문하면서 풀렸다. 평생 세계만방을 오가며 인도, 일본, 브라질에까지 작품을 남긴 르코르뷔지에는 파리의 몰리토르 건물(자신이 직접 지은) 꼭대기 층을 아틀리에 겸 집으로 사용했다. 르코르뷔지에라는 대단한 건축가의 이름을 생각하면 참으로 간소한 집이다. 80평에 달하는 공간이지만 바로 지붕 밑에 있는 터라 계단과 복도가 많아서 넓어 보이지 않는다. 화가이기도 했던 르코르뷔지에의 공간답게 아틀리에가 가장 크다. 간소하고 기능적인 침실, 제자이자 동료인 샤를로트 페리앙 Charlotte Perriand이 직접 설계한 부엌, 건축 지망생들에게 빌려주기도 한 손님방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완벽주의자로 유명한 건축가답게 사소한 생활용품 하나에까지 그의 손길이 느껴진다. 아직까지도 디자인 컬렉터들이 가장 갖고 싶어 하는 가구인 르코르뷔지에의 L/C 의자 시리즈, 샤를로트 페리앙과 함께 작업한 의자, 문과 합체된 기능적인 붙박이 가구, 색채로 공간을 분할하는 색채 감각 등 그가 건축가로서 평생을 다해 추구한 이념이 고스란히 담긴 집이다.


르코르뷔지에가 직접 그림을 그리던 아틀리에는 기능적이고 소박한 공간이다. 직사광선을 피하기 위해 이중 유리로 만든 블록으로 창을 대신한 덕분에 부드러운 빛이 공간 전체에 메아리 친다.

라 로슈는 평생 르코르뷔지에와 가까이 지냈지만 작업 이념을 함께하는 동료들을 먼저 챙기던 르코르뷔지에에게는 ‘나의 부자 친구’ 정도로만 남았다. 동질감을 느끼며 서로를 바라보기에는 인생의 길과 그릇이 너무 달랐다. 그런 라 로슈가 르코르뷔지에의 건축 이념과 인생을 이해하게 된 것은 르코르뷔지에의 아파트를 방문하면서부터라고 한다. “당신과 당신의 컬렉션을 위해 이보다 나은 집은 없습니다”라는 건방진 말을 서슴지 않던 건축가, 건축 직후부터 무려 8년 동안 수많은 편지와 불평에도 건축주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은 건축가, 그림을 옮겨 걸기만 해도 본인의 작품이 망가진다고 생각한 완벽주의적인 건축가의 후원자로, 친구로 머물 수 있었던 것은 소품 하나부터 생활 전체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신념에 충실한 인생을 산 한 인간에 대한 존경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인복이 복 중 최고라고 했던가? 라 로슈에게 르코르뷔지에는 컬렉터로서 시대를 호흡할 수 있도록 해준 선생님이자 위대한 건축가였으며 친구였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까지 르코르뷔지에에게 최대의 예의와 경의를 표했다. 사후 그의 빌라를 비롯한 컬렉션을 모두 르코르뷔지에 재단에 기증한 것이다. 끝까지 르코르뷔지에의 이름 뒤에 남고자 한 소심한 컬렉터 라울 라 로슈가 요란하게 이름을 떨친 여타의 컬렉터보다 귀하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이름을 알리지 못해 안달하는 세상에서 그는 르코르뷔지에의 키다리 아저씨로 남았으니 말이다.

1 르코르뷔지에가 사용한 침대는 바닥에서 한 길 높이 정도 떨어져 있는데 창밖의 풍경을 보면서 자기 위해 바깥 테라스 창턱에 눈높이를 맞춰놓았다고 한다. 화장실과 세면대, 샤워실이 침실과 오픈된 공간으로 이어진 구조는 요즘에도 보기 드문 파격적인 구성이다.


2 기능성을 강조한 르코르뷔지에와 가구의 재료가 되는 나무의 형태, 색채를 최대한 공간에 반영하려 한 사를로트 페리앙드의 이념이 느껴지는 공간이다. 기능성이 돋보이는 붙박이 가구가 많지만 기품이 느껴지는 것은 일반 붙박이 가구와는 달리 통나무의 형태와 색을 고스란히 보존해 디자인했기 때문.
3 제자이자 동료인 샤를로트 페리앙이 르코르뷔지에를 위해 디자인한 부엌 가구. 샤를로트 페리앙이 디자인한 유일한 부엌 가구이기도 하다. 간결함과 기능성이 특징이다.


Villa La Roche 위치 8-10 square du docteur blanche 75016 paris 문의 01 42 88 33 17
Immeuble Molitor, l’appartement de Le Corbusier 위치 24 rue nungesser 75016 paris 문의 01 46 03 32 90. 예약을 통해서 토요일 오전에만 방문이 가능한 곳이므로 홈페이지(www.fondationlecorbusier.fr)를 참조하는 것이 좋다. 이 밖에 르코르뷔지에 재단에서는 르코르뷔지에가 남긴 건축물에 대한 연구서와 친필로 쓴 이론서를 비롯한 다양한 자료를 보유하고 있으므로 르코르뷔지에에 대해 좀 더 깊이 알고 싶다면 꼭 방문해보기를 권한다.

르코르뷔지에 Le Corbusier(1887~1965). 스위스 태생의 프랑스 건축가이자 도시 계획가, 화가, 조각가, 가구 디자이너. 미술학교에서 공부했으나, 건축 공부는 거의 독학으로 했다. 1920년대에 시작한 국제주의 건축의 1세대로 ‘집은 살기 위한 기계’라는 신조를 가지고 있었다. 구조와 상관없는 정교한 장식과 과거의 양식에 맞서 싸웠으며, 기능주의를 옹호했다. 요즘의 건축가들에겐 혐오의 대상인 동시에 대부분의 신혼부부에겐 선망의 대상이기도 한 아파트, 바로 그것이 르코르뷔지에의 창작품이다. 합리주의 건축 양식과 서양의 고전주의 미학을 조화시켜, 철근 콘크리트 건축의 새로운 세계를 개척한 점에서 그의 위대성은 칭송받고 있다. 한국인 제자로 김중업이 있다.


최혜경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0년 4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