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소 아내의 대화 신청에 귀 먹고 입 막힌 시늉으로 일관하던 남편은 사안이 심각해지자 본 필자를 변호인으로 선임한다. 하여 본 변호인, 홀아비 마음 홀아비가 안다는(과부 마음인가? 아무튼) 심정으로 변론을 시작한다. 방청객, 경청하도록.
원고의 주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놀려면 같이 놀고, 그러지 않으려면 적당히 놀아라.’ 먼저, 취미 생활을 같이 하자는 원고 측 주장에 대한 피고의 항변이다. 아무래도 이 부부, ‘쓰리랑 부부’인 것 같다. “여보 여보 벗님네들, 이 내 말 좀 들어보소. 이제 와서 혼자 논다 쌍심지에 난리지만 처음에는 암수 한 쌍, 산과 들을 함께했소. 산 입구를 벗어날 때 힘들다고 투정하고, 내려올 산 왜 오르느냐 쉬지 않고 투덜대고, 업어달라 잡아달라 징징댄 건 누구였소? 저 푸른 초원 위에서 나이스 샷을 외치고자 비싸다는 골프도 님과 함께 시작했소. 명품 숍 골프 쇼핑 싹쓸이하던 그 열정은 연습장 3일 만에 재미없다 포기하고 애꿎은 남편 연봉 짜네 적네 구박이니, 뭐 하나 밀며 끌며 함께할 게 무엇이오?”
아아, 눈물이 앞을 가려 변론을 못하겠다. 그러나 오해는 마시라. 취미 활동에서 남성 동지가 여성 동지에 비해 진득하고 성실하며 참을성이 있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취미에 대한 관점과 자세가 남녀 간 다른 것은 취미와 관련한 부부 갈등의 핵심이지만, 이는 또한 당연한 것이다. 원시 시대부터 수컷들은 약육강식의 자연법칙에 길들여져 왔다. 약하면 잡아먹히는 것이고, 무리에서 도태되거나 강한 자의 ‘쫄개’가 되는 것이다. 스포츠는 문명의 포장을 했을 뿐, 원시의 룰이 그대로 적용된다. 동계올림픽에서 금ㆍ은ㆍ동메달의 시상대는 높이부터가 다르다. 수상자의 표정 또한 다르다. 운동경기에서 지는 자는 이기는 자의 암묵적 ‘꼬붕’으로 전락하는 것이고, 남자들은 그 수치와 모욕의 패배가 싫어서 취미라 불리는 모든 활동에도 죽어라 목숨을 거는 것이다. 골프에 입문했을 경우 사내들은 밥 먹을 때도 골프 생각, TV를 볼 때도 골프 채널, 버스를 기다리면서도 스윙 연습을 한다. 그 처절함 앞에서 “내가 좋아, 골프가 좋아?”라고 싸움 거는 아내는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이다. “그렇게 골프가 좋으면 골프랑 살아”라고 짜증내는 아내도 갈등 해법의 비밀번호를 잘못 입력하고 있는 것이다.
취미의 다양성도 같은 맥락이다. 남자 다섯이 술을 마시고, 2차로 당구를 치기로 했다고 하자. 이때 한 명이 미처 당구를 배우지 못했다면 분위기가 요상해진다. 네 명만 당구를 치면 한 명이 왕따가 되고, 한 명을 위해 네 명이 당구를 포기하면 다음부터 그 한 명은 술자리에서 시나브로 제외될 것이다. 남자는 다양한 잡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선수는 아니어도 남들만큼 해줘야 사회생활이 원만하다. “진득하게 한 가지도 못하면서 이것저것 건들기만 한다”며 남편을 닦달했다면, 어른들 말씀인“남자는 도둑질 빼놓고 다 해봐야 한다”는 경구를 되뇌어야 할 것이다.

두 번째, 놀아도 적당히 놀라는 것은 우리 남자들이 귀담아들어야 할 아내들의 지적이다. 과유불급 過猶不及, 무엇이든 과하면 탈이 난다. 취미는 삶의 윤활유요 부분이지 전체가 아니다. 모든 운동이 가진 중독성의 유혹을 스스로 견제하지 못할 때 그 사람은 몸 좋은 폐인이 된다. 또 하나. 우리끼리의 이야기지만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밖에서 신나게 놀고 왔으면 피곤하다는 말은 최소한 하지 말기로 하자. 축구장에서, 헬스장에서 힘 펄펄 쏟아내고 집에 와서는 여기가 아프네, 저기가 쑤시네 하며 죽는 시늉을 하는 거, 이거 부처님 마눌님도 열 받게 하는 짓이다. 그리고 취미 동우회에서 술 좀 적당히 드시라. 뒤풀이도 좋지만 적당히 빠져주면서 신비감을 조성할 때 당신도 살고, 가정도 산다.
이상 피고 측 변론을 마치며 독자 배심원 여러분의 현명하신 판결을 기대한다. 4주 후에 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