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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화 들여다보기]우리 혼례 풍습에 담긴 깊은 이야기 자고로 혼례는 저녁 5시에 치르는 것이 가장 길하므로

김중식, ‘온고지신’, 캔버스에 아크릴릭, 2008

옛날에는 혼인도 하기 전에 동침부터 했다 요즈음엔 결혼하지 않는 나홀로족 이야기가 특별하지도 않은 세상이다. 하지만 우리 조상들은 혼인을 인륜지대사라 하여 인생의 출발점으로 여겼기 때문에 혼례 때에는 벼슬아치들이나 입는 관복에 사모관대를 했다. 특히 혼례는 삼강의 근본이요, 인간 도리를 바로잡는 시초라 해 그 예를 매우 중요시했다. 따라서 혼례를 치르지 않으면 어른 취급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저승 갈 때 상여도 타지 못했다. 불효라 하여 제사 대상에서조차 제외되었다.
예전과 지금의 혼례는 차이가 많다. 지금이야 결혼식을 마치고 동침을 하지만 고려시대, 조선시대 전기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혼인 첫날 신랑이 종들을 데리고 저녁 무렵에 처가에 도착하면 진수성찬을 차려 사위와 함께 따라온 종들을 대접했다. 이어 신랑은 어떤 의식도 없이 바로 첫날밤 신부와 동침을 했다. 날이 밝으면 처가의 친척들과 신랑 친구, 하객들을 위해 잔치를 벌이는데, 이를 고려시대에는 남침 覽寢이라 했다. 셋째 날에 비로소 마당에 초례상을 차리고 신랑 신부가 정식으로 혼례식을 치르고 부부가 됐다.
요즘에는 결혼 후 여자가 남자 집으로 가서 사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다. 따로 살림을 차려 살지언정 처가로는 잘 들어가지 않는다. 옛말에 ‘겉보리 서 말만 있어도 처가살이 않는다’거나 ‘처가와 변소는 멀수록 좋다’고 한 것은 처가살이의 어려움을 빗댄 말이다.
하지만 고구려 사람들은 혼담이 성립되면, 여자 집에서는 자기 집 뒤에 서옥 壻屋이라는 작은 집을 지었다. 해 질 무렵 사위가 집 밖에서 이름을 대며 여자와 동숙할 것을 간청하면 부모가 그를 서옥으로 안내해 동숙하게 했다. 아울러 사위는 돈과 패물을 여자 집에 주고 자녀를 낳아 장성하면 비로소 처자를 데리고 본가로 갔다. 고구려의 이러한 풍속은 남자가 여자 집에 가서 혼인을 하고 얼마 동안 처가에서 사는 서유부가혼 壻留婦家婚 혹은 남귀여가 男歸女家 형식이다.
이 풍속은 고려에 와서도 처가에 머무는 기간만 조금 짧아졌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고려의 혼인 풍속은 남자와 별거를 할지언정 여자가 자기 집을 떠나지 않는 것이었다. 남자가 혼인하면 처가에서 생활하면서 자식을 낳았기 때문에 자연스레 아이들은 외가에 은의가 돈독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고려시대에는 외손봉사(직계비속이 없어 외손이 대신 제사를 받듦)가 당연했다. 또한 외조부모, 처부모가 돌아가시면 상복을 입고, 나라에서는 30일씩 휴가를 주어 장례를 치르도록 했다.

왜 혼례는 신부 집에서 했을까 우리나라는 중국과 반대로 삼국시대부터 여자 집에서 혼례를 치러왔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대부분 신부 집에서 혼례를 치렀다.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신부 집에서 예식 치르는 것을 두고 중국인의 웃음거리가 된다며 부끄럽게 여기기도 했다. 여자는 음이므로 양인 남자를 따르는 것이 떳떳한 예인데, 혼례를 신부 집에서 치르면 양이 음을 따르는 격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이유로 혼례를 신부 집에서 치른 것일까? <세종실록>에는 그 이유가 이렇게 적혀 있다. “세종께서 김종서에게 물었다. ‘(생략)태종 때 친영(신랑이 여자 집에 가 신부를 맞이해 와 남자 집에서 예식을 올리는 것)의 예를 실시하자는 의논이 있었으나, 어린 처녀도 모두 여자 집에서 혼례를 시킨 것은 남자 집에서 혼인을 행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 어려운 이유가 무엇인가?’ 김종서는 ‘우리나라의 풍속은 남자가 여자 집으로 가 혼례를 치르는 것의 유래가 오래되었습니다. 만일 여자가 남자 집으로 들어간다면 거기에 필요한 노비와 의복, 기구와 그릇 등을 모두 여자 집에서 바로 마련해야 되기 때문에, 그것이 곤란하여 어렵게 된 것입니다. 남자 집이 만일 부자라면 곧 신부를 접대하는 것이 어렵지 않겠지만, 가난한 사람은 부담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에 남자 집에서도 이를 꺼려왔습니다.’”(1430년 12월 22일 자 <세종실록> 중)
세종과 김종서의 대화에서 알 수 있듯 남자 집으로 가서 혼례를 치르면 신부를 보호해줄 몸종을 딸려 보내야 한다. 그뿐 아니라 거기에 필요한 의복, 기구와 그릇 등을 모두 여자 집에서 마련해야 하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상당히 부담이 컸다. 돈 없어 시집 못 간다는 말이 절로 나올 만도 하다. 반대로 신부 집에서 혼례를 치르면 신부의 혼수나 상속분을 혼례를 마친 후 서서히 마련해도 되지만, 친영제를 행하면 신랑 집에서 혼례를 치르고, 그곳에서 신접살림을 해야 하기 때문에 혼수나 딸의 상속분을 시급히 일시에 마련해야 하는 어려움이 따른다. 당시의 상속 제도는 아들딸 차별 없이 똑같이 나누어주는 남녀 균분 상속제를 시행했다.
이런 이유 외에도 신부 집에서 혼례를 치른 이유가 있었다. 요즘 같으면 예식장이라는 제3의 장소가 있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로선 딸을 남자 집에 보내 혼례를 치르게 한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어려웠다. 남자 집에서 혼례를 치르기 위해 수십 리를 가마를 타고 가다 보면 어느새 생애 최고로 예쁘고 고와야 할 신부는 녹초가 될 것이고, 화장은 다 지워져 몰골이 말이 아닐 것이다. 지금이야 다 커서 시집을 보내지만 그때만 해도 겨우 초등학교 5~6학년이나 중학생 또래밖에 안 되는 딸을 그야말로 절해고도나 다름없는 시댁에 보내 혼례를 치른다고 생각해보라. 어느 부모가 선뜻 남자 집에서 혼례를 치르게 하겠는가.
더 큰 문제는 신부 측에서 볼 때 신랑 집은 적진이나 다름없다는 점이다. 생면부지의 시아버지, 새 며느리의 흠을 찾기 위해 바쁜 시어머니와 시누이뿐이다. 눈 닦고 찾아보아도 신랑 외에는 어디 하나 우군이라 할 만한 사람이 없다. 어린 딸을 적진이나 다름없는 생면부지의 남자 집으로 보내 혼례를 치르게 한다는 것은 부모로서 할 수 없는 노릇이었던 것이다. 남자는 설사 여자 집에 가서 혼례를 치른다 할지라도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여자보다 부담을 덜 느낀다. ‘사위 사랑 장모’라는 말이 있듯, 시집 식구들과 달리 처가 식구들은 사위에게는 친절하게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수발 들어줄 몸종이 필요치 않을뿐더러 당당하게 행동해도 군소리할 사람이 없다.
또 하나의 이유로, 혼례 후 신부가 곧바로 신랑 집에 들어가 살면 남자 집은 남자 집대로 신접살림을 마련해주어야 하기 때문에 신부 집 못지않게 경제적 어려움이 컸다. 앞서 김종서가 말했듯 “남자 집이 만약 부자라면 곧 신부를 접대하는 것이 어렵지 않겠으나, 가난한 사람은 부담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에 남자 집에서도 이를 꺼려왔습니다”라고 한 것은 남자 집에서 혼례 치르는 걸 꺼렸음을 말해준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조정에서는 남자 집에서 혼례를 치러야 한다며 친영례의 주장을 펴다가도 막상 자기 딸을 시집보낼 때는 언제 그랬느냐며 자기 집에서 혼례를 치른 것이다. 이처럼 당시에는 이상과 현실의 벽이 너무 커 친영례가 정착하지 못했다. 친영례를 치르지 않기 위해 딸을 일찍 혼인시키는 조혼 풍속까지 생겨나기도 했다. 한편 아예 여자 집에서 혼례를 치르고 처가살이를 하는 경우도 많았다. 따라서 처가의 도움을 받으면 반은 자식이 된다는 뜻에서 장인에 대해 반자 半子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조선 중종 때 성균관 생원 이경 같은 이는 신부 집에서 혼례를 치르는 것은 오랑캐 풍속이라며, 남편이 아내 집에 거처하는 것이 마치 머슴이 부잣집에서 걸식하는 것과 같고, 며느리가 시부모 섬기는 일을 알지 못해 업신여기는 마음이 생긴다고 했다. 남편이 집안을 다스리지 못해 부부의 도가 어그러진다고도 했다.
그 후 많은 논의와 당부에도 신랑이 신부를 맞이해 신랑 집에서 행하는 친영례는 일부 왕실에서 솔선수범으로 이루어졌을 뿐, 일반 백성은 여전히 여자 집에서 혼례를 치렀다. 심지어 반계 유형원은 “신랑이 신부 집에 가서 혼인을 하기 때문에 아내를 맞는다고 하지 않고 처가로 들어간다는 뜻의 입장 入丈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수천 년 동안 여자 집에서 혼례를 치르던 풍속이 언제 어떻게 바뀐 것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1970년대부터 일반화되기 시작한 예식장이라는 제3의 장소가 생기면서 없어지게 되었다.

혼례는 저녁에, 함은 아침에 보내야 좋다 혼례식은 어느 시간대에 하는 것이 가장 좋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혼례는 저녁에 치르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고 할지 모른다. 과거에는 저녁 무렵에 혼례를 치렀다. 혼례를 뜻하는 혼 婚 자를 자세히 뜯어보면 금세 납득이 간다. 남자(氏)와 여자(女)자 어느 날(日) 맺어지는 글자가 바로 혼 婚(女+氏+日) 자다. 그런데 여기서 여자(女)만 떼어내면 바로 저녁 무렵을 뜻하는 혼(昏) 자가 된다. 저녁 무렵에 혼례를 치렀기 때문에 결혼을 나타내는 글자에 ‘혼 昏’ 자가 들어간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혼례식 때 주고받은 혼인 문서를 보아도 알 수 있다. 전남 구례 지방의 문화 유씨 종가에 전해 내려온 1920년대 혼례 문서에는 하나같이 혼례 시간이 ‘신 申’으로 되어 있다. 신시는 오후 3시부터 5시 사이로 해가 서산으로 기울기 전의 시간이다. 이때쯤이면 시골에서는 굴뚝에서 저녁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후한 때 유희는 <석명 釋名>에서 “혼 婚이란 어두울 때 예를 올림이요, 인 姻이란 여자가 음이라 어둡기 때문이다”라며 혼인은 저녁때 하는 것이라 정의했다. 또 당나라의 문인 공영달은 <예기>에 “신랑은 황혼 무렵에 신부를 맞으러 가고, 신부는 이에 따라가기 때문에 사위는 혼 昏이라, 처는 인 姻이라 부른다”라고 주석을 달았다.
혼례를 저녁에 치렀음은 불을 밝히는 횃대나 초의 상용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세종 때 허조가 임금에게 왕세자의 가례에는 초 10자루와 횃불 40자루, 3품 이하는 횃대(炬花) 8자루, 2품 이상은 10자루를 쓰도록 허락할 것을 요청한 기록이 이를 말해준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대낮을 피해 저녁에 혼례를 치렀을까? 저녁에 혼례를 치른 것은 황혼 무렵을 틈타 처녀를 약탈해 결혼하던 유풍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지만 설득력이 약하다. 필자가 생각할 때 혼례는 물리적으로 저녁 무렵에 치를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보통 성인이 하루에 1백 리(40km)를 걷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신부 집이 20~30km 떨어져 있다고 가정하자. 신랑이 아무리 일찍 출발한다 해도 오후 1~2시쯤 되어야 신부 마을에 도착할 수 있다. 신부 마을에 도착했다고 곧바로 식을 올릴 수는 없다. 먼 길 왔으니 잠시 요기도 하고 휴식도 취하고, 사모관대를 갖추려면 적어도 1~2시간은 족히 걸린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지금처럼 대낮에 혼례를 올리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신(申)시, 즉 오후 3~5시에 치르게 된 것이다.
신시는 음기가 때에 맞아 만물이 타고난 성질을 부여받는 시기로, 만물이 그 형체를 완성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신시를 지나 곧이어 유시 酉時(5~7시)가 되면 음양이 서로 같아져 조화를 이룬다. 즉 12시(午時)에 극대화된 양이 점점 소멸하기 시작하면서 동시에 음이 점점 성장해 신시가 되면 오시에서 일어난 음이 3음으로 커졌다가 저녁때인 유시에 음양이 서로 같아진다. 따라서 음양이 조화를 이루는 저녁 무렵에 혼인을 치르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함은 언제 보내야 좋을까? 요즈음의 풍속으로는 보통 혼례는 낮에 하고, 함은 저녁에 보낸다. 하지만 오히려 함은 아침에 보내고, 예식은 저녁에 하는 것이 좋다. 명나라 때 팽대익은 <산당사고>에서 “신부 집에 예단을 보낼 때는 반드시 아침에 보내야 하고, 신부를 맞아 올 때는 반드시 저녁을 이용해 한다”라고 했다. 사람들이 분주하게 활동하는 낮에는 부정한 것이 많기 때문에 좋지 않다는 의미다. 따라서 하루 중 가장 조용하고 정결한 시간대인 아침 무렵에 함을 보내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것 같다.
결혼을 앞둔 예비 신랑 신부들이여! 굳이 복잡한 낮 시간대를 고집하지 말고 음양이 절로 조화를 이루는 저녁에 운치 있게 혼례를 치른다면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을까.

최혜경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0년 4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