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최근 평택의 아파트에 집필실을 꾸렸다. 안성 수졸재는 휴식을 위한 도피안으로 남겨두었다. 좋아하는 목판 화가 김억 씨의 작품에 그가 어려 있다.
봄이 가슴팍까지 치달아 있다. 삼동을 참아온 꽃눈이 마침내 눈을 뜨고야 만 것이다. 그렇게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온 봄은 또 삽시간에 가버리고 말 것이다. 그렇게 내 봄앓이는 또 끝나버릴 것이다.
안성 금광저수지의 잿빛 숲 속에도 봄이 왔다. 햇빛이 투명해지고 샛바람은 높게 나부끼고 있다. 봄의 한가운데, 그가 보였다. 수풀 속에 숨은 집에서 그가 걸어 나왔다. 수졸재(수졸 守拙은 바둑 초단의 별칭으로, ‘겨우 자기의 집이나 지킬 정도’라는 뜻이다. 초심을 잃지 말자는 겸양의 뜻으로 그는 이 집을 ‘수졸재’라 부른다)의 주인은 날 보며 들꽃처럼 깨끗하게 웃었다. 뒤쪽으로는 봄 산이 버티고 있고, 눈 밑으로는 강 안개가 펼쳐져 있었다.
2만 5천 권의 책이 들어찬 요새, 수졸재 안에 내가 주저앉자 쉰일곱 살의 수줍은 시인은 날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요절한 천재 시인 기형도가 가장 좋아한 시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의 글을 무작정 필사했던 대학 시절 한 귀퉁이가 떠올랐다. 그의 <햇빛사냥>을 읽으며, ‘그래, 제대로 알 수 있는 건 세상에 아무것도 없어’라며 그 불가지론의 숙명을 체감한 열기와 치기의 20대. 그로부터 십수년 후, 거울 속의 내가 낯설어지기 시작한 나이가 되어 그를 만나러 왔다. 그 시인의 집에서, 그가 내온 고로쇠 물을 크리스털 잔에 따라 마시며, 시를 읊어주는 그 청안한 음성을 듣게 되다니, 이 시간이 송구할 뿐이다.
“꿈틀거리는 성욕이 없다면/ 꽃을 피울 수 없지/ 꽃 피지 않는 나무라면/ 살아 있다고 할 수 없지// 봄날 저녁 하늘을 향하여/ 솟구치는 성욕으로/ 마구마구 꽃을 피워 올려/ 꽃핀 구름들을 이고/ 서 있는 나무/ 취한 여자처럼 발갛게/ 아아, 이뻐라/ 당 신 을 사 랑 해 요.” _‘꽃피는 나무에게’ 전문
1 앞으로 그가 책 읽고 글을 쓸 평택의 집필실은 대낮이면 햇살이 부시게 들어오는 집이다. 그 안에서 다시 ‘탐서’에 들어간 시인 장석주 씨.
시인 장석주. 1954년 논산 출생. 서울에서 보낸 가난한 청소년기. 그에게 동화 같은 유년의 추억은 없다. 다만 글쓰기의 숙명을 예감하는 기억만 남아 있을 뿐이다. 백제 장군 계백의 일화에 울었고, 소설가 오영수의 소설을 읽으며 불타오른 중학생 장석주, 돌 축대 밑을 한 아름 책을 껴안고 그림자도 없는 사람처럼 조용히 걸어가던 그. 고등학교 시절 방랑벽이 도져 학교를 관두고 시립 도서관 열람실에서 릴케와 니체, 바슐라르를 탐독했다. 독학으로 문학의 길로 나아가 21세에 시로 등단하고 그 후 첫 시집 <햇빛사냥>도 냈지만 청탁은 들어오지 않았다. 신춘문예에도 몇 번 미끄러졌다. “그때를 벗어나는 게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어요.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데 세상에 나가서 사람 구실을 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에 잠도 못 이뤘죠. 글 쓰다 몰려온 절망감에, 소중히 모은 8백 권의 책을 헌책방에 팔아버렸어요. 글과 상관없는 삶을 살겠다, 이 악물고 돌아오는 길에 햇빛은 쏟아지고…. 그 시절의 내게 니체의 글은 힘과 격려가 됐어요.” 그 니체는 우리도 읽었지만 이 사람만 좋은 작가가 됐다.
“나는 저문 바다를 적막히 떠돌았다./ 검은 파도는 섬기슭을 울며 울며/ 휘돌아 사납게 흰 이빨을 세우고/ 물어뜯어도 물어뜯어도 절망은 단단했다.// 너무 오래되어서 낡은 이 세상/ 가을해 떨어져 저문 날의 바람 속으로/ 마른 들풀 한 잎이 지고 어둠이 오고/ 나는 얼굴 가득히 범람하는 속울음 참았다.” -시집 <햇빛사냥>의 ‘가을病’ 중
2 그는 직접 판화를 제작하기도 한다.
3 품에 끼고 살 만큼 사랑하는 물건이 없는 그가 애장품이라고 말하는 몇 가지 물건 중 권진규의 조각.
1979년 25세가 되던 그해, 시립 도서관 참고열람실에서 쓴 비평문이 동아일보 문학평론 공모에 당선돼 그는 비평가라는 이름표를 달았다. 그해 고려원 출판사에 말단 사원으로 입사해 6개월 후 편집장이라는 파격적인 인사 발령을 받았고, 다시 2년 후 독립해 청하출판사 대표가 됐다. 서정윤 시인의 <홀로서기>가 2백만 부 이상 나가는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된 이후 그는 그야말로 ‘잘나가는’ 출판사 대표였다. 문학이 세상의 중심이었던 1980년대, 그가 펴내는 문학 동인지조차 초판을 훌쩍 넘기며 팔려나갔다(청하출판사에서는 50종이 넘는 동인지, 무크집도 펴냈다). 기어이 그렇게 원이었던 ‘니체 전집’을 펴내고, 5백여 종의 책을 신나게 펴내던 시절이다. 그리고 1992년, 마광수 교수의 소설 <즐거운 사라>를 출간한 그는 ‘음란문서 제조 및 반포’죄로 두 달 동안 수감됐다. “한국 사회가 출판에, 아니 문화에 보여주는 대우에 화가 났다. 설사 내가 죄를 지었다고 쳐도 2개월 동안 감옥에 갇힐 만한 것은 아니었다”며 그는 출옥 후 한 달 동안 제주도에 내려가 지냈다. 그리고 이듬해 봄 출판 활동을 접었다. 이 강물 같은 이야기에는 그의 인생 전반기, 그 빠른 속도가 담겨 있다.
4 역시 그의 애장품인 미얀마산 철불. 남방불교의 태가 물씬 느껴지는 불상으로, 그 정결한 자태가 마음에 들었단다.
2000년, 그는 서울을 버렸다. 떠난 게 아니라 버렸다. 서울이라는 빠른 시간을 버리고 안성 금광저수지 옆에 깃들였다. 이 집에서 10여 년을 살며 5천 권의 책을 읽고 30여 권의 책을 잉태했다. 물론 그동안 두 아이의 아비인 채 글로 밥도 벌었다. 새벽 4시면 일어나 정오까지 글을 쓰고, 젖은 고샅길을 산책하고, 명상하고, 오후에는 책을 읽었다. 밤 아홉 시, 밤의 기운이 손님처럼 다가오면 잠을 청해 새벽 3, 4시에 일어나는 스님 같은 생활을 했다. 그렇게 정갈하게, 느리게, 또 열심히 산 그에게 찾아온 건 고요지경이었다. “시골에서 그렇게 살려고 했어요. 마음에 쥐고 있던 욕심들을 놓아버리기. 그랬더니 마음이 순해지고 몸은 갖가지 즐거움에 예민해졌어요. 홍매화가 필 때, 물에 수련 잎 번질 때의 즐거움, 집 가까운 둔덕에서 뻐꾸기가 울 때의 즐거움….” 이 이야길 들려주는 그의 눈은 청안하다. 저런 눈빛은 삼감과 기다림의 시간을 보낸 이만이 가질 수 있으리라. 매일 먹는 밥이 여름처럼 뜨겁고, 들이켜는 물이 겨울처럼 차갑다는 사실에 눈물이 솟는 건 안성 산골이 준 축복이다. 바로 식물적인 삶이 준 축복.
이 수졸재에서 시 한 수에 파지 수백 장을 쏟아내고 점 하나, 쉼표 하나 찍는 것에도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며 정말 많이도 썼다. 태양전지에 플러그 꽂은 것처럼 글을 쏟아내 매년 3~5권의 단행본으로 엮었다(안성에 내려오기 전 펴낸 책까지 합하면 지금까지 ‘지은이 장석주’라 인쇄된 책이 60권 가까이 세상에 나온 셈이다). 시, 평론, 에세이, 독서 일기 등 분야도 다채로웠다. 소문난 탐서가, 애서가, 공서가이기도 한 그는 한 주에 두 박스 분량의 책, 1년이면 1천2백 권에서 1천5백 권 사이의 책을 사들였다. 구들장에 드나드는 찬 바람을 버텨내며 그렇게 글쓰기와 책 읽기에 빠져 살았다. 그 시간은 그에게 훈장처럼 근시, 관절통, 척추 만곡증을 남겼다.
그 안에서 태어난 시인 장석주만의 시. 시골 마을의 느린 시간을 보내며 그는 단어 하나에 목숨 건 시, 오래 묵힌 시를 썼다. 과거 그의 시를 뒤덮던 절망, 인간의 구겨진 삶, 소통의 단절은 ‘안성의 고요 시대’를 거치며 변화했다. 내가 대학 때 열광했던 장석주식 ‘불가지론’은 이곳에 와서 그 올무를 완전히 풀었다. 대신 자연과 인간이라는 가엾은 생명체를 현미경으로, 때론 망원경으로 들여다보는 시가 나왔다. ‘안성 3부작 시집’이라 할 <붉디붉은 호랑이> <절벽> <물은 천 개의 눈동자를 지녔다>가 그것이다. 식물적인 삶에서 태어난 식물적인 시라 부르고 싶은.
“깊이 아파본 사람마냥/ 바닷물은 과묵하다/ 사랑은 증오보다 더 아픈 것이다/ 현무암보다 오래된 물의 육체를 물고 늘어지는/ 저 땡볕을 보아라/ 바다가 말없이 품고 있던 것을/ 토해낸다.” _‘소금’ 중
그 안성 3부작 끝에 지금까지와는 좀 다른 시집 <몽해항로>가 있다. 몽해 夢海, 꿈속의 바다, 곧 흑해. ‘무겁고, 검고, 차가운 바다’인 흑해는 곧 죽음을 뜻하기도 한다. “꿈속에서 모래먼지를 일으키며 달리는 버스를 탄다./ 누군가 흑해행 버스라고 했다./ 검은 염소들이 시끄럽게 울어 댄다./ 한 주일쯤 달리면 흑해에 닿는다고 했다./ 나는 참 멀리도 가는구나, 쓸쓸한 내 간을 위하여/ 누가 마두금이라도 울려 다오.”_시집 <몽해항로>의 ‘몽해항로 2’ 중(이하 인용하는 시는 모두 <몽해항로>에 수록된 시편)
지금 우린 모두 몽해로 달려가는 중이다. “혼자 찬 밥을 목구멍으로 밀어 넣을”(‘그믐’ 중) 찰나, “황혼 녘에는 목덜미가 으슬하다”(‘대한’ 중) 느낄 때 바로 우린 몽해로 달려가는 것이다. “그런데 그 죽음은 곧 삶인 거예요. 살아 있기 때문에 죽음을 느끼는 거죠. 죽음을 정직하게 대면할 때 삶의 절정을 느낄 수 있어요. 찰나의 순간을 살다 지는 게 우리 생이니, 그만큼 애틋하고 아름다운 게 아닌가. 꽃이 피는 봄날에 세상 뜨기가 더 어려운 것처럼. 삶은 짧은 낮에 꾸는 긴 꿈이란 말이 맞는 거죠.” 비관을 긍정으로 바꾸는 마음의 악기를, 무기를 가진 사람. 그의 시에서 죽음, 그믐, 얼룩 같은 단어를 읽지만 마음이 끝내 나락으로 빠져들지 않는 건 그 힘 때문일 것이다.
“이제 내 삶은, 시는 식물적인 삶에서 동물적인 삶으로 바뀌고 있어요. 공격적이고 욕망하는 삶이라는 뜻이 아니라, 내 본성에 충실한 삶, 능동적인 삶이죠. 장자는 ‘사람으로 살지 마라, 동물로 살아라, 인의예지에 얽매이지 말고 네 본성대로 살아라’ 했죠. 바로 그 동물적인 것들이 내 안에서 확 튀어나와 <몽해항로>가 쓰여진 거 같아요. 그 결과로 내가 사는 장소가 바뀔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어요. 제주도가 될 수도, 남프랑스나 그리스가 될 수도 있고. 내가 좀 더 고독해질 수 있는 곳으로 가서 ‘능동적으로 산다는 것’의 사유를 끌어내지 않을까.” 그의 말은 연필로 갱지에 꾹꾹 눌러 쓰는 것 같아, 내 마음에 자국을 남겼다.
“결국 시는 한 줄이다. 한 줄로 압축할 수 없는 것은 시가 되지 않는다. 한 줄은 전대미문의 문장으로 쓸 것!” <몽해항로>의 첫머리에 그가 썼다. 한 줄로 압축되는 시를 쓰려고 그는 3년 동안 하이쿠(5・7・5조의 형식으로 쓴 세 줄짜리 단시. 일본의 전통 시로 한 줄의 문장 안에 우주를 담아낸다)를 공부했다. “시는 언어를 취하는 장르인데 궁극적으로는 언어를 버려야 한다는 이 모순, 그 속에서 살아남는 게 진짜 시라는 것, 하이쿠를 공부하며 알았죠.” 다 버려서 뼈만 남은, 아름다운 그의 시 중 ‘비둘기’. “취객의 토사물에/ 달라붙은 중생,/ 함부로 비웃지 마라./ 먹고 사는 일은/ 숭고한 수행,/ 장엄한 일이다.” 이 쉽고 단정한 글에는 존재에 아파하고 애끊는 마음이 담겨 있다. 그래서 운치 있게 읊기보다 간절하게 읊어야 한다. 영예롭게도 그의 이번 시집 <몽해항로>는 제1회 질마재 문학상을 수상했다. 미당을 기려 만든 상의 첫 수상자가 된 것이다.
“저 복사꽃은 내일이나 모레 필 꽃보다/ 꽃 자태가 곱지 않다./ 가장 좋은 일은 아직 오지 않았어./ 좋은 것들은/ 늦게 오겠지, 가장 늦게 오니까/ 좋은 것들이겠지./ 아마 그럴 거야./ 아마 그럴 거야.”_<몽해항로>의 ‘몽해항로 6’ 전문
1 그에게 비움, 채움, 느림을 선물한 안성의 금광저수지.
시가 죽었다는 이 시대에, 그나마 살아남은 시마저 수다스러운 호객 행위 같은 이 시대에 시력 詩歷 40년의 시인은 시로 무얼 더 말하고 싶은 걸까. “시는 천기누설이라고 봐요. 이건 예언자, 예술가만 할 수 있는 거죠. 모든 시인들은 자기 삶을 예언해요. 큰 시인은 자기 부족, 자기 민족의 운명을 예언해요. 놀랄 일이죠. 기형도 시인이 죽기 한 달 전에 내게 ‘빈 집’이란 시를 보냈어요. 이상한 느낌이 들더라고.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그러는데 비장하더라고요. 3월 7일 날 아침밥을 먹는데 기형도 시인이 죽었다는 전화가 왔어요. 그는 자신이 파고다극장에서 새벽에 죽으리라고 상상도 못했겠죠. 그러면서도 그런 시를 쓴 건 삶의 예언이 아니고 무엇이겠어요. 그래서 시는 함부로 쓸 수가 없어요. 그렇게 고난 끝에 태어난 시는 영혼을 그윽하게, 존재를 영예롭게 만들어요. 그 시를 읽는 이는 시 속에 깃든 고결함이 샘물처럼 자기 내면으로 스며들어 더러움, 탁함을 씻어내는 걸 경험하고요.” 40년 넘게 쓰고도 그는 아직도 불타고 있다. 그가 지금처럼 계속 끔찍하게, 치열하게 쓸 수 있기를.
“그런데 실은 나도 죽는 게 제일 두려워요. 죽음에 대해 몇십 년 동안 읽고 써왔는데도. 그 근본 문제는 아직 해결하지 못한 것 같아. 그러니까 아픈 게 싫고, 암 걸리는 게 세상에서 가장 싫은 거지. 그래서 난 담배도, 술도, 탄 음식도 안 취하고, 밤도 안 새우는 거라니까.” 알고 보면 겁 많고, 똥배가 나왔다는 것을 비밀로 둔 시인이 갑자기 뭉게구름처럼 웃었다. “그래도 노력해요. ‘스몰 다잉’을 해보자 하죠. 자기를 자꾸 비워내서 가벼워진 사람은 떠날 때도 수월할 테니. 힘 없을 나이에 떠나갈 텐데 무겁게 짊어지고 있으면 참 힘들잖아요.” 그 고요한 목청에 담은 생각의 밀도.
꾸무럭해진 해를 등지고 수졸재를 떠나왔다. 우리의 그 짧은 인연은 그렇게 끝났다. 더디게 더디게 찾아온 봄이 쉽사리 떠나가듯. 그래서 그렇게 애틋한 봄처럼. 어쩌면 우린 이다음에 몽해를 건너, 사람도 아닌 낯선 존재로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그 몽해를 건널 때까지 안성의 장 아무개 시인처럼 나도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뜨겁게 살다 가리라.
“비를 만나거든 피하지 말고/ 그 자리에서 천둥으로 울고 번개로 화답하라.(중략) 죽음을 만나거든 꽃으로 피어나지 말고/ 여문 씨앗으로 견뎌라.” _‘시 1’ 중
2 <몽해항로>는 제1회 질마재 문학상 수상작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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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 시인의 행복론 “행복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예요. 행복을 향하여 나아가는 행위 자체, 그걸 향유하려는 마음속에 행복이 있죠. 사과를 한 개 가진 사람이 행복할까요, 두 개 가진 사람이 행복할까요? 한 개가 되었든 두 개가 되었든 그걸 깨물어 먹으며 사과를 먹는 즐거움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 행복하겠죠. 그래서 행복은 조건의 문제이기보다 향유의 문제라는 이야기죠. 어린 딸을 바라볼 때, 사랑할 때, 새잎이 나는 걸 볼 때, 좋은 음악을 들을 때, 좋은 책과 만났을 때… 기꺼이 행복을 맞으러 나아갑니다. <몽해항로> 속 제 시에도 행복론이 숨어 있어요. ‘행복은 단순하고/ 불행은 복잡하지 않던가. 거울의 뒷면 같은 진실,/ 더 큰 진실일수록/ 잘 보이지 않는다.’(‘바둑 시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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