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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극장] 한국 최초의 변검술사 김우석 씨 내 가면 속에는 마술보다 짜릿한 삶이 흐른다
1초에 가면 3개가 바뀌는 변검술, 본 적 있으십니까? 얼마 전 <놀라운 대회 스타킹>에도 출연한 김우석 씨는 한국 최초로 중국의 변검왕을 사사한 변검술사입니다. 성공한 마술사였던 그가 얼굴 한쪽이 함몰되는 사고를 겪은 뒤 마술처럼 변검술을 만났고, 외지인에게는 절대 그 비법을 전승하지 않는다는 변검술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0.3초의 숨막히는 변검술로 인생의 희로애락을 보여주는 김우석 씨의 무대가 시작됩니다.


변검술사 김우석 씨가 입은 의상은 우리나라 왕의 복식을 변형한 디자인이다. 그는 중국 전통극인 변검을 한국 실정에 맞게 재구성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소매가 펄럭이는가 싶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가면이 바뀝니다. 우와, 환호합니다. 이다음에는 눈도 깜짝하면 안 되겠구나 다짐하는 찰나, 부채가 얼굴을 스치면서 또다시 가면이 바뀌었습니다. 순식간입니다. 코앞에서 눈을 부릅뜨고 지켜봤는데도 이게 웬일이랍니까. 트릭을 찾아내기는커녕 아무리 가까이서 봐도 완벽한 변검술에 더 깊이 빠지고 말았습니다. 또 한 번 역동적인 춤사위가 벌어져 보는 이도 숨이 턱에 닿을 무렵, 양 소매가 겹쳐지더니 가면이 벗겨지고 민낯이 드러났습니다. 젊은 청년의 얼굴입니다. 바로 중국 제일의 변검왕을 사사한 최초의 외국인이자 한국 최초의 변검술사 김우석 씨입니다.
중국 쓰촨으로 여행을 다녀온 분 중에는 유흥지에서 짤막한 변검술을 본 적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관광객의 눈을 끌기 위한 쇼에 그칠 뿐, 정식 공연장에서 제대로 된 공연을 볼 기회는 드뭅니다. 그보다 변검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았던 건 영화 <변검>이었을 겁니다. 중국 전통의 변검술은 스승이 택한 제자에게 비밀리에 전수된다는 것, 외지인과 여자는 배울 수 없다는 것, 가면이나 의상이 아주 귀하다는 것 등 변검술의 내막을 서정적으로 그린 영화였습니다.
그런데 변검술사 김우석 씨의 인생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습니다. 그는 원래 젊은 나이에 성공한 마술사였습니다. 어린 시절 홀어머니가 일하러 나간 사이 TV를 보며 마술을 독학했고, 10년 넘게 연마한 기술로 독창적인 무대를 선보이던 그였습니다. 그러다 의무경찰로 복무하던 중 시위대의 쇠 파이프에 맞아 얼굴의 40%가 함몰되었습니다. 산산이 부서진 뼛조각을 새로 맞추는 대수술을 받고 살아났습니다. 복귀 후 공연 연출도 하고 ‘매직 바’라는 신선한 장르도 탄생시키며 승승장구했지만, 허무했습니다. 마술을 뛰어넘는 그 무언가를 하고 싶었습니다. 여행을 떠나 세계 곳곳을 돌아다녔습니다.
“쓰촨 성에서 변검을 보게 됐어요. 1초에 가면 3개가 바뀌는데… 전율했어요.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지요. 제가 관객이 아닌, 무대 위의 변검술사가 된 느낌이랄까요. 객석에서 기립박수가 터졌을 때 겨우 정신을 차렸어요. ‘나는 저걸 배울 수밖에 없다’는 생각뿐이었어요. ‘저걸 배워야 한다’도 아니에요. ‘왜 해야 하지?’ 하는 물음도 없었고요. ‘무데뽀’ 정신으로 변검왕 왕다오정 선생을 찾아갔습니다.”

그는 요즘도 매일 수련한다. 기본 자세를 잊지 않기 위해서다. 옥탑방 마당에서 한두 시간씩 혼자 연습하면서 관객이 그를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연습도 한 편의 공연처럼 하다 보면 매일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인생의 하나뿐인 스승, 그리고 아버지 왕다오정은 현대 변검의 창시자로 칭송받는 인물입니다. 고작 가면 3장을 바꾸는 19세기 말의 변검술을 가면 24장을 바꾸는 경이적인 무대로 발전시켰고, 3분 안에 8장의 탈을 연속적으로 바꾸는 기예도 선보였습니다. “왕다오정 선생을 처음 만난 날, 제게 차를 내주셨습니다. 이런 경우 대개 ‘넌 뭐 하는 사람이냐’고 묻잖아요? 근데 첫 질문이 ‘부모님은 어떻게 지내시는지’였어요. ‘아버지가 안 계십니다’ 했더니 ‘그럼 어머니는 건강하신가?’하더라고요. 그분의 도량에 녹아드는 느낌이었어요. 저는 마음을 열고 다가갔지요. 선생은 고아로 자란 데다 아들이 없었고 저는 아버지 없이 자랐기에 부자의 연을 맺었어요. ‘빠빠’라고 불렀습니다.”
물론 왕 선생은 변검술을 전수해주는 문제에 대해서는 단호했습니다. 이미 제자를 받지 않겠다고 공언한 데다 국가적 문화재를 외국인에게 가르쳐줄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홍콩 배우 류더화도 찾아와 수업료를 내밀며 변검 기술을 한 수 알려달라고 했지만 그는 단번에 거절했답니다. 전승은 한두 명의 제자에게 몇 년 동안 도제식으로 이뤄지는 고생스러운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 후 몇 년 동안 꾸준히 아버지(왕 선생)를 찾아갔어요. ‘기술 좀 알려주세요’하는 이야기는 안 꺼냈어요. 그냥 차 마시고 사는 이야기를 했어요. 아버지는 먼 데까지 오느라 고생했다며 따뜻한 식사를 대접해주셨어요. 사실 저는 중국 음식이 입에 맞지 않고 술도 못 하지만, 그 많은 음식과 58도짜리 술을 열심히 먹었어요. 먹고 토하고, 다시 먹고…. 그런데 힘들지 않았어요, 전혀. ‘3년 내에 다 배워야지’하는 식으로 목표를 정했다면 그 시간이 오기도 전에 포기했을 거예요. 저는 ‘그냥 배우자’하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놀랍게도 김우석 씨는 중국어가 능숙하지 못하답니다. 요즘도 아버지에게 전화하면 ‘빠빠’ 하고 인사 몇 마디 하는 게 전부랍니다. 하지만 부자의 인연을 쌓은 둘은 말보다 표정과 행동으로 마음을 나눴습니다. 무술과 변검밖에 모르던 아버지를 즐겁게 해드리고 싶어서 김우석 씨는 마술도 보여주고, 몇 가지 도구와 기술도 전해줬습니다.
“만난 지 6년쯤 되었을 때 처음으로 변검 비법을 전수해주셨어요. 변검은 의상에 모든 비법이 들어있는데, 아버지가 직접 저고리를 풀고 모자와 신발을 벗어가며 알려주시더군요. ‘수제자한테도 보여주지 않은 것을 너한테만 보여준다’면서요. 용띠인 제게 용 문양 의상을 선물해주셨습니다. 일 년쯤 뒤 아버지가 ‘궁금한 게 더 있을 텐데 왜 안 물어보느냐’고 물으시더군요. 너무 많은 비법을 뺏은 것 같아 죄송스러워 더 이상 여쭤볼 수가 없었어요. 그냥 뵙고 싶어서 오는 거라고 했지요. 그랬더니 그날부터 계속 변검 기술을 알려주셨어요. 감사한 마음에 찾아갈 때마다 어머니가 만든 장아찌, 고추장 같은 걸 들고 갔지요.” 외국인 중 첫 번째로 변검을 계승했다 하여 중국 언론에서 김우석 씨를 주목했습니다. 그의 능력은 현재 중국 변검술사들 사이에서도 인정받고 있습니다.


1백여 년의 역사를 가진 변검은 무예, 마술, 춤, 연극이 결합된 종합예술이다. 변검은 경극의 한 부류인데, 경극의 다른 공연은 거의 자취를 감춘 데 반해 변검만은 중국의 젊은 층을 비롯해 국제적인 호응을 얻고 있다.

“근데 칼이 몇 개나 나오나요?” 돌아보면 그가 변검에 끌렸던 이유를 알 것도 같답니다. “한창 젊은데 얼굴 반쪽이 일그러졌지, 게다가 당시에는 몸무게가 100kg도 넘는 거구였거든요. 뚱뚱해서 대학 졸업할 때까지 연애도 못 해봤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했어요. 외모 콤플렉스 때문에 가면으로 얼굴을 덮고 화려한 의상을 입는 변검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듯합니다.” 변검의 기본 동작 중에는 쿵후 같은 무술에서 연유한 것이 많습니다. 김우석 씨는 서울에서 강습도 받아가며 2년 동안 무술의 기본 동작을 단련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한국 최초의 변검술사로 금의환향했습니다. 하지만 변검은 아직 우리에게 생소한 공연입니다. 그러다 보니 공연장에 탈의실이 없어서 애를 먹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이가 묻더랍니다. “칼은 몇 개나 나와요?” ‘변검’이라는 이름만 듣고 여러 개의 검을 바꿔가며 춤추는 공연이라고 생각했더라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변검을 널리 알리고자 최근에는 SBS <놀라운 대회 스타킹>에 출연했습니다. 순식간에 아이돌 그룹 소녀시대 멤버들의 옷을 바꿨고, 이어서 춤을 추면서 가면을 14번, 의상을 4번 교체했습니다. “제작진이 제게 뭘 할 수 있느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옷 바꿔드릴게요’ 했지요. 소녀시대 멤버들이 마술을 할 줄 아는 것도 아닌데, 스케줄이 안 되어서 리허설도 못 했는데 다행히 공연은 성공적이었어요.”
사실 김우석 씨 말고도 변검을 하는 사람이 국내에 더러 있습니다. 그런데 정교함이나 예술적인 완성도 면에서 그와는 차이가 납니다. “아무래도 질투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죠. 항간에는 제가 중국 시장에서 변검 의상을 사다 팔며 돈벌이를 하고 있다는 소문도 돌더군요. 대꾸할 일도 아니죠. 누가 돈을 주겠다며 기술을 알려달라고 해도 거절하는 판에 말이죠. 배울 자세를 갖춘 제자가 생기면 다 전수해줄 겁니다. 물론 돈 안 받아요. 왕다오정 선생이 제게 그러하셨듯이.”
그가 돈을 바랐다면 이 길을 택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만큼 고된 일이지요. 특수 제작한 가면은 표피처럼 얇게 얼굴을 감싸기 때문에 여러 겹 겹쳐 쓰면 숨 쉬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춤동작보다 먼저 익혀야 하는 게 무호흡, 뇌호흡, 기공법입니다. 30분 정도 긴 공연을 할 때면 전문가인 그도 참기 힘든 고통을 느낍니다. 100% 실크에 화려한 자수를 놓은 의상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를 무겁게 짓누릅니다. 모자, 망토, 신발까지 다 갖춰 입으면 의상 무게만 50~60kg 정도 됩니다. 여자 한 명 업은 채 춤추면서 잽싸게 가면을 바꾸는 셈이지요.

희비가 엇갈리는 세상을 공연에 담아 공연으로 성공했으니 남들은 그가 돈을 꽤 번 줄 압니다. 하지만 버는 액수의 절반가량을 새로운 공연 도구나 의상 구입에 쓰느라 아직도 옥탑방 신세를 면치 못합니다. 함께 사는 홀어머니께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그가 한국에서 변검을 시작할 때부터 의상을 만들어준 것도 어머니의 거친 손입니다.
“어머니가 절 임신했을 때 희한한 태몽을 꾸셨대요. 꿈속에서 누군가 ‘저기 꼬마가 네 아들이다’ 하며 데려가라고 하더래요. 그래서 손을 뻗었더니 얘가 똥으로 변하더랍니다. 다시 잡으려고 하니 이번엔 이상한 옷을 입은 아이로 바뀌더래요. 치렁치렁한 옷인데, 그때는 목사 옷인 줄 알고 제가 목사가 될 것으로 믿으셨답니다. 그런데 중국에서 가져온 변검 옷을 보시더니, 이게 꿈에서 본 그 옷인가 보다 싶더래요.”
김우석 씨의 인생에는 고비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기억하지도 못하는 두 살 때는 자동차에 치여 하늘로 날아올랐는데 목사님이 받아서 살렸답니다. 구슬치기를 하다가 깨진 장독에 새끼손가락이 떨어져 나갔는데 꼬마 김우석은 손가락을 물에 씻어서 혼자 택시 타고 병원에 가서 봉합 수술을 받았고요. 이런 사건사고보다 이 이야기를 남 일인 듯 말하는 그가 더 놀라웠지요. 고비를 겪고도 겁 없이 무한 도전을 계속하는 김우석 씨.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의 힘인지도 모릅니다.
그는 변검을 한국식으로 재해석해 연산군의 이야기를 입힌 <김우석의 궁>을 준비 중입니다. 중국 변검은 경극의 영향으로 다양한 자세를 연출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데, 그는 스토리 전달이나 인물의 캐릭터 표현에 중점을 둘 예정입니다. 조만간 세계적인 공연 축제인 에든버러 페스티벌에도 출전할 것입니다. 김우석 씨는 올 연말에 공연할 <김우석의 궁> 이야기를 하면서 또다시 얼굴이 발그레해집니다. 한바탕 공연을 펼치고 가면을 벗은 직후에 봤던 그 얼굴입니다. “천 개의 눈이 저를 날카롭게 지켜보는 가운데 공연이 시작되면 발가벗은 기분입니다. 하지만 공연이 시작되면 무아지경이 되어 세상에 나 홀로 된 것 같고요. 목소리 없이 가면과 몸짓만으로 저는 수십 명의 인물로 변신합니다. 그러곤 관객의 환호가 이어지면 이제는 객석 한가운데 있는 느낌입니다.” 비천한 얼굴, 기품 있는 얼굴, 분노한 얼굴, 환희의 얼굴…. 극과 극을 오가는 얼굴을 한데 지닌 채 사는 게 우리 인생 아니겠습니까. 판타지의 세계란 이런 것인지도 모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단조로운 세상이 아닌, 복불복 게임처럼 희비가 엇갈리는 세상 말입니다.

(위) 무대에 오르기 전 김우석 씨는 머릿속으로 공연의 시뮬레이션을 그린다. 하지만 무대에 서면 이 시뮬레이션마저 지워지고 동물적인 감각으로 공연을 한다.

나도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0년 3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