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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화 들여다보기] 혼례 문화에 담긴 오해와 진실 축 결혼'이라고 쓰시면 무식자 취급받습니다!
백호랑이띠 아이를 출산하기 위해 혼인도 많이 할 경인년. 혼인을 앞둔 이들을 위해 정종수 관장이 혼인의 상징인 기러기와 부조 문화에 대해 들려준다. ‘한 쌍의 원앙처럼 살아라’ ‘축 결혼’이란 말은 일자무식한 표현이며, 부조금으로 과한 돈을 주고받는 것도 우리 전통에 반하는 일이라는 것. 이 글을 읽는 이라면 확실히 알 것이다.

내가 혼인할 때 집사람은 친구들에게 나무로 깎은 기러기 한 쌍을 선물 받았다. 기러기처럼 금실 좋고 다정하게 백년해로하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아직도 이 기러기는 안방 문갑 위에 사이좋게 놓여 있다.
지금이야 주거 형태가 서구식으로 바뀌어 남자의 공간인 사랑방이 없어졌지만, 예전에 남자는 열 살만 되어도 사랑방에서 자고 생활했다. 혼인을 해도 남자는 사랑방에서 기거하는 것이 관습처럼 여겨져 여자는 안방, 남자는 사랑방이라는 등식이 매겨졌다.
특히 대낮에 선비가 안방 출입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로 여겨 삼갔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장가들어 신부와 잠자리를 하고 싶어도 어른들 눈치가 보여 부부간에 운우의 정을 나누기가 요즘처럼 쉽지 않았다. 뼈대 있는 가문에서는 합방을 하려면 길일을 보아 잠자리를 하게 했으니 더 말할 나위 없다. 남녀의 육체적 사랑만큼 은밀한 것도 없다. 설사 잠자리를 하고 싶어도 그것을 말로 표현하기란 여간 쑥스러운 일이 아니다. 하물며 남녀가 사랑방과 안방에서 따로 기거할 때는 더더욱 그렇다. 만일 부인 쪽에서 먼저 이야기를 꺼낸다면 십중팔구 정숙지 못한 여자라고 핀잔 들을 것이 뻔하다. 남자라고 다를 바가 없다. 이때 은근하게 매개 역할을 한 것이 혼인 때 받은 기러기다.
우리 선조들은 문갑 위에 놓인 기러기로 마음을 넌지시 전한 것이다. 부인과 잠자리를 하고 싶으면 수컷 머리를 암컷 쪽으로 살짝 돌려놓는다. 부인도 암컷 머리를 수컷 쪽으로 돌려놓으면 만사 오케이다. 굳이 무슨 말이 필요한가. 이 얼마나 은근하고 멋진 표현인가. 

(왼쪽) 김중식, ‘온고지신’, 캔버스에 아크릴릭, 121×63cm, 2008

부부 금술의 증표, 기러기 옛날에는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되도록 살기를 다짐하는 혼례에서 기러기를 으뜸으로 삼았다. 중국에서도 혼례 때엔 존비(신분의 존귀함과 비천함)를 막론하고 모두 기러기를 예물로 썼다. 신랑이 신부 집에 가서 처음 행하는 의식이 기러기를 바치는 전안례 奠雁禮였다. 말 탄 신랑 앞에 기럭아비(雁夫)가 색실로 머리를 감은 나무 기러기를 보자기에 싸서 들고 간다. 신부 집에 도착한 신랑은 차려진 전안상에 기러기를 놓고 큰절을 한다. 이어 장모가 기러기를 치마에 싸서 새색시가 있는 방에 밀어 넣는다. 이때 기러기가 서면 아들을 낳고 넘어지면 딸을 낳는다고 했다.
우리 조상이 기러기를 혼례의 가장 중요한 예물로 사용한 까닭은 무엇일까. 기러기가 때에 맞춰 남북으로 절기를 놓치지 않고 다니는 면을 취해, 여자도 혼기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뜻을 명백히 한 것이다. 또 기러기는 날 때나 멈출 때나 행렬을 이루는 면을 취해, 시집 장가가는 것에도 장유유서가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동생이 형이나 언니를 추월해 혼인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귀천에 관계없이 혼례의 예물로 쓴 것은 바로 기러기의 곧은 절개와 믿음, 질서 같은 속성을 중히 여긴 까닭이다. 기러기는 믿음을 지켜 제 짝을 저버리는 일이 없고, 암수가 한번 교접하면 평생 동안 다른 놈하고 교접하지 않고 한쪽이 죽으면 다른 쪽도 따라 죽는다. 또 날아다닐 때도 항상 선두를 중심으로 가지런히 질서를 지키고, 앉아 있을 때도 손위의 뜻을 어기는 법이 없다. 이처럼 기러기는 부부간의 신의를 지키는 덕목을 갖추었기 때문에 혼례의 으뜸 예물로 사용해 생활의 본보기로 삼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혼례에 쓴 나무 기러기는 골동 가게에서도 비싸게 거래된다.

한 쌍의 원앙처럼 살라는 말은 삼갈지니 중국이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혼례 때 한 쌍의 원앙을 선물하기도 한다. 그것은 원앙이 기러기의 성정과 비슷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외로운 사람의 처지를 흔히 짝 잃은 원앙이라 말한다. 원앙은 예부터 부부 금실의 표본이요, 상징이었다. 그래서 부부의 이부자리도 원앙금침이라 한다. 물 위를 사이좋게 떠다니는 원앙의 모습을 보면 싸운다거나 떨어져 산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한 쌍의 원앙 가운데 한 마리가 죽으면 나머지도 죽을 것이라고 믿었다. 심지어 사이가 좋지 않은 부부가 원앙 고기를 먹으면 애정이 싹튼다는 속설까지 전한다.
그러나 원앙은 알고 보면 더할 나위 없는 바람둥이다. 원앙의 산란기는 4월 하순부터 7월까지다. 이를 앞둔 월동기부터 산란기까지 원앙들은 짝짓기에 열을 올린다. 보통 한 마리의 암컷에 열 마리 안팎의 수컷이 몰려와 구애 작업을 벌인다. 암컷은 이 중 수컷 한 놈을 점찍는다. 문제는 이런 짝짓기를 매년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사이좋아 보이는 원앙이 수시로 파트너를 바꾸는 것이다. 암컷이 알을 낳고 나면 수컷은 미련 없이 암컷을 떠난다. 기러기는 이와는 정반대다. 한번 짝을 잃으면 평생 죽을 때까지 다른 짝을 구하지 않는다. 한번 교접하면 평생 동안 다른 놈하고 교접도 하지 않는다. 원앙이란 놈은 매년 파트너를 바꾸니 천하의 바람둥이다. 결코 우리가 아는 금실의 상징이 아니다. 그러니 예식장에서 ‘한 쌍의 원앙처럼 살라’는 말도 살펴서 해야겠다.

祝 結婚은 잘못된 표현이다 오늘날에는 혼인이란 말보다 결혼 結婚이란 말을 많이 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결혼은 잘못된 표현이다. 혼인 婚姻이라 해야지 결혼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혼 婚이란 여자의 집이란 뜻으로, 남자가 여자에게 장가든다는 말이다. 인 姻은 여자가 의지하는 곳으로 남자의 집에 들어가는 것을 가리킨다. 고로 혼인은 장가들고(婚), 시집간다(姻)는 말이 된다. ‘장가 丈家든다’는 것은 남자가 여자의 집으로 살러 들어감을 뜻하기 때문에 여자의 부모를 장인 丈人, 장모 丈母라 한 것이다.
그런데 단지 결혼이라 한다면, 남자가 여자에게 장가만 가는 꼴 ‘혼’이 된다. 여자는 단지 곁붙어서 따라가는 꼴이다. ‘혼인’이라고 해야만 남자는 여자에게 장가들고, 여자는 남자 집으로 시집가는 것이 되어 말뜻에도, 남녀의 공평함에도 어긋나지 않는다. 우리 헌법이나 민법 등 모든 법률에서도 결혼이란 말 대신 ‘혼인’이라 쓴다.
더 우스운 것은 신부에게 보내는 축의금 봉투에 흔히 ‘축 결혼 祝 結婚’ 혹은 ‘축 화혼 祝 華婚’이라고 쓰는 경우다. 이것은 시집가는 신부에게 장가드는 것을 축하한다는 꼴이 된다. 망발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엄밀히 말해 이는 남자가 여자 집에 장가간다는 것을 축하한다는 말이기 때문에 신부 측 축의금 봉투에 써서는 더더욱 안 된다.
그렇다면 어떤 용어를 써야 하는가? 장가가고 시집간다는 뜻이 담긴 ‘혼인 婚姻’이나 혼인을 밝게 비추어 축하한다는 뜻이 담긴 ‘화촉 華燭’이란 어휘를 쓰는 것이 예의에 맞는다고 하겠다.

부조금은 타먹지 못하는 보험금 예부터 딸년 셋을 출가시키면 기둥뿌리 뽑힌다고 했다. 과거에는 혼인이건 상사건 큰일을 치르면 기둥뿌리가 뽑히다 못해 빚을 지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상부상조하지 않으면 큰일을 치르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우리의 전통 부조는 일종의 품앗이로 이루어졌다.
예식장이나 상가에 갈 때 가장 고민되는 것이 부조금이다. 요즈음은 장례식이건 결혼식이건 부조는 으레 현금으로 한다. 심지어는 전화 송금도 한다. 평소 별로 친분이 없는 사람까지 연판장 돌리듯 청첩장이나 부고장을 보내는 일은 그리 특이할 것도 없다. 더욱이 인터넷의 발달로 클릭 한 번만 하면 동시다발로 다중한테 연락이 가니 부조금 문화는 더 진화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권력이 있거나 힘깨나 쓰는 사람에겐 부조금으로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온다는 소문도 심심치 않게 들린다. 당초 집안 경조사 같은 큰일이 닥쳤을 때 십시일반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자는 부조의 의미는 찾아보기 힘들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부조금 봉투를 받으면 접수대에서 바로 치부장에 적었다. 하지만 요즈음은 치부장에 적고 돈 세어보기가 민망해서인지 부처님 모시는 대웅전에나 놓는 시주함 같은 것을 버젓이 갖다 놓고 거기에 봉투를 넣으란다. 부조금을 받는 데는 체면도 인정도 없는 것이 요즘 세태다. 더 가관인 것은 부조금을 받고 아예 입을 싹 씻고 마는 것이다. 원래 우리 풍속은 부조를 하면 반드시 노잣돈을 하라며 그중 일부를 떼어 도로 내주었다. 요즈음도 경상도 지방에서는 부조를 하면 반드시 여비 조로 일부를 돌려준다.
부조금을 보내지 않으면 혹시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하는 수 없이 내는 경우가 허다하다. 부조금은 타먹지 못하는 보험금을 내는 것과 같다. 우리의 아름다운 품앗이 전통의 부조 문화는 어느새 무서운 준準세금이 됐다.
이웃 나라 일본은 어떤가? 가까운 친지와 지인만이 참석해 신사에서 전통 방식으로 진행한다. 그리고 피로연을 따로 열어 신랑 신부를 축하해준다. 우리처럼 눈도장만 찍거나 밥만 먹고 가는 도떼기시장 같은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초청할 때 반드시 참석 여부를 묻고 모든 것을 그에 맞춰 준비한다. 그렇기 때문에 음식이 남아도는 일도 없다.

내가 죽으면 20여 년 전 어느 혼인 예식에 축의금으로 5만 원을 들고 갔다. 당시 나에겐 큰돈이었다. 한데 식장의 1인당 식대가 5만 원이라는 소리를 듣고 집사람과 함께 갔더라면 큰 실례를 할 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부터 가까운 친척이 아니면 축의금만 보내고, 상가에는 불원천리 찾아간다는 것을 좌우명으로 삼게 됐다. 부조금도 친분 정도에 따라 적게는 3만 원, 많게는 10만 원 정도 한다. 요즘 세태가 이만큼도 안 하면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니, 부조할 때마다 고민이 이만저만 아니다. 품앗이라는 좋은 의미까지 살리는 부조 문화는 없단 말인가. 지나가는 말로 나는 집사람에게 유언 아닌 유언을 한다. “내가 죽으면 지금 소장한 수천 권의 책은 모교 대학에 줘 학생들이 부담 없이 볼 수 있게 하고, 부의금은 절대로 받지 마라” 하니, 집사람이 “그동안 갖다 준 부조금이 얼마인데 어떻게 그것을 안 받느냐”고 한다. 그러면 난 “내가 죽으면 많아야 200명도 오지 않을 거야. 그럼 한 사람당 3만 원씩 부의금을 낸다 해도 6백만 원 남짓이지. 내가 그 정도 돈은 마련해놓고 죽을 테니 부의금은 받지 마라”고 당부한다. 이런 생각은 즉흥적으로 나온 것이 아니다. 한세상 견딘 사람이면 누구나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이다. 이 글을 읽는 <행복> 독자들도 이 기회에 축의금과 부의금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심이 어떨까. 

최혜경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0년 3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