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릴 스트립,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연기
제인(메릴 스트립 분)은 잘나가는 베이커리의 주인이자, 자신의 삶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책임감까지 강한 ‘돌싱맘’이다. 이와 동시에 두 남자와 사랑에 빠질 정도로 엉뚱한, 모순적인 인물이다. 자신의 집 설계를 의뢰한 건축가 아담(스티브 마틴 분)과 베이커리에서 대마초를 피운 뒤 반죽으로 비키니를 만들며 키스를 나누는 장면이 그렇다. 메릴 스트립은 제인의 모순된 모습에 이끌려 이 역할을 선택했다고 한다.
이야기는 제인이 아들 졸업식에 참석하기 위해 뉴욕에 갔다가 본의 아니게 호텔 바에서 전남편 제이크(알렉 볼드윈 분)를 만나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와인을 마시며 둘은 행복했던 시간으로 되돌아간 듯한 감정에 빠져 사랑을 나눈다. 제이크가 제인의 몸을 만지며 “Home, sweet home”이라고 말하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유쾌한 장면이 아닐까 싶다. 젊은 날 술김에 저지른 실수에 당황하며 깬 아침이 아니라, 익숙하고 편안한 고향 집에서 일어난 느낌이랄까? 그때부터 전남편과의 불륜 관계(다른 여자와 재혼했으므로)를 스스로에게 합리화시키려는 제인과 죄책감에 시달리는 제인이 충돌한다.
이런 제인에게 제이크는 자신들의 불륜을 진리인 양 만든다. 제이크는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다. 내가 재판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라면 주저 없이 제이크를 변호사로 선임할 것이다(제이크의 직업이 변호사). 무모하지만 목표를 향해 돌진하는 믿음직스러운 모습에서 가능성을 보았다고 할까? 영화를 본 후 알렉 볼드윈의 광팬이 된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제이크는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할 수 없는, 오직 눈앞에 놓인 한 가지 일을 향해 밀고 나가는 성격이에요. 제이크 역의 알렉 볼드윈은 완벽한 캐스팅이었죠. 그렇다고 알렉 볼드윈의 실제 성격이 제이크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에요. 알렉은 과정을 중요시하며, 모든 사람을 포용하죠. 그로 인해 모든 스태프와 배우가 자석에 끌리듯 그에게 빠졌죠. 또 독특한 매력이 있는데, 로버트 드니로나 알 파치노, 심지어는 스티브 마틴까지 웃게 만드는 마력이 있어요.” 알렉 볼드윈, 스티브 마틴 그리고 메릴 스트립처럼 멋진 배우들이 함께하지 않았다면 이 오묘한 삼각관계는 지금처럼 유쾌하고도 섬세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제인은 캘리포니아로 돌아온 뒤 집의 리모델링을 맡길 건축가 아담을 만난다. 그가 제안하는 디자인 하나하나가 자신이 꿈꿔온 집과 놀랍게도 일치하면서 공통점을 느낀 그녀는 아담과 데이트를 시작한다. 새로운 사랑이 찾아옴으로써 삶이 희망으로 바뀔 수 있음을 영화 내내 곱씹을 수 있다.
“아담은 제이크와는 달리 침착하고 편안한 사람이지만, 이혼으로 인한 아픔을 가지고 있죠. 그래서 또 다른 사랑에 빠지는 걸 몹시 망설이지만 이번엔 용감하게 뛰어들어요. 이들이 서로 끌리는 것은 젊은 시절 이성에게 호감을 갖는 이유와는 다른 것 같아요. 아담은 제인이 자신에게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사실에, 그녀는 그가 자신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인다는 사실에 매력을 느끼죠. 나이 들어 연애를 시작하면 연애의 달콤함뿐만 아니라 적신호들이 보이는데, 그 상황을 과거에 경험해보았기 때문입니다.” 메릴 스트립의 지적처럼 나이 든 그들이 극 중에서 서로의 감수성에 더 예민해지는 모습을 보이는 것 역시 당연한 것이리라.
영화 초반부, 제인의 막내딸 게비가 학교에 진학하면서 엄마 곁을 떠난다. 앞으로의 모험에 들떠 혼자 남는 엄마는 안중에도 없다. 촬영 당시 메릴 스트립의 막내딸도 졸업반이었다. 그녀는 딸과 함께 지내기 위해 뉴욕에서 촬영을 고집했다. 그래서 <사랑은 너무 복잡해>는 캘리포니아를 배경으로 하지만 대부분 뉴욕에서 촬영을 진행했다.
“촬영 기간이 영화사에서 예상한 것보다 길어지는 경우가 많은지라 꼭 뉴욕에서 촬영해야 할 것 같았어요. 그러지 않았으면 딸아이의 마지막 학년을 같이 보내지 못했겠죠. 아이가 한번 집을 떠나면 영원히 떠나는 거니까요. 뉴욕 스튜디오에서 촬영할 것을 영화사에 제안했고, 샌타바버라에서는 4주 만에 촬영을 마쳤죠.”
메릴 스트립의 실제 상황이 제인의 캐릭터에 많이 반영된 듯하다. ‘부모들에게는 자녀가 성장해 집을 떠나는 것에 대한 선택권이 없다’고 메릴 스트립은 믿는다. 자녀를 뒷바라지할 때는 자신에게 자유가 다시 오기는 할까 걱정하지만, 적막감과 함께 그날이 의외로 빨리 찾아왔다고 말한다. 그런 그녀에게서 자식들이 모두 외국에 있는 내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다. 한편으로는 나 역시 어머니와 아버지가 제인과 제이크처럼 젊은 시절의 감정을 되찾기를 바랐다.
낸시 마이어스 감독은 제인 역으로 메릴 스트립을 마음에 두고 시나리오를 썼다고 한다. “촬영을 시작하고 나서 그녀의 연기에 놀라워만 하고 있었어요. 전 보통 첫 신을 촬영하면서 배우들의 연기에 대해 메모를 해요. 다음 장면에서는 이렇게 바꿔봐야겠다고 생각되는 점들을. 이번엔 첫 신 후 메모를 하고 나서 아무 말 없이 두 번째 신을 촬영했는데 메릴 스트립은 제가 메모한 것을 스스로 조율하더라고요.”
연기의 달인 메릴 스트립은 촬영에 들어가기 전 자신에게 묻는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게 맞나?’‘이렇게 연기하면 되나?’ 이런 고민 덕분에 감독의 생각을 읽고 조율하는 명연기가 탄생한 것이다.
신중하지만 유쾌한 건축가 아담
아담은 조심스럽고 부드러운, 하지만 이혼이란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기 계발 테이프를 듣는 인물이다. 스티브 마틴 역시 이혼의 아픔을 겪었고 자기 계발 테이프를 들어본 적이 있기 때문에 아담이란 캐릭터에 공감했다고 한다. 그는 “젊을 때 자신을 설레게 하던 것들이 나이가 들면 오히려 반대의 감정으로 만드는 경우가 있는데, 젊을 때와 나이 들어서의 연애 차이가 그중 하나”라며 아담과 제인의 연애에 대해 현명하게 정리해주었다. 예를 들면, 젊을 땐 즉흥적이고 무계획적인 것이 즐겁지만, 나이가 들어선 ‘예측 불허’라는 요소 자체가 무책임하게 보인다고 한다. 아담은 영화 내내 적신호들을 굉장히 의식하는데, 노트북을 통해 제인과 채팅하는 장면 등에서 ‘예측 불허’의 상황에 허둥대는 중년 남자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배꼽 잡게 한 장면이지만 크게 웃고 난 후엔 앞으로 펼쳐질 스토리에 ‘아, 어쩌지!’하는 반응을 불러오기도 했다.
(왼쪽) 캘리포니아의 작은 동네 샌타바버라를 좋아하는 감독은 영화의 배경까지 그곳으로 잡았다. 이 동네의 온화한 풍경 속에서 제인과 제이크의 오묘한 그레이 로맨스가 펼쳐진다.
스티브 마틴은 유명한 코미디언일 뿐만 아니라 명성 있는 극작가이자 소설가, 칼럼니스트이며, 대학 시절에 철학을 전공하고 교수가 될 생각을 했을 만큼 박학다식한 사람이다. 많은 이가 그를 단지 코미디 연기의 지존으로만 생각하는 게 서운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쿨한 대답을 내놓는다. “제 커리어는 제가 좋아하는 여러 가지를 모두 동시에 시도할 수 있도록 해주죠. 저는 그만큼 축복받았어요. 전 심각한 책을 쓸 때나 연기를 할 때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대해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아요. 영화는 흥행 성공과 직접 연관되기 때문에 약간 차이가 있겠지만, 그 외 다른 것들은 예술이기 때문에 신경 쓰지 않죠.” 아담 역할은 심각과 코믹의 경계선에 있다. 스티브 마틴은 심각한 코미디 연기와 코믹하고도 심각한 연기 두 가지 모두를 해볼 수 있는 이 역에 매력을 느꼈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심각한 역을 맡는 것이 조금은 조심스럽다. 관객이 자신을 다르게 보는 것이 그 이유인데, 예상치 못한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정말 평범한 행동인데 그걸 코믹한 행동으로 오해하거나 과잉 해석할 때가 많다는 것이다. 스티브 마틴은 인터뷰 내내 겸손하고도 사려 깊은 행동, 진심 어린 답변으로 나를 감동시켰다. 그의 이런 태도는 단지 연륜에서 우러난 인터뷰 스킬이 아니라 인격을 가늠해볼 수 있게 만드는 것이었다.
1 베이커리 숍은 제인의 편안하면서도 스타일리시한 캐릭터를 살려 연출했다.
2 제인과 아담 그리고 제인의 아이들. 사위 역을 맡은 존 크래신스키는 감독과 메릴 스트립이 주목하는 배우다.
캐릭터들의 연주자 낸시 마이어스 낸시 마이어스 감독이 구상 단계부터 지금 같은 전개를 생각한 건 아니다. 처음엔 단순히 독특한 캐릭터의 여자가 등장하는 영화를 만들려고 하다가 나중에 전남편 얘기를 넣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그녀가 그와 불륜에 빠지게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면서 스토리가 비로소 완성되었다.
“연애는 경계의 고삐를 늦추고 자신을 내보이기 시작하면서 복잡해지죠. 이들의 경우 이혼 후 남자는 젊은 여자와 결혼하고, 여자는 다른 사람과 데이트하는 상황이니 더 복잡해질 수밖에 없죠.”
놀라운 것은 많은 사람이 이 내용에 공감한다는 사실. 결혼 한 번 해보지 못한 나 역시 이상하리만큼 공감이 갔다. 남자인데도 제인이 느끼는 미세한 감정 하나하나가 당연한 것처럼 주인공에게 동화되어갔다. 제이크가 젊은 여자(현재 부인)에게 빠져 이혼에 이르게 한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는 장면에서 제인과 비슷한 연령대의 여성은 왠지 모를 통쾌함을, 제이크가 다시 제인에게 빠져드는 장면에서는 중년 여성에게 남아 있는 여성적 매력을 재발견한 기쁨을 함께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극 중 인물과 관객의 완벽한 감정이입이 이루어졌다고나 할까? 이 영화를 본 미국 관객들은 최근의 영화 중 40~50대 여성의 심리를 가장 잘 묘사했다고 입을 모았을 정도니 말이다.
제이크와 아담, 두 남자는 제인에게 과거와 미래를 의미한다. 제이크는 마치 철없는 어린아이 같다. 제인에게 지금 필요한 건 또 하나의 아이가 아니라 듬직하고 책임감 있는 남자. 아담이야말로 제인의 미래이자 그녀에게 더 좋은 연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가 사랑스러운 이야기가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캐릭터에 있다.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없는 ‘불륜’이라는 관계에도 보는 사람이 그 관계를 인정하고 싶게 만드는 현상의 중심에 제이크가 있다. 낸시는 영화에 나오는 제이크의 이론과 그의 행동을 정당화시키려는 이유들을 완전히 믿는다.
“어떻게 보면 마법 수준이죠. 그의 캐릭터는 정말 매력적이에요. 제인이 다시 돌아가려고 생각할 정도로 매력 넘치는 캐릭터인 것 같아요. 그렇지 않으면 관객 역시 왜 그를 다시 만나는지 이해할 수 없겠지요. 물론 우리는 스토리가 전개됨에 따라 그의 문제점도 알아가게 되죠. 제인의 친구들이 그녀에게 더 나은 남자를 만날 자격이 있다고 하거나, 제이크가 모든 사람들과 부딪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어요. 하지만 그가 매력적인 사람이라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에요.”
3, 5 제인의 집. 아늑한 중산층 가정을 떠올리게 하는데, 이곳에서 제인은 ‘떠났다가 되돌아온 사랑’의 복잡함, ‘새로 시작하는 사랑’의 설렘을 경험한다.
4 낸시 마이어스 감독.
신기하게도 낸시의 작품에 나오는 캐릭터 중 가장 공감이 가는 역할은 남자가 맡는다. <왓 위민 원트>의 닉(멜 깁슨 분),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의 해리(잭 니콜슨 분), 그리고 <사랑은 너무 복잡해>의 제이크. 그들의 대사나 행동, 생각 모든 것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여자가 남자 입장에서 만들어낸 캐릭터가 남자가 직접 만든 캐릭터보다 더 실제 같고 남자답다는 점이 낸시 마이어스라는 감독을 대단하게 느껴지게 한다. 그녀는 <로맨틱 할리데이>에서 ‘환경이 바뀌면 인생이 바뀔까?’라는 질문을,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에서는 ‘50~60대의 사랑은 어떤 모습일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번 영화를 통해 던지고 싶었던 질문은 무엇일까? “저는 예전부터 ‘만약 자신이 스스로 확신한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면?’이라는 테마를 머릿속에 갖고 있었고 그걸 영화로 표현했죠. 해리와 에리카는 영화에서 처음 만나 사랑하기 시작하는데, 그에 반해 이 영화는 두 사람의 이혼 후에 대한 이야기예요. 그리고 ‘만약 진짜 모든 문제들이 사라졌다면, 이혼 10여 년 후 그 사람과 다시 사랑할 수 있는 상황이 될까?’라는 질문에 대한 영화죠. 그 30년간의 관계를 가진 커플들에 대한 영화.”
항상 인생과 사랑의 깊은 이야기를 유쾌하게 만들어온 낸시 마이어스. 앞으로도 여자의 심리와 관련한 영화를 만들 것인지 묻자 이 시점에서 자신의 노선이 굳이 변할 것 같지는 않단다. 낸시 마이어스의 다음 작품이 벌써 기대되는 건 나만이 아닐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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