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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 스튜디오]국내 유일의 파이프오르간 마에스트로 홍성훈 씨 소리 건축가의 꿈
우리나라에서 파이프오르간이 제작된다는 사실, 알고 있었는가? 중세 유럽의 분위기가 물씬 나는 이 거대한 악기가 10년 전부터 한국에서, 한국인의 손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그 주인공은 독일 정부가 인정한 파이프오르간 마에스트로 홍성훈 씨다. 아홉 번 째 제작하는 파이프오르간의 막바지 작업 중인 그를 만나러 양평 작업실로 떠났다.


“두 달 전에 왔다면 파이프오르간의 형체를 보지 못했을 것이고, 다 완성된 뒤에 왔다면 지금처럼 내부를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파이프 900여 개가 들어가는 파이프오르간의 막바지 작업을 하고 있는 홍성훈 씨.

아직까지 우리에게 파이프오르간은 낯설고 이국적인 악기다. 대형 연주홀이나 교회에서나 볼 수 있고, 그나마도 직접 연주를 들을 기회가 흔치 않다. 그런데 피아노나 바이올린이라면 모를까, 파이프오르간을 만드는 장인이 우리나라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놀라웠다. 그 주인공은 홍성훈 씨. 그는 독일어로 오르겔 바우어 Orgel Bau(파이프오르간 제작자)다. 오르겔 바우어 중에서도 독일 정부가 공인하는 마이스터(마에스트로) 자격증을 딴 장인이니, 그는 독일에서 오르겔 마이스터(파이프오르간 장인)로 불린다.
양평에 있는 홍성훈 씨의 스튜디오에서는 그의 9번째 작품이 막바지 작업을 거치고 있었다. 파이프오르간 한 대를 만드는 과정은 한 편의 대서사극 같다. 짧은 에피소드처럼 작은 부품 한 세트를 만들고, 이것을 모으고 결합해 완성한다. 이렇게 한 대를 완성하는 데 꼬박 1~2년을 매달린다.
사실 파이프오르간의 소리만 들어봤을 뿐, 어떤 메커니즘으로 작동되는지를 알 기회는 없었다. “연주하는 모습이 유사하다는 이유로 파이프오르간을 피아노의 친척쯤으로 알지만 원리가 전혀 다른 악기입니다. 한마디로 파이프오르간은 무수한 관악기의 오케스트라라고 보면 됩니다. 건반을 누르면 크기, 재료가 다른 파이프 수백 개 중 일부에 바람이 들어가 소리를 내는 것이지요.”
작업실에는 곧 합체할 각양각색의 파이프가 진열되어 있었다. 밝은 소리를 내는 금속(주석과 납의 합금) 파이프와 구름처럼 부드러운 소리를 내는 나무 파이프로 나뉜다. 홍성훈 씨가 하나를 들어서 불어 보였다. 뿔피리처럼 뭉툭한 소리. 여기에 모양이 다른 파이프를 더해 둘을 함께 불었다. 다소 밋밋하고 답답하던 소리가 확 트인 소리로 바뀌었다. 신기하게도 색은 섞을수록 탁해지는데 반해 소리에 다른 소리를 더하니 맑고 환해진다. 파이프오르간 장인은 수백 개의 소리로 음악을 건축하는, 소리의 건축가임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1 홍성훈 씨가 구상하고 있는 파이프오르간.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닮은 신비한 디자인이다.
2 짜잔! 파이프오르간 내부는 이렇게 생겼다. 현재 파이프 세트를 설치하는 중이며, 조만간 900여 개의 파이프로 가득 차게 된다.



파이프오르간 제작은 여러 명의 협업으로 이루어진다. 왼쪽부터 목공 장인 이장희 소장, 건축을 공부한 최영하 씨, 미술을 공부한 현동욱 씨. 가구부터 한옥까지 다양한 목공 작업을 해온 이장희 소장은 “파이프오르간 만드는 건 한옥보다 더 복잡하다”고 말한다.

고난의 세월로 조율하는 파이프오르간 그가 건물 설계도 같은 복잡한 도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파이프오르간 장인이 되려면 건축과 설계는 물론, 디자인, 전기, 컴퓨터, 목공 등을 두루 공부해야 합니다. 종합예술가가 되어야 하지요.” 부품 3000~6000개가 거미줄처럼 얽혀 있기에 아무리 철저히 준비해도 변수가 생기기 마련. 여기서 마에스트로의 손길이 필요하다. 예측할 수 없는 변수까지 감안하는 것이 마에스트로의 역할이다. 이렇듯 기술 이상의 그 무엇을 갖춘 마에스트로가 되기 위해서는 도제 수업을 거쳐야 한다. 홍성훈 씨도 독일에서 한 스승 밑에서 11년간 배웠다. 그 끝에 1997년, 독일 정부가 주최하는 마에스트로 시험을 치렀다. 응시한 사람 7명 가운데 그는 유일한 동양인이었다. 너무 긴장해 음계를 죄다 거꾸로 설치하는 우여곡절 끝에 시험에 당당히 합격했다. “사실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시험이었어요. 외국인에게 마에스트로 자격을 호락호락 주나요, 안 주지. 우리나라에서 서양인에게 인간문화재 자격을 주는 격이잖아요. 어려운 일이죠.”
음악이나 미술에 특별한 재능이 있었기에 마에스트로가 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천만에요. 저는 대학교 때 산업공학을 전공했고, 졸업 후에는 다양한 직업을 전전했던 사람인걸요. 요트 강사도 해봤고, 대금, 탈춤도 배웠고, 뮤지컬 배우도 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죠. 잡기에 능한 사람은 불안하다. 모든 걸 다 잘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한 가지에 전념하는 게 좋겠다….” 그래서 그는 26세 되던 해 기타를 배우겠다며 홀연 독일로 갔다. 음악학원 시험에도 떨어져 혼란스러울 때, 한 선배의 권유로 파이프오르간 장인의 길에 들어섰다.
“선뜻 그 결심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중학교 2학년 어느 날의 기억 때문인 것 같아요. 동네 교회에서 서양 사람 두 명이 파이프오르간을 조립하던 모습을 봤는데, 일하는 중이라기보다는 성스러운 임무를 수행하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며칠 뒤 붙박이장 같은 그 악기에서 ‘바앙~’하며 환상적인 소리가 났지요.” 소리는 아름답지만, 배우는 과정은 질리도록 험난했다. 게다가 독일어도 익혀야 하지, 낯선 문화도 체득해야 하지, 동양인을 우습게 보는 그들의 시선을 버텨야 하지…. 머리가 하얗게 셀 정도로 청춘을 파이프오르간에 헌납했다. 고생 끝에 한국에 금의환향했는데, IMF 외환위기가 터졌다. 몇 년간 10원도 벌지 못했다. ‘파이프오르간이 없어도 사람 사는 데 지장 없구나’하며 자조했다. 플루트 연주자인 아내가 강습을 하며 번 돈으로 근근이 버티다가, 마침내 한국에서 그의 첫 작품을 만들 기회가 생겼다. ‘하늘의 영광’이란 뜻의 파이프 소리 ‘셀레스테’가 들리는 듯했다. 이 아름다운 악기와 영영 헤어지라는 법은 없구나 싶었다.
“몇 백 개 넘는 파이프가 일제히 울려 퍼지면, 귀뿐 아니라 온몸이 전율해요. 그런데 이 소리는 어떻게 해서 만들어졌을까, 오랫동안 고민해봤어요. 어쩌면 중세시대에 누군가 밤하늘의 별빛을 보다가 영감을 받은 게 아닐까요? 별빛 가득한 이 광활한 우주 앞에 인간은 하나의 왜소한 존재잖아요. 도대체 이 우주는 어떻게 만들어졌을지, 그 경이로움을 표현하고자 악기들의 우주라 할 수 있는 파이프오르간을 고안한 게 아닌가….”

한국적인 파이프오르간이 울려 퍼질 그날 홍성훈 씨는 고백했다. 처음엔 유럽 악기 제작을 배워왔다는 게 좀 찜찜했다고. 그러던 어느 날, 파이프오르간을 우리 땅에서 우리 문화로 녹여내 재창조하겠다는 비전을 세운 뒤 자신이 생겼다고. “필리핀 라스피나스 성당의 파이프오르간이 유명한 이유는 그 동네에서 나는 대나무로 파이프를 만들어 넣었기 때문입니다. 그 나라 사람들에게는 늘 바람결에 듣던 뒷동산 대숲 소리만큼 좋은 음악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홍성훈 씨도 파이프오르간에 우리 소리를 접목하고 있다. 현재 제작하고 있는 파이프오르간에는 ‘piri(피리)’ 버튼이 달려 있다. 세계 최초로 피리 소리가 나는 파이프오르간이 곧 탄생할 것이다. 언젠가는 대금이나 퉁소 같은 소리도 파이프오르간으로 만들어낼 것이다. “한국에서 파이프오르간을 만든다는 행위는 하나의 새로운 문화를 퍼뜨리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전통 악기도 사실은 그 옛날 왕산악이나 우륵 같은 선구자들이 중국과 서양에서 온 악기를 우리 식으로 재창조한 겁니다. 제가 우리 땅에서 만들기 시작하는 파이프오르간도 몇 백 년 뒤에는 우리 악기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지요.”
한국에서 작업을 개시한 지 12년째, 지금껏 똑같은 파이프오르간은 한 번도 만들지 않았다. 실험적인 작품도 많다. 구로 아트밸리 콘서트홀에 연주자 없이 컴퓨터 센서로 연주되는 파이프오르간을 설치했고, 곧 이동 가능한 미니 파이프오르간을 만들 구상을 하고 있다. “높이 1m 정도 되는 아담한 파이프오르간입니다. 작은 연주장이나 야외에서도 쓸 수 있겠지요. 옻칠한 나무로 외관을 장식해 디자인 또한 독특한 작품이 될 것 같아요. 언젠가는 파이프를 불규칙하게 겹쳐서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닮은 파이프오르간도 만들어볼 생각이고요.”
이런 꿈을 꿔본다. 우리 세대가 교실에서 듣던 풍금 소리를 회상하면 아련해지듯, 다음 세대가 교회나 연주장에서 듣던 한국식 파이프오르간 소리를 떠올리며 어린 시절을 추억할 것이라고. 피리뿐 아니라 나팔, 태평소, 생황 같은 우리 악기 소리를 담은 파이프오르간이 세계의 명품으로 손꼽히는 때가 올 것이라고.

4 작은 오차로도 소리가 크게 달라지기에, 홍성훈 씨는 매 순간 긴장을 늦출 수 없다.

파이프오르간 속 파이프의 비밀
1 파이프를 지지하는 나무. 파이프 두께와 파이프 사이의 간격을 고려해 구멍을 뚫는다.
2 나무 파이프는 부드러운 소리가 나며, 입구의 모양에 따라 음색이 다르다.
3 금속 파이프는 석과 납의 합금으로 만드는데. 합금의 비율, 모양에 따라 소리가 달라진다. 축제 때 쓰는 악기 팡파레, 발트 플룻, ‘영광’이란 뜻의 셀레스테 등 파이프오르간 한 대에는 수십 가지 관악기가 들어간다.

나도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0년 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