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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무지 말하는 법을 몰랐으니
말에 관한 한 나는 젬병이다. 단둘이 나누는 대화는 물론이고 어쩌다 강단에 설라치면 다리가 후둘거린다. 20대 초반에는 대인공포증이 아닌가 싶어 병원 문 앞을 서성거릴 정도였다. 대학교 신입생 시절, 낯선 사람 앞에서는, 남녀를 불문하고 얼굴이 붉어지는 나를 보고 걱정이 되었던지, 시 쓰는 선배가 내 소매를 붙잡고 연극부에 들여보냈다. 희한했다. 무대에 서면 떨리지 않았다. 무대에 올라가면 얼굴색이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대에서 내려오면 다시 ‘원위치’였다. 첫 미팅 때, 내가 한 말은 단 한마디였다. “혹시 시 좋아하세요?” 하이고! 수많은 질문 중에서 고작 시를 좋아하느냐고 묻다니. 이름은 진작 잊었고, 얼굴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으니, 그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기억나는 것이 없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도 그녀에게 미안하다. 아, 그녀는 속으로 얼마나 답답했을까. 내가 얼마나 우습게 보였을까. 그 미팅이 마지막이었다. 그 후로 나는 맞선조차 보지 않았다. 한 여자를 그야말로 죽어라고 쫓아다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5년 하소연한 끝에 결혼했다), 낯선 여자 앞에 앉아서 이것저것 ‘심문’하거나, ‘취조’당하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유사 대인공포증은 대학을 졸업하고 기자 생활을 할 때도 사라지지 않았다. 특히 취재원이 점심이나 저녁을 같이 먹자고 하면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피했다. 낯선 사람과 함께 밥을 먹는 일은 미팅이나 맞선 못지않게 힘들었다. 내 사회성 지수는 거의 마이너스 수준이었다. 나는 사회적 동물이라면 당연히 갖고 있어야 할 유전자가 몇 개 부족했다. 결혼하고 나면, 아내에게만은, 아이들에게만은 말 잘하는 남편, 아빠가 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나는 무뚝뚝한 가장이었다. 무뚝뚝한 가장은, 결혼과 연애를 구분하지 않으려드는 신혼의 아내와 자주 다투었다. 다툰 정도가 아니라, 치열하게 싸웠다. 아내는 내가 한마디 대꾸도 안 하는 것이 더 견디기 힘들었던가 보다. 아, 나는 나쁜 남편, 안 좋은 아빠였다.

뒤늦게 말에 관한 실용서 두 권을 탐독했다. 하나는 칭찬을 하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네 가지 말을 잘 구사하라는 것이었다. 앞의 책은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켄 블렌차드 외 지음, 조천제 옮김, 21세기북스)이고, 뒤의 책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4가지 말>(아이라 바이옥 지음, 곽명단 옮김, 물푸레)이다. 앞의 책은 3톤이 넘는 범고래를 조련시키는 노하우를 인간관계에 적용한 것으로 관심과 격려, 칭찬이 가족은 물론 조직을 활성화한다는 메시지였다. 뒤 책은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당신을 용서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 네 가지 말이 상대방은 물론, 그렇게 말하는 자기 자신까지 거듭나게 한다고 강조한다. 이 책은 특히 용서의 위력에 주목한다. 미국에서 25년간 호스피스와 고통 완화 치료 분야에서 전문의로 활동한 저자는 ‘마음의 경제학’을 제시한다.

용서는 마음의 경제학이다. 용서는 결코 이타적 행위가 아니며, 너그러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도 아니다. 누군가를 용서하지 않는 것은, 평생 그 누군가 때문에, 그 상처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며 살겠다고 작정하는 것과 다름없다. 누군가를 용서하는 것은 단 한 차례의 비용을 지불해, 과거에서 해방되는 것이라고 이 책은 말한다.

40대 중반을 넘어선 뒤에야 ‘말하는 법’을 배우고 있으니, 나는 참 ‘한심한 영혼’이다. 하지만 이 뒤늦은 ‘옹알이’를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나에게는 아직 살아가야 할 날들이 제법 있고, 또 가족과 이웃, 벗들과 선후배, 또 앞으로 만나야 할 무수한 사람들이 있다. 상대방의 나쁜 구석보다 좋은 점을 먼저 발견하려고 애쓰고, 그것을 즉각 단정한 표현으로 드러낼 것이다. 용서를 빌고, 용서를 할 것이다. 고맙다고 말하고, 그 고마움을 잊지 않을 것이다. 아내에게, 아이들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것이다.

얼마 전, 아내와 가볍게(요즘은 심각해지지 않는다) 말다툼을 한 적이 있다. 작업실로 나오면서 아내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미안하다. 고맙다. 못난 남편.’ 즉각 응답이 왔다. 아내는 나를 용서하면서, 자기도 잘못이 있다고 덧붙였다. 고등학교 3학년짜리 딸애에게도 문자 메시지를 자주 보낸다. 그 짧은 문장들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네 가지 말과 칭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한없이 시에 가까운 문장들이다.

 
1. 글 이문재(시인) | “예” “바쁩니다” 또는 “용건만 간단하게요”. 위에 쓰신 대로 시인의 목소리는 투박하고 건조하게 끊어집니다. 상대를 긴장하고 경계하게 만드는 그 딱딱한 껍데기 속에서 연하고 보드라운 속살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옹알이’가 끝나면 시인의 말하는 방식과 시 세계가 좀 달라지겠지요. 기대도 크지만 가끔 그의 시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와 같은 옛 시들이 그리울 겁니다. 지난해 중순까지 <시사저널>의 취재부장이었던 그는 마감 없는 세상에 살고 싶어 기자 생활을 접었답니다. 지금은, 한편으로는 시를 쓰고 다른 한편으로는 경희사이버대와 경희대에 출강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그가 시인이 된 지 25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문재(시인)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6년 5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