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라지 하고는~” “어이 상실, 개념 상실, 인격 상실에다가 기억까지 상실”(환상의 커플), “고미남, 앞으로 네가 날 좋아하는 걸 허락해준다”(미남이시네요). 이제껏 드라마에서 만나볼 수 없었던 엉뚱하고 개성 넘치는 대사, 때로는 <개그콘서트>보다 더 웃기고 때로는 순정 만화보다 가슴 설레게 하는 드라마로 인기 있는 드라마 작가 홍정은・홍미란씨. 홍씨 성을 가진 세 살 터울의 친자매가 공동으로 대본을 쓰기 때문에 방송계에서는 ‘홍자매’로도 불린다. 데뷔작인 <쾌걸 춘향>이 30%가 넘는 높은 시청률로 대박을 터트린 이후 <마이걸> <환상의 커플> <쾌도 홍길동> 그리고 얼마 전 종영한 <미남이시네요>를 통해 ‘만화적 감수성’을 드라마로 실현하고 있다는 평을 받는다. 기존의 드라마 장르에서 벗어나 ‘홍자매표 판타지 월드’를 구축한 것에는 드라마를 대하는 자매의 바람도 무관하지 않다. “다른 세상에 가 있는 느낌으로 현실의 시름을 잊고, TV를 보는 순간만큼은 위로가 되고 휴식이 됐으면 합니다.” 시청자에게 날것 그대로의 삶을 보여주거나 교훈과 훈계를 하기보다 행복한 웃음을 주기 위해 24시간 붙어서 회의하며 극본을 쓴다는 홍정은・홍미란 작가를 만나 그들의 작업과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자매가 나란히 예능 프로그램 구성 작가 출신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예능 프로그램 구성 작가로서 입지가 단단하게 다져질 때쯤 같이 드라마 작가로 방향을 틀었는데, 어릴 적부터 드라마 작가가 자매의 꿈이었는지요? 꼭 그렇다기보다 둘 다 텔레비전을 정말 좋아했어요. 아침마다 신문이 배달되면 제일 먼저 TV 프로그램 편성표부터 펼쳤죠.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방송계로 들어왔고, 동생인 미란이도 마찬가지로 3~4년 후 예능 프로그램 구성 작가가 되었습니다. 그때는 따로 활동했는데 같이 텔레비전 보고 책 읽는 게 취미라서 매일 이야기하다 보니 성격은 달라도 비슷한 공감대가 형성된다는 걸 알았죠. 흔들리는 여자 캐릭터, 진한 연애 이야기를 싫어하는 것이 특히 비슷했습니다. 의기투합해서 같이 드라마를 썼는데 그게 <쾌걸 춘향>이었고 첫 작품치고 참 잘돼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쭉 함께하게 됐습니다.
드라마를 쓸 때마다 집을 떠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미남이시네요>도 남해의 한 펜션에서 탄생했다는데 사실인가요? 집에 있으면 사람들과 어울려 커피도 마셔야 하고 집안일도 해야 해 드라마를 쓰는 데 집중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감옥에 간다고 생각하고 집을 떠납니다. 이번에는 남해로 간다고 하니 경치 구경하며 맑은 공기 속에서 글 쓰러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던데, 실상은 5평 남짓한 쪽방에 앉아서 대본만 썼어요. 그곳 사람들이 뭐 하는 애들인지 이상하게 볼 정도로 방에 처박혀 일만 했지요. 예전에 속초에서 작업할 때는 근처 코다리 공장에서 일하는 중국인 근로자로 오해받았을 정도라면 짐작이 가세요?
외롭고 힘든 작업이지만 공동으로 집필하니까 좀 더 견디기 쉽지 않나요? 어떻게 작업이 이뤄지는지 궁금합니다. 대본을 나눠 쓰지 않고 100% 같이 쓴다는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모니터 앞에 나란히 앉아서 씁니다. 공동 작업을 하는 경우 반씩 나눠 쓰거나 멜로 신, 액션 신은 구분해서 쓴다고 하던데, 우리는 처음부터 이야기하면서 같이 써나갑니다. 아이디어 회의하듯이 의견을 주고받으며 스토리를 발전시키죠. 대사 하나를 쓰더라도 마찬가지예요. 남자주인공 태경이가 “고미남, 앞으로 네가 날 좋아하는 걸 허락해준다”라고 말한 대사도 “허락할까?” “허락하노라?” “허락한다?” 이렇게 여러 번 대사를 서로 주고받으며 결정한 후 쓰는 거죠.
공동 작업을 하는 데 가족이기에 더 좋은 점도 있나요? 우리는 같이 쓰기 때문에 생각하는 것도 같아야 해요. 서로의 머릿속에 있는 캐릭터가 다르면 전혀 엉뚱한 이야기가 돼버리죠. 그래서 대본을 쓸 때만 같이 있는 게 아니라 24시간 부대끼며 대화를 나눠요. 평소 함께 생활하는 게 쌓여야만 생각하는 게 같아져요. “대본 쓸 때만 출퇴근 개념으로 만나서 하면 어때?”라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그렇게 해서는 생각이 완벽하게 일치하기 어려워요. 그런데 만약 남남이면 24시간 붙어 있을 수 있을까요? 그런 측면에서 가족이라는 게 편하죠. 그리고 서로 의견이 다를 때 남이면 쉽게 ‘아닌 거 같다’ 말하기가 어렵잖아요. 하지만 가족이므로 아닌 건 아니라고 편하게 말할 수 있고, 바로 방향을 틀어서 더 좋은 이야기로 발전시킬 수 있어요. 한핏줄이기 때문에 서로 공을 따지지 않는 점도 좋고요.
형제가 둘뿐인가요? 1남 4녀 중 제(홍정은)가 첫째이고 홍미란이 셋째예요. 미국에 있는 둘째 빼고 나머지 남매가 모두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면서 자주 모이고 친하게 지내요. 그렇지만 서로 성격은 조금씩 다릅니다. 우리(홍정은・홍미란)는 꾸미는 데 도통 관심이 없고 같이 드라마, 책, 영화 이야기 하는 걸 좋아해요. 그래서 쉬는 날에도 만화책 쌓아놓고 읽는 게 주요 일과예요. 반면 둘째 영은이와 넷째 민기는 좀 더 여성스럽고 가정적이에요. 현재 넷째는 어린이집을 운영하면서 10개월 전에 태어난 제 아들(홍정은 씨는 벌써 10년 차 주부다)을 거의 전담해서 키워주고 있어요. 그래서 아직 우리 아기는 이모를 엄마로 알고 있죠. 나중에 더 크면 “사실 내가 네 엄마다”라고 출생의 비밀을 알려줄 생각이에요.
아버지를 존경한다는 이야기를 여러 기사에서 봤습니다. 창작의 원동력으로 아버지를 꼽은 적도 있고요. 보통 딸들은 어머니부터 떠올리기 쉬운데,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아버지는 사람은 자기 밥값을 해야 한다는 신념이 뚜렷하신 분입니다. 살면서 밥값, 돈값을 해야 한다는 것, 여자도 결혼 후 자기 밥벌이는 해야 한다는 마인드를 가지셔서 항상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말을 딸들에게 하세요. 아버지 역시 몸소 보여주시고요. 이제 당신이 직접 일을 하지 않아도 될 위치지만, 아직도 1년에 1/3 이상 해외에 다니면서 일을 하세요. 그렇게 바쁜 와중에도 항상 우리 자매가 밥값, 돈값을 잘하고 있는지, 그래서 우리 드라마가 잘되고 있는지 무척 신경을 쓰시죠. 아마 방송국 드라마 편집국장님보다 더 열심히 시청률을 체크하실걸요?
이런 아버지의 관심에 압박감이나 중압감을 느끼지는 않습니까? 만약 방송국이나 제작사에서 그랬다면 부담이 되겠지만 우리 아버지인걸요. 드라마가 잘 안 된다고 해서 호통을 치시는 게 아니라 앞길을 제시해주고 격려해주시죠. 반면 어머니는 딸 드라마라도 재미없으면 안 보고 주무시는, 드라마 좋아하는 평범한 주부세요. “목욕탕에 갔더니 누구 사인 받아 오라더라” 이런 말을 전하시곤 하는데, 그러면 요즘 누가 떴는지, 어떤 캐릭터가 인기인지 알 수 있어요.
(왼쪽) 그동안 집필한 드라마 대본들
자매가 같이 한 작업의 결과물이 차곡차곡 쌓인 만큼 그들 간의 가족애도 더욱 커졌다.
가족이란 ‘피로 맺어진 절대로 배신하지 않는 관계’라고 유쾌하게 이야기하던 그들. 앞으로도 자매가 따로 드라마를 쓸 일은 없을 것이라며 홍자매표 드라마는 계속될 것이라고 했다.
<미남이시네요>가 아이돌 그룹이 주인공이라 10대만 좋아할 거라는 생각과 달리 시청률 조사 결과 30대에서 가장 높게 나왔다고 합니다. 전작들도 마찬가지였는데 그 이유가 뭘까요? 아이돌 그룹은 배경일 뿐이고 사랑 이야기가 주된 줄거리죠. 꽃미남 아이돌 그룹에 들어온 남장 여자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랑 이야기. 30~40대가 좋아하던 순정 만화 <캔디캔디>나 강경옥 씨의 만화 <별빛 속에> 등이 떠올라서 그때의 감성을 자극한 거죠. 그리고 또 다른 이유라면 모든 나이대의 여자들이 공통으로 가지는 로망 때문 아닐까요. 비록 여주인공의 사랑을 얻지 못해도 항상 그림자처럼 여주인공만을 사랑하고 지켜주는 남자가 등장해 여심을 흔들었죠.
이번 드라마를 통해 주인공 역의 장근석이라는 배우를 다시 보게 됐습니다. 그의 안티 팬 수가 확 줄었다는 게 기사화될 정도였죠. 연기를 잘하기도 했지만 캐릭터의 힘도 컸습니다. 드라마를 구상할 때 가장 공을 들이는 게 캐릭터입니다. 시청률이 40~50%가 넘는 소위 초대박 작품이 아니더라도 화제가 되고 오래 남는 이유는 캐릭터가 인기 있기 때문이죠. 예컨대 <환상의 커플>의 경우에도 한예슬 씨가 맡은 ‘나상실’이 많은 사랑을 받은 덕분에 아직도 <환상의 커플>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있어요. <로마의 휴일>의 오드리 헵번이 그렇듯 말이죠. 내용은 다 잊어도 그때 나왔던 캐릭터가 기억에 남는 겁니다.
개성 있는 캐릭터가 모여 만화 같은 내용이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홍자매표 드라마는 보는 관점에 따라 유치하다고 느낄 수도 있는데, 대신 온 가족이 모여 앉아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는 드라마이고 보다 보면 어느새 행복해지는 드라마인 것 같습니다. 유치하고 손발이 오그라지면서 보는 드라마, 만만한 드라마가 우리 드라마입니다. 이런 드라마는 감정 이입도 쉽고 이야기하기도 쉽지요. 팬들이 유치하지만 보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깊이 빠진다고 해요. 생각할 것도 많은 요즘, 어려운 내용보다 사람들에게 ‘빵 터지는 웃음’을 주고 ‘비타민’ 같은 활력소가 되는 드라마를 쓰고 싶어요. 드라마 곳곳에 패러디나 상상 신 같은 코미디 요소가 많은 이유도 그 때문이지요 .웃음을 줘야 한다는 강박 관념이 생길 정도예요.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거나 골치 아픈 문제로 우울해서 무심코 텔레비전을 틀었을 때, 그때 나오는 우리 드라마가 사람들의 휴식이 됐으면 합니다.
자매간의 찰떡궁합과 든든한 버팀목이 돼주시는 부모님이 계시기에 훌륭한 드라마가 나오는 것 같습니다. ‘가족이 나의 힘’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네요. 끝으로 다음 작품을 계획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2010년 7~8월을 목표로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가제)>라는 드라마를 구상하고 있습니다. 어떤 남자가 구미호 한 마리를 키우며 구미호에게 간을 빼 먹힐까 봐 전전긍긍하는 내용이에요. 현대물이고 로맨틱 코미디, 판타지 멜로가 될 것입니다. 아마 저희 드라마 중에서 제일 웃기면서 슬픈 이야기가 될 거 같아요. 기대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