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량(사찰 경내)에 핀 금목서가 온 천지에 향수를 뿌린 듯 진동하여 일주일 동안 꽃향기에 취해 정결하고 쾌적한 행복을 맛보았다. 어리디어린 좁쌀만 한 꽃망울이 겨자 씨처럼 맺어 어디서 황금빛 물감을 뒤집어쓰고 나온 것인지 금가루가 어찌 저리 고울 수 있을까. 이리도 작은 꽃망울 한 가닥에서 피어오르는 기운이 우주 만물의 에너지 속에서 퍼지는 근원과 하나라는 것을 생각하면 놀라움이 그 순수의 밑바닥으로 벅차오른다.
한 그루의 꽃나무가 아낌없이 만드는 행복의 맛, 그걸 생각하면서 나 아닌 타자에게 이기심 없는 속마음, 순수무구한 에너지를 몇 냥이나 피어낼 수 있을까.
타인은 고사하고 나 자신의 영혼은 얼마나 아름다운 향기를 풍기며 살아온 것인가. 번뇌, 망상, 탐욕, 이기심, 어리석음, 시기, 질투, 허영, 사치 등 무수한 것들의 악취가 새삼 나를 부끄럽게 할 뿐 내 영성의 뜨락에 한 줌 꽃그늘조차 드리우지 못한 것 같다.
내가 18년 동안 살았던 초의 스님의 암자 일지암이나 이곳 백련사에 많은 탐방객들이 드나든다. 내 영혼이 썩 맑지 못하나 그래도 한 40년 가까이 수행이라도 해온 탓인지 내게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지침을 묻기도 하고 어찌 살아야 잘 사는 일인지도 묻는다.
나는 그럴 때마다 30년을 살아온 사람에게든 50년을 살아온 사람에게든 되묻곤 한다. 당신 나이의 무게만큼 당신의 마음을 얼마나 들여다보려고 노력하며 살았느냐고. 다시 말해 당신은 하루를 살아가면서 진정 당신이라는 주인공, 영혼이라고 해도 좋고 불성이라고, 하느님이라고 해도 좋은, 당신의 본래 마음(영성)을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고 사느냐고 말이다.
백이면 백 모든 사람들이 얼굴을 붉힌다. 그렇다. 부끄러워 참으로 부끄러워할 일이다. 생을 끝없이 살기나 하는 것처럼, 아니 일생 동안 자기를 이끌고 온몸의 주인인 영혼에게는 그야말로 소홀한 것이다. 영혼의 거푸집인 몸(육신)한테는 그야말로 온갖 것 아낌없이 투자하고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조금만 더러워도 손발은 말할 것도 없고 날마다 샤워하고 사우나한다. 그것뿐인가. 날마다 화장하고, 거울 들여다보고, 틈만 나면 화장 고치고, 입히고, 먹이고, 잠재우고, 그것도 허구헌 날 잘 입히고, 잘 먹이고 수미산만큼 히말라야산만큼, 태평양, 바다, 물보다 더 많은 것으로 입고, 눈・귀 감각 육신을 위해 아낌없이 투자하고 소비하고 낭비하며 그걸 위해 전쟁만큼 경쟁하고 악다구니하고 몸부림치는데 과연 그것이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는 일일까. 우리가 꿈꾸는 생의 열락, 행복이라는 맛이 이런 데 있다면 왜 사람들은 나의 질문(당신의 영혼을 위해 얼마나 애쓰고 있는가)에 부끄러워할까.
늦지 않았다. 이제부터라도 육신의 본래 주인인 마음의 영성에 투자하자. 마음을 닦는 데는 돈도 물질도 그 어떤 소비의 대가를 치르지 않고 시간과 노력을 집중하는 명상(참선)으로 큰 것을 얻을 수 있다.
한 칸 차실 갖기. 넓은 차실을 만들 필요는 없다. 앉은 그 자리, 좌복(방석) 크기의 공간이면 충분하다. 방석 하나 크기의 주인공을 선가에서는 조실, 방장이라고 부르는데 방장은 선림 禪林의 최고 어른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주인인 영혼을 다스리는 주인공을 방장이라고 한다.
우리는 차실 한 평 한 칸의 주인이 되어 자신의 본래 마음을 다스리는 차인이 되어야 한다. 이런 차실 갖기 운동을 하자. 어떤 공간, 어떤 장소에서도 좌복 한 평에 몸을 곧바로 세우고 생각을 집중하여 호흡을 고르고 그런 다음 물을 끓이고 찻잔 덥히어 차를 우리고(포법 泡法) 맑은 색 향미가 감도는 차를 한잔 내어서 자기를 들여다보는 나는 누구일까? 지금 차 마시는 주인공은 누구일까?
이렇게 차를 마시는 차실을 명상의 공간으로, 자기 우주를 만나는 공간으로 꾸리면 우리가 얻고자 하는 행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자기가 사는 어떤 곳에서도, 자기가 움직이는 어떤 장소에서도 차실을 만들 수 있을 때 우리 영혼이 안주하는 그야말로 행복이 가득한 집, 곧 한 평의 평화로운 차실이 되는 것이다.
여연 스님은 초의선사의 맥을 따라 40여 년 동안 우리 차의 전통을 이어왔다. 우리 차의 역사와 의미, 전통 제다와 행다법 등 차 문화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낸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차>(현암사)를 저술했다. 현재 백련사에서 초의 스님의 선차 정신을 잇고 있다.
*한 칸 다실 갖기 캠페인은 농림수산식품부, 문화체육관광부, 아모레퍼시픽 설록이 후원합니다.
한 그루의 꽃나무가 아낌없이 만드는 행복의 맛, 그걸 생각하면서 나 아닌 타자에게 이기심 없는 속마음, 순수무구한 에너지를 몇 냥이나 피어낼 수 있을까.
타인은 고사하고 나 자신의 영혼은 얼마나 아름다운 향기를 풍기며 살아온 것인가. 번뇌, 망상, 탐욕, 이기심, 어리석음, 시기, 질투, 허영, 사치 등 무수한 것들의 악취가 새삼 나를 부끄럽게 할 뿐 내 영성의 뜨락에 한 줌 꽃그늘조차 드리우지 못한 것 같다.
내가 18년 동안 살았던 초의 스님의 암자 일지암이나 이곳 백련사에 많은 탐방객들이 드나든다. 내 영혼이 썩 맑지 못하나 그래도 한 40년 가까이 수행이라도 해온 탓인지 내게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지침을 묻기도 하고 어찌 살아야 잘 사는 일인지도 묻는다.
나는 그럴 때마다 30년을 살아온 사람에게든 50년을 살아온 사람에게든 되묻곤 한다. 당신 나이의 무게만큼 당신의 마음을 얼마나 들여다보려고 노력하며 살았느냐고. 다시 말해 당신은 하루를 살아가면서 진정 당신이라는 주인공, 영혼이라고 해도 좋고 불성이라고, 하느님이라고 해도 좋은, 당신의 본래 마음(영성)을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고 사느냐고 말이다.
백이면 백 모든 사람들이 얼굴을 붉힌다. 그렇다. 부끄러워 참으로 부끄러워할 일이다. 생을 끝없이 살기나 하는 것처럼, 아니 일생 동안 자기를 이끌고 온몸의 주인인 영혼에게는 그야말로 소홀한 것이다. 영혼의 거푸집인 몸(육신)한테는 그야말로 온갖 것 아낌없이 투자하고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조금만 더러워도 손발은 말할 것도 없고 날마다 샤워하고 사우나한다. 그것뿐인가. 날마다 화장하고, 거울 들여다보고, 틈만 나면 화장 고치고, 입히고, 먹이고, 잠재우고, 그것도 허구헌 날 잘 입히고, 잘 먹이고 수미산만큼 히말라야산만큼, 태평양, 바다, 물보다 더 많은 것으로 입고, 눈・귀 감각 육신을 위해 아낌없이 투자하고 소비하고 낭비하며 그걸 위해 전쟁만큼 경쟁하고 악다구니하고 몸부림치는데 과연 그것이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는 일일까. 우리가 꿈꾸는 생의 열락, 행복이라는 맛이 이런 데 있다면 왜 사람들은 나의 질문(당신의 영혼을 위해 얼마나 애쓰고 있는가)에 부끄러워할까.
늦지 않았다. 이제부터라도 육신의 본래 주인인 마음의 영성에 투자하자. 마음을 닦는 데는 돈도 물질도 그 어떤 소비의 대가를 치르지 않고 시간과 노력을 집중하는 명상(참선)으로 큰 것을 얻을 수 있다.
한 칸 차실 갖기. 넓은 차실을 만들 필요는 없다. 앉은 그 자리, 좌복(방석) 크기의 공간이면 충분하다. 방석 하나 크기의 주인공을 선가에서는 조실, 방장이라고 부르는데 방장은 선림 禪林의 최고 어른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주인인 영혼을 다스리는 주인공을 방장이라고 한다.
우리는 차실 한 평 한 칸의 주인이 되어 자신의 본래 마음을 다스리는 차인이 되어야 한다. 이런 차실 갖기 운동을 하자. 어떤 공간, 어떤 장소에서도 좌복 한 평에 몸을 곧바로 세우고 생각을 집중하여 호흡을 고르고 그런 다음 물을 끓이고 찻잔 덥히어 차를 우리고(포법 泡法) 맑은 색 향미가 감도는 차를 한잔 내어서 자기를 들여다보는 나는 누구일까? 지금 차 마시는 주인공은 누구일까?
이렇게 차를 마시는 차실을 명상의 공간으로, 자기 우주를 만나는 공간으로 꾸리면 우리가 얻고자 하는 행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자기가 사는 어떤 곳에서도, 자기가 움직이는 어떤 장소에서도 차실을 만들 수 있을 때 우리 영혼이 안주하는 그야말로 행복이 가득한 집, 곧 한 평의 평화로운 차실이 되는 것이다.
여연 스님은 초의선사의 맥을 따라 40여 년 동안 우리 차의 전통을 이어왔다. 우리 차의 역사와 의미, 전통 제다와 행다법 등 차 문화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낸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차>(현암사)를 저술했다. 현재 백련사에서 초의 스님의 선차 정신을 잇고 있다.
*한 칸 다실 갖기 캠페인은 농림수산식품부, 문화체육관광부, 아모레퍼시픽 설록이 후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