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그게 그룹 이름이래?” 5년 전, 친구들과 한참을 깔깔거렸던 기억이 난다. 얼마 뒤에 웬 아이돌 그룹이 가요계에 데뷔하는데, 그 이름이 너무 촌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룹 이름하며 가명으로 지은 이름이 모두 네 글자인 데다, 멤버들 이름에는 ‘영웅’이니 ‘최강’이니 하는 옛날 만화책에나 나올 법한 단어들이었기 때문이다. 그 그룹의 이름이 바로 동방신기였다. 다들 알다시피 동방신기는 데뷔와 동시에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나와 친구처럼 그들의 이름을 비웃는 사람들은 사라졌다. 촌스럽다던 ‘영웅재중’이나 ‘최강창민’ 같은 이름은 오히려 기억하기 쉬운 것이 됐고, ‘동방의 새로운 무기’라는 뜻을 가진 동방신기는 그 이름에 걸맞게 일본과 중국 시장을 겨냥했다. 동방신기라는 이름은 어떤 세련된 이름보다 그들의 성격을 분명하게 보여준 셈이됐다. 최강창민이나 영웅재중 같은 예명들은 대중문화계에서 그 역할을 보여준다.
과거 선비들이 본명 앞에 호를 지어 자신이 품은 뜻을 보여주었듯, 연예인들은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기 위해 예명을 짓는다. 대중문화계에서 예명은 21세기의 호인 것이다. 특히 데뷔하자마자 제각각 멤버들의 캐릭터를 보여줘야 하는 아이돌 그룹은 온갖 예명의 전시장이다. 그룹 소녀시대의 멤버 써니의 본명은 이순규지만, 태양(sun)처럼 밝은 성격을 가졌다는 이유로 써니를 예명으로 했다. 써니는 자신을 소개할 때 “소녀시대에서 애교를 담당하고 있는 써니입니다!”라며 인사부터 자신의 캐릭터를 드러낸다. 그룹 빅뱅의 리더 권지용은 ‘지용’을 영어 ‘G’와 ‘드래곤’(용)으로 풀어 G-드래곤이라는 예명을 지었다. 그룹의 리더인 만큼 이름에서부터 마치 용과 같은 카리스마를 부여한 것이다. 같은 그룹의 동영배는 태양처럼 뜨거운 에너지를 가지라는 뜻에서 태양으로 예명을 지었다. 일본에서는 태양을 의미하는 ‘솔라 solar’가 그의 예명이니, 가는 곳에 따라 바뀌는 이름 때문에 자기 이름을 착각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들의 예명은 래퍼 MC몽에 비하면 얌전한 편이다. 본명이 신동현인 그는 자신의 얼굴이 원숭이와 닮았다는 이유로 스스로 ‘몽키’를 뜻하는 ‘몽’에, 래퍼를 뜻하는 영어 MC를 붙여 MC몽을 예명으로 쓰고 있다. 얼핏 보면 자기 이름을 비하한 것처럼 보이지만, MC몽은 TV에 나올 때마다 이름만으로도 ‘원숭이’와 ‘래퍼’의 이미지를 각인시킬 수 있었다.
인터넷 소설로 화제에 올랐던 작가 이윤세는 10대를 주인공으로 한 로맨스 소설에 인터넷에서 쓰는 이모티콘을 사용, 대중적인 인기는 얻었지만 ‘국어 파괴’라는 비난을 받았다. ‘귀여니’라는 예명 역시 인터넷에서 자신을 귀엽게 보이고 싶어 하는 마음에 ‘귀여운 이’를 마음대로 줄인 것이다. 비판을 받기는 했지만, 10대를 위한 인터넷 소설 작가라는 자신의 이미지를 확실히 굳힐 수 있었다. 인기 아이돌 그룹 샤이니의 옷을 디자인하기도 했던 패션 디자이너 하상백은 예명은 아니지만 ‘하상배기’라는 이름을 자신의 디자인 브랜드 네임으로 써서 톡톡 튀는 젊은 디자이너의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최근 소설 <이원식 씨의 타격폼>을 발표한 소설가 박상은 본명 박상호에서 마지막 한 글자를 잘라내 보다 강인하고 별난 남성 소설가의 이미지를 전달한다.
하지만 모든 예명을 눈에 확 띄는 개성만을 위해 짓는 것은 아니다. 인기 배우 신민아의 본명은 양민아지만, 데뷔 당시 양미라라는 배우가 활동 중이어서 성만 바꾼 채 활동을 시작했고, 전지현 역시 왕지현에서 성을 바꿨다. ‘왕’이라는 성이 예쁜 여배우에게 너무 튀어 보여 무난한 이름으로 바꾼 것이다. 또 보다 예술적인 작업을 지향하는 대중문화인들은 자신의 예명에 보다 깊은 뜻을 담으려 한다. 그룹 에픽하이의 래퍼 이선웅은 자신의 예명을 타블로라고 지었다. 타블로는 영어 ‘tableau’에서 가져온 이름으로, ‘예술가가 그리는 장면 또는 그림’이라는 의미를 가졌다. 미국 스탠퍼드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대학 시절 영화감독을 꿈꾸던 그가 마치 랩을 시나 영화처럼 표현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셈이다.
영화평론가 김수지가 지은 예명 역시 의미가 범상치 않다. 영화평론가이자 심리학 박사이기도 한 그는 영화에 심리학 이론을 접목해 바라보는 평론을 기고하는데, 그에 걸맞게 그의 예명은 ‘심리학과 영화를 두루 섭렵’했다 해서 심영섭이다. 예명도 이쯤 되면 옛 선비나 문인의 호처럼 예스럽지 아니한가.
하지만 이런 운치 있고 의미 있는 예명은 그리 많지 않다. 대중문화계에서 대부분의 예명은 지금 바로 그 순간, 그의 이미지를 위해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명을 가진 대중문화인들은 어느 순간 본명으로 돌아오곤 한다. MBC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비담으로 출연하며 인기를 얻고 있는 김남길은 한때 이한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그다지 좋은 반응을 얻지 못하자 본명으로 다시 이름을 바꾸며 활동을 재개했다. 예명에서 본명으로 이름을 바꾼 것이 오히려 이미지 변화의 계기가 된 셈이다. 또 그룹 신화의 에릭은 연기를 할 때는 본명 문정혁으로, 그룹 동방신기의 유노윤호 역시 정윤호로 활동한다. 무대 위에서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 있는 독특한 이름을 쓰지만, 드라마 속에선 현실감 있게 연기하기 위해 평범한 이름이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마치 패션처럼 쉽게 바꿀 수 있는 예명은 지금 우리에게 호 또는 이름의 의미가 달라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과거 우리에게 이름은 평생 함께 가야 할 것이었고, 호는 그 사람이 세운 이상을 지키겠다는 선언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예명은 언제나 쓸 수 있고, 사람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가벼운 마음으로 쓸 수 있다. 타인에게 보여주는 호와 이름의 묵직한 의미보다 자신의 즉흥적이고 개성적인 의견이 중요한 시대. 그것이 지금 대중문화 속 예명이 보여주는 우리 시대의 단면은 아닐는지.
문화예술계 4인의 호에 대한 앙케트
1 호의 뜻은? 2 호를 언제, 어떻게 지었는가? 3 주로 언제 쓰는가?영묵 永墨 강병인(캘리그래퍼)
1 영원히 먹과 함께 산다. 2 초등학교 때 서예를 접한 뒤 글씨 쓰는 게 너무 좋아 중학교 때 스스로 지었다. 당시 친구들에게 글씨 써줄 때마다 영묵이라고 새긴 지우개로 낙관을 찍어주었다.
3 작품에 전각으로 쓰고 지인들이 불러준다. 근암 近岩 김동규(한국박물관협회 명예회장)
1 바위에 가까워진다. 곧, 든든하고 믿음직스러우라는 뜻. 2 1970년대에 소설가인 향파 이주홍 선생이 지어주셨다. 3 학계, 문학계 사람들이 주로 불러준다. 담연 潭蓮 이혜순(디자이너)
1 못에 핀 연꽃. 2 2003년 남편에게 받았다. 우리 부부가 좋아하는 ‘애련설’이라는 시에 묘사된 연꽃의 됨됨이를 닮아가고자. 3 내 한복집의 상호로도 쓰이고 친한 사람들이 불러준다. 고재 古齋 우찬규(갤러리, 출판사 학고재 대표)
1 옛것을 배우다. 2 8년 전 스승에게 받았다. 그런데 스승의 호는 고당. “‘재 齋’가 ‘당 堂’보다 큰 집이니 자네가 나보다 낫네” 라며 웃으셨다. 외람된 일이라 그 말씀만 받았다. 3 사실 나는 잘 쓰지 않고 친구, 선후배가 불러준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