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치료 워크숍에 처음 참석한 A, B 두 분은 모처럼 쉬는 주말, 먼 곳에서 찾아오느라 지쳐서인지 짜증과 회의로 가득했다. 마음속에서 술렁이는 불편한 감정 에너지들을 흘려보내고 안정을 찾아주기 위해 필자는 선 그리기로 워밍업을 시작했다. 종이 위에 아무 생각 없이 마구 감정을 풀어놓는 낙서는 세션이 시작되기 전 마음을 안정시키고 긴장감을 푸는 데 효과적이다. 하지만 “낙서를 하고 나니까 기분이 좀 나아졌느냐”는 질문에 두 분은 “내가 왜 이곳엘 왔지? 그럴 가치가 있을까?” “다른 사람들은 이걸 하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밥은 언제 먹지? 오늘 결혼식에 가야 하는데 괜히 여길 왔나?”라고 말씀하시면서 여전히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분들의 지친 마음과 육체적 피로감을 알아차린 필자는 준비해 간 프로그램을 바꿔야겠다고 직감하고 이번에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몸을 탐구하는 명상과 그림 저널 쓰기를 시도했다. A는 가슴과 머리에 검은색으로 불편함을 그렸고 직장에서의 과중한 업무와 관계에서 지친 마음을 표현했다. 필자는 다시 준비해 간 시 대신 ‘내 인생의 모든 것이 내 몸에 있다’는 내용의 시를 급히 찾아서 함께 나누었다.
“내가 아는 모든 것이 아직도 나와 함께 있다./ 발톱 사이사이에 끼인 유치원 시절, 내 등뼈 뒤/ 그늘 속에 추방당한 고교 시절, 내 넓적다리를 따라/ 줄줄이 매달린 베냇적 그림들/ (중략) / 내가 가보았던 장소마다/ 내 주머니에서 떨어뜨려 놓은 조약돌/ 내가 사랑했던/ 모든 이들은 내 폐 속에서 숨을 쉬고/ 내가 한 모든 일이 아직도/ 심장에서 두뇌로/ 그리고 척추로 이어지는 긴 길을 따라/ 여행하고 있다. 내 인생의 모든 것이/ 내 불완전한 몸 안에 숨어 있으니/ (중략) /축복인지 저주인지,/ 내가 알고 지낸 모든 것이 나와 함께 있어/ 나는 그것들을 기억해내려고 애를 쓰고 있다.”(‘내가 아는 모든 것이’, A. 크리스트만. 필자 역)
시를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의미 있는 구절을 서로 나누는 시간, B는 “‘내가 가보았던 장소마다 내 주머니에서 떨어뜨려 놓은 조약돌’이라는 구절이 맘에 와 닿는다”라고 한다. 왜 하필 그 구절이 마음에 와 닿았는지 묻자 그는 무관심하게 “그냥 이 구절이 <헨젤과 그레텔>이라는 동화책을 생각나게 해서요”라고 대답했다. 모든 다른 참여자들과 시에서 느껴지는 서로의 경험을 나눈 후, 필자는 모든 분들에게 글쓰기를 위한 몇 가지 유도 문구(글쓰기 프롬프트)를 주면서 “혹시 내가 헨젤과 그레텔처럼 길을 잃었다고 느낀다면 그 이야기로 글쓰기를 해보셔도 좋고요”라는 말도 살짝 추가했다. 그러자 뜻밖에 B가 흥미로운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참여자들이 쓴 시나 글은 본인이 원치 않으면 비밀에 부치기 때문에 B가 어떤 글을 썼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는 글을 써가면서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무심코 그 구절이 동화책 내용과 같아서 눈에 띄었는데 글을 써 내려가다 보니 자신이 헨젤과 그레텔처럼 항상 집을 찾아 헤매고 있다는 말을 쓰고 있었다는 것이다.(물론 필자는 그가 찾는 ‘집’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하도록 유도했고 다음 세션에 ‘집’과 관계된 문학 자료를 준비했다. 다음 세션에서 B는 그가 첫날 말한 자신이 찾는 집의 의미와 다른 것을 또다시 발견하게 되었다.)
“내가 왜 왔지? 그럴 가치가 있을까?”라고 말했던 A는 시의 한 구절구절이 자신의 이야기여서 놀랍다고 했다. 그러고는 자신이 쓴 글을 모두에게 공유하는 과정에서 갑자기 주체할 수 없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는 어린 시절 받은 깊은 마음의 상처와 그때부터 생긴 육체적 증상(완치되지 않고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다시 반복되는 육체적 증상)으로 지금까지 고통받고 있었다(그 증상은 사생활 보호를 위해 밝히지 않음). 그는 그 고통스러운 사건을 지난 20여 년간 그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고 몸을 탐구하는 그림 저널을 쓰고, 시를 읽고, 자신의 이야기를 쓰면서 본인도 모르게 처음으로 털어놓게 되었다면서 계속 눈물을 흘렸다.
이 두 사람의 이야기는 문학 치료가 무엇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문학 치료에서 사용되는 문학은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목소리를 이끌어내는 촉매 역할을 한다. 이 두 사람은 시를 읽고 자기 내면의 반응을 탐구하면서 ‘내가 길을 잃고 집을 찾는 헨젤과 그레텔이라는 사실’을 통찰해내거나, 어린 시절의 상처를 애도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된 것이다. 그 과정을 통해 그들은 시인의 말대로 ‘내 불완전한 몸속에 숨어서 기억되기를 기다리는 절실한 이야기’를 찾게 된 것이다. 혼자서 시나 소설, 영화 등 문학작품을 읽고 접하면서 감동을 받는 것과 달리 문학 치료에서는 참여자에게 적합한 문학 작품을 선정하고 그것을 통해 참여자 스스로 자신의 내면을 탐구하고 문제를 해결하도록 돕는 전문 문학 치료사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문학으로 마음을 치유할 수 있나?
문학 치료란 무엇인가? 학술적인 정의로 문학 치료는 ‘문학을 촉매로 문학, 참여자, 촉진자(문학 치료사) 사이에 이루어지는 상호작용을 통해 문제를 치유받고 자존감을 높여주며 궁극적으로는 올바른 자아 인식과 자기 발견에 이르게 하는 과정’이다. 유명한 미국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의 정의가 좀 더 빨리 와 닿을 수 있겠다. “시는 즐거움으로 시작해서 지혜로움으로 끝난다. 시의 일차적 기쁨은 내가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음을 기억하는 놀라움에 있다.” 즐거움으로 시작해서 지혜로움으로 이끌며, 그 과정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라기보다는 참여자 스스로가 찾아가도록 돕는 것이 문학/시라는 이 말 속에 문학 치료의 과정과 효과가 단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문학 치료라고 할 때 ‘문학’이란 시나 소설, 노래 가사처럼 글로 쓰인 문학의 형태만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영화, 연극, 만화, 멀티미디어 문학 등 생각과 느낌을 이끌어내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언어를 표현 매체로 한 광의의 문학이 모두 포함된다.
문학 치료에서 사용하는 문학은 문학적 가치나 위대함이 아니라 깨달음과 자아 발견을 위한 도구로 얼마나 효과적인가를 더 중요시한다. 문학 치료를 위해 선택되는 문학은 사람들이 ‘같은 배를 탄’ 다른 사람들과 만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보편적인 진실’을 담고 있으면서도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 있는 목소리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진부해서는 안 된다.
문학 치료 프로그램 중 참여자는 시, 저널(일기), 콜라주나 그림을 그리고 글쓰기 등을 하는데 이때 참여자가 쓴 글이 잘 썼는지 예술성이 있는지는 전혀 관심 밖의 일이다. 중요한 것은 오직 그 창작 과정에서 일어나는 ‘아하!’의 순간, 뜻밖의 깨달음과 자기 성찰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많은 분들이 ‘나는 글을 못 써요’ ‘문학을 좋아하지도 않아요’ ‘시는 어려워서 읽기도 겁나요’라고 염려하거나 반대로 ‘나는 시인이에요’ ‘수필가예요’라고 말하는데 문학 치료와 글쓰기 재능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싶다.)
나를 찾기 위해서는 낯선 사람을 찾아가라
‘크라코우에 사는 어떤 랍비가 세 번의 꿈을 꾸었다. 꿈에서 한 천사가 나타나 리보브나로 가라고 지시하면서 그곳에 가면 궁전 앞, 다리 근처에 보물이 있다고 말해주었다. 랍비가 리보브나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 이야기를 성의 파수병에게 해주었다. 그런데 그 파수병은 자신도 꿈을 꾸었다는 것이다. 그의 꿈에서도 천사가 나타나 크라코우의 랍비 집으로 가면 그곳 벽난로 앞에 보물이 숨겨져 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랍비는 집으로 돌아가서 벽난로 앞을 파보았더니 그곳에 보물이 있었다.’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해서는 낯선 이를 찾아가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우리 맘속에 있는 보물을 ‘타인들’ 속에서 찾아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여기서 ‘낯선 사람’은 문학이며, 나의 치료를 촉진하는 문학 치료사이며, 문학 치료 그룹에 함께 참여한 이들이다. 이 낯선 사람들은 내가 내 안에 숨겨진 보물인 참자아를 찾도록 도와줄 것이다.
또 다른 의미로 문학은 새로운 관점과 시각을 주기 때문에 ‘낯선 사람’이다. 우리의 눈은 ‘낯익음과 이기적 근심 걱정의 막’에 가려져 있어 삶의 경이로움 앞에 ‘눈이 있으되 보지 못하고 귀가 있으되 듣지 못하고 마음이 있으되 느끼지도 이해하지도 못한다.’ 문학은 그 막을 거두어 낯익음에서 낯설음을 발견하도록 우리의 감각과 정신을 회복시켜준다.
문학의 신선한 시각은 습관화된 사고에 새로운 눈을 부여해주고, 건강하고 창조적인 상상력을 유발시켜준다. 상상력이 없다면 우리는 시공간의 감옥에 갇혀 살 수밖에 없는 수인 囚人과 같다. ‘지금 이 순간’과 ‘지금 이 장소’로부터 자유로이 해방되기 위해서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상상 속에서 ‘언어를 통해’ 무한한 세계를 탐험하고 새로운 진실들을 발견하며 결국 자신과 세계의 의미를 재발견할 수 있다.
문학 중 대중에게 가장 친근한 영화에서 예를 들어보자. 아버지와 딸의 화해를 그린 영화 <황금연못>을 보면 은퇴한 노교수 노먼과 딸의 남자친구의 아들인 빌리 사이의 갈등이 나온다. 빌리는 할머니에게 할아버지가 싫다고 한다. “난 할아버지가 싫어요. 나만 보면 항상 꽥꽥 소리만 지르잖아요.” 그러자 할머니는 빌리에게 뜻밖의 말을 한다. “얘야, 그게 아니야. 할아버지는 너한테 소리 지르시는 게 아니야. 세상에 대고 소리를 지르시는 거란다.”
할아버지의 분노의 대상이 ‘사람(빌리)’이 아니라 세상이라는 할머니의 말은 빌리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놀라운 관점의 변화를 준다. 누군가에게 무고하고 부당하게 고통받고 있는 사람에게 이러한 새로운 관점은 그가 그 고통으로 인해 시달리는 원인 모를 죄책감과 피해의식에서 자유롭게 해줄 뿐 아니라 상대에 대한 두려움과 방어 심리를 해소시켜줄 수 있다. 더 나아가 실체 없는 세상 대신 누군가에게 자신의 분노를 전이시켜 세상을 향한 분노를 대신 터뜨리고 있는 상대를 이해하게 되고 어쩌면 나도 그와 같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문학 치료에서는 성격 묘사라는 저널 쓰기를 통해 새로운 시각으로 상대와 나 자신을 성찰하면서 관계 치료를 돕는다). 하지만 어쩌면 할아버지가 정말 화가 난 대상은 빌리도 세상도 아닌지 모른다. 그래서 필자는 한 가지 관점을 더 추가하고 싶다. “아니, 그는 세상을 향해 소리를 지르는 게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있는 거란다.”
고통과 불행과 갈등을 호소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문제 해결 방법을 환경이나 외부 조건의 변화에서 찾으려고 한다. 하지만 실마리는 근본적으로 내 자신의 변화에서 찾아져야 한다는 깨달음을 <황금연못>의 짧은 대화가 주고 있는 것이다.
잃어버린 것을 찾는 여정 “잃어 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게 나아갑니다./ (중략) /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_윤동주의 ‘길’ 중
윤동주는 내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그것이 내가 살아가는 이유가 되고 그 상실한 무엇을 찾아가는 과정의 끝에서 내가 만나는 것은 ‘담 저쪽에 남아 있는 나’라고 말한다. 문학과 우리의 삶은 모두 잃은 것, 혹은 내 안의 결핍된 것을 찾아 치유되는 여정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누구나 한 번쯤 내가 원치 않는 곳에 실수처럼 뚝 떨어져 살고 있는 기분을 느낄 것이다. 누구나 한 번쯤 내 삶에 기적을 가져다줄 수 있는 마술사를 만나러 가는 여행길을 떠나보고, 때로는 그 과정에서 여러 환상과 환멸을 겪기도 했을 것이다. 회오리 바람으로 캔자스에서 낯선 나라로 떨어진 주인공 도로시가 집으로 돌아오는 여정을 다룬 <오즈의 마법사>는 책, 영화, 연극 어느 형태로라도 문학 치료의 자료가 될 수 있다.
<오즈의 마법사>에는 주인공 모두가 자아 상실감을 안고 있는 외로운 인물들이다. 등장인물들의 자아 상실감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아다모프의 고백을 들어보자.
“무엇이 존재하는가? 우선 나는 내가 존재한다는 걸 안다. 그럼 나는 누구인가? 내가 나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건 단 하나, 내가 고통받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왜 고통받고 있을까? 내가 만일 고통받고 있다면 그건 내 존재의 근원에 무엇인가로부터의 단절과 이별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단절되었다. 그러나 내가 무엇으로부터 단절되었는지 난 이름 붙일 수 없다.”
우리 실존의 고통, 불안, 고독은 존재론적 분리와 단절에서 온다는 말이다. 나는 무엇으로부터 분리되고 잘려져 나왔는가. 무엇과 이별하고 무엇을 상실하였는가.
<오즈의 마법사>에서 고아인 도로시는 가정(부모)을 잃었다. 허수아비는 두뇌를, 나무꾼은 심장을, 동물의 왕인 사자는 용기를 잃었다.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자신 속에 잃어버리고, 떨어져 나간 것을 찾아 온전하게 되고자 한다. 흥미로운 건, 자아 인식을 위한 결핍과 상실감이 각자 다르다는 것이다. 한 인물에게 절실한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기도 한다.
도로시의 구원자가 오즈의 마법사가 아니라는 점은 바로 이 이야기의 핵심이다. 마법사는 알고 보니 무능한 사기꾼일 뿐이었고 결국 그녀를 집으로 데려다 주는 건 마법사가 사는 에메랄드 성을 향하는 여행길에서 내내 신고 있던 은빛 구두 속의 비밀이었다. 도로시는 집으로 돌아갈 방법을 스스로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마찬가지로 나무꾼도, 허수아비도, 사자도 이미 자신 속에 지혜와, 따뜻한 사랑과, 용기를 가지고 있음이 여행 중에 드러나게 된다). 하지만 이 여정이 필요한 것은 그녀가 두려움과 분노,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오이디푸스적 죄책감, 부모의 죽음에 대한 책임감 등을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도로시는 전과 달라지지 않은 캔자스의 집, 즉 웃음 없는 아저씨와, 예고 없이 불어닥칠 바람의 위협과, 돌아올 수 없는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이 남아 있는 집으로 돌아가겠지만 더 이상 그 풍경들이 잿빛으로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세상 어디에도 집보다 더 좋은 곳은 없다’는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 모두가 잿빛으로 보인 것은 그녀의 결핍되고 상처 입은 자아가 마음에 막을 덧씌웠기 때문이다.
‘감추어 드러내게’ 하는 시 치료
프로이트는 시인을 “전문적으로 백일몽을 꾸는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꿈과 시의 유사함에 주목했다. 그는 “무의식의 세계를 발견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시인이다. 마음은 시를 짓은 기관이다”라고도 말했다. 무의식의 세계를 드러내는 시의 역할을 강조한 것이다. 꿈과 시는 심상, 전이(치환), 압축 등과 같은 동일한 심리학 기제를 사용한다.
시의 섬세함과 미묘함은 참여자에게 거부감 없이 다가갈 수 있다. 문학 치료 모임에서 참여한 사람들이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고 회피할 때 시를 사용하면 그 섬세함 때문에 저항도 부드럽게 이루어진다(A, B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문학을 매개로 사용하지 않는 다른 치료와 달리 위협적이거나 거부감이 덜해 일반 전통적인 상담이나 치료를 거부하는 사람도 문학 치료에는 기꺼이 참여하는 경우가 있다.
또한 시는 나를 정의하도록 도와줄 뿐 아니라, 나를 강화시켜준다. 나를 강화시킨다는 건 세상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이다.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위로 중 하나는 나만 혼자 그런 일을 겪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내가 이 광대한 세계에 단절된 혼자가 아니며, 이 세계의 모든 존재들에 연결되어 있고 융화되어 있다고 느끼면 자아 존중감도 함께 높아진다.
그뿐 아니라 시는 은유(비유)를 사용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다른 방법으로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할 수 있게 해준다. 시 쓰기를 통해 산문 쓰기에서 표현할 수 없는 자신의 문제들을 표출하게 된다. 드러내면서도 감추는 시의 능력 덕분에 죽음, 상실, 이별, 외로움, 고독처럼 말하기를 꺼려하는 개인의 실존적 관심사들을 비난받을 두려움이나 수치심을 느끼지 않고 ‘감추어 드러낼’ 수 있는 자유를 누리게 해준다.
분노나 슬픔 같은 감정이 표현되지 않거나 억압되면, 그 감정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육체적, 정신적인 부정적 증상으로 우리 안에 남게 된다. 시를 읽고 쓰는 과정은 용암처럼 폭발 잠재력을 가진 심리적인 에너지가 분출될 수 있는 안전한 출구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심리적인 균형과 건강을 회복시켜준다. 또한 시는 미묘하고 다양한 의미를 가지면서도 동시에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기도 하는데 이 솔직성이 사람들로 하여금 어려운 문제를 탐색하게 도와준다. 시인, 또는 같은 동료 참여자가 진솔한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을 듣게 되면 그들도 부담 없이 자신의 문제를 털어놓게 되는 것이다. 특히 내적 느낌을 시나 저널처럼 글로 쓰는 것은 형태가 없던 느낌과 생각들을 흰 종이 위에 흑색 글씨로 ‘외면화’하는 것이다. 이 구체화 작업은 참여자로 하여금 자신이 문제를 통제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해줄 뿐 아니라 글쓴이가 자신의 생각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게 해준다.
내 안에서 들리는 미세한 모스부호, 저널 치료
저널 journal이란 일기를 뜻한다. 저널 치료(journal therapy)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일기(다이어리)를 순수하고 독특한 치료법으로 변형시킨 것으로 정신, 육체, 감정의 건강과 행복을 북돋우기 위해 ‘목적’을 가지고 쓰는 성찰적 글쓰기를 말한다. 글쓰기에 익숙하지 않고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을 위한 간단한 문장 완성형 글쓰기부터 깊은 내면을 탐구하는 직관적이고 무의식적인 글쓰기까지 여러 저널 기법이 쓰이는데, 그중 ‘목록 만들기’ ‘대화’ ‘인물 묘사’ ‘보내지 않는 편지’ 등이 많이 쓰인다. 또 그림 그리기, 콜라주 등을 활용하는 그림 저널도 적극 이루어지고 있다. 중요한 건 그림을 그리거나 동작을 한 경우에 반드시 성찰을 위한 저널 쓰기를 함께 해야 한다는 점이다.
저널이 치료적 힘을 갖는 것은 글쓰기가 ‘해결되지 못한 채 저장된 감정’을 처리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특히 자신의 생각을 명료하게 밝히는 저널 쓰기는 장기간 지속되는 심한 정신적 충격을 치료하는 한 가지 방법이다.
‘독자’를 염두에 두고 이루어지는 모든 다른 글쓰기와 달리, 치료를 위한 글쓰기인 저널 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비밀을 보장받는 ‘나의, 나만을 위한, 지극히 사적인 글쓰기’라는 점이다. 어떤 판단이나 비난, 혹은 내적・외적 검열에서 자유로운 글쓰기이므로 문법, 글씨체, 맞춤법 등 어떤 규칙에서도 자유롭다. 오직 하나 지켜야 할 규칙이 있다면 날짜를 기록하는 것과 규칙이 없다는 규칙만 지키면 된다는 것이다.
저널 같은 감정 표현 글쓰기가 감정적・심리적 문제 해결뿐 아니라 육체적 면역 체계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이미 25년 전부터 심리학자 페니 베이커 박사의 연구 결과 입증되었다. 영양 주사로 연명하는 환자와 보호자들의 우울증이 글쓰기를 통해 호전됐다는 결과가 의학계에 보고됐다. 무엇보다 관절염과 천식 환자들의 질병 심각도가 현저하게 감소했다는 연구 결과가 의학 전문지 <자마 JAMA>에 소개되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언어로 표현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멍들고 오해받을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언어화하고 서로 나누어야 한다.”(드살보) 하지만 누군가에게 말로 털어놓은 나만의 고통이나 실패감, 수치심, 슬픔 등이 다시 메아리 되어 내게 되돌아와 상처를 준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다. 그렇기에 릴케는 “마음이여 누구를 향해 외칠 것인가”라고 물었는지 모른다. 저널은 언제라도 내 곁에서 어떤 비난도 없이 가장 안전하게 내 이야기를 들어주며, 내면의 세미한 모스부호의 타전에 귀를 기울여주는 변함없는 친구이다.
당신은 문학 치료가 필요하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나는 그것을 살아보고자 했다. 그것이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헤르만 헤세)
마음이 아프고 답답하고 우울하다면, 이유 없이 울고 싶다면, 갑자기 세상에 나만 남은 듯 외롭다면, 벗을 찾아 전화번호부를 읽어 내려가도 선뜻 누구에게 전화를 걸어야 할지 모르겠다면, 아니, 이야기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오히려 더 허전하고 후회가 되었다면, 나의 고통이 누군가에게 웃음거리가 된 적 있다면, 그래서 더욱 나는 마음을 닫았다면, 그까짓 것 다 지난 일인데 뭐 하고 위로했지만, 문득문득 시도 때도 없이 빙산처럼 떠올라 나를 마비시키는 고통스러운 기억이 있다면, 말없이 내 이야기를 다 들어주고 언제든 필요할 때 내가 찾으면 옆에 있는, 그리고 어떤 비난도 하지 않는 안전한 친구가 필요하다면… 당신은 문학 치료가 필요하다. 그 시작은 생각보다 쉽다. 저널 쓰기로 시작해보라. 당신만의 장소를 찾아 공책에 글을 쓰기 시작하라. 저널은 나만을 지지해주는 최고의 비밀 상담사요, 안전한 친구다. 펜 끝에 숨은 말들을 해방시켜보라. 시를 읽고 영화를 보고 문학 작품을 만나보라. “나는 고통받고 있어”라고 말하면 “나도 그래. 넌 혼자가 아니야”라고 문학이 대답해줄 것이다. 그리고 길을 찾기 위해 동반자와 가이드가 필요하다면 용기를 내어 문을 두드리라. 내가 잃은 것, 바로 나 자신을 찾는 여정을 도와줄 슬기롭고 훈련받은 문학 치료 전문가를 찾으라. “왜 나는 내가 나약하며 도움을 필요로 한다고 말하면 안 된단 말입니까?”글 이봉희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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