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이야기, “한국말도 못하는 외톨이 무용수였습니다” “50년 전, 학이 춤추는 마을(일본 교토 현 마이즈루 舞鶴)에서 태어났습니다. 춤은 운명처럼 다가왔지요. 아름다운 발레 선생님을 만난 것입니다. 노는 것보다 발레하는 게 더 좋았습니다. 어느덧 더 넓은 세상을 찾아 시골 동네에서 도쿄로 유학 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동료와 선배들의 시샘으로 홀로 눈물을 삼켰습니다. 제게 다시 내일이 오지 않을 듯 몸을 불사르며 춤에 몰입했어요. 스승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학생이었지만, 한국 국적이라는 이유로 유학길이 막히고 설 수 있는 무대가 좁았습니다. 일본 발레협회장의 권유로 한국행을 택했습니다.
그러나 조국에서도 외톨이였습니다. 한국말을 못했고, 당시엔 재일 동포를 열린 마음으로 보는 이가 적었기 때문이지요. 누군가와 말하고 싶을 때마다 연습에 전념했어요. 그러다 1985년 결혼과 동시에 발레를 그만두었습니다. 꿈을 잃어서일까요. 큰딸 리나를 낳고 나서 산후 우울증이 급습했습니다. 47kg이던 몸무게가 80kg 가까이 되었어요. 그 와중에 꿈속에서도 발레를 했습니다. 춤을 다시 시작하기로 했지요.
바를 잡고 일어나서 자괴감, 우울, 슬픔이 엉겨붙은 몸을 움직였습니다. 천천히, 부드럽게, 따뜻하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며, 누구도 의식하지 않고, 오직 제 몸과 마음이 이끄는 대로 춤을 추었습니다. 날개가 돋아난 기분이었어요. 그 어느 때도 가져보지 못한 아름답고 큰 날개였습니다. 1987년, 저는 국립발레단 프리마 돈나로 무대로 돌아왔습니다. 아줌마가 되어 발레리나 인생의 전성기를 누린 것이지요. 둘째 세나를 임신하면서 ‘진짜 은퇴’를 선언했지만, 출산 후 또 한 번 복귀해서 4년 동안 무대에서 뛰었습니다.”
(위) 지난 9월 10~13일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보리스 에이프만 발레단의 <차이코프스키> 공연 차 서울에 온 최리나 씨와 최태지 단장.
딸의 이야기, “키가 커서 슬픈 발레리나였습니다”
“기억도 하지 못할 어릴 때부터 발레 슈즈를 신었습니다. 수석 무용수로 활약하던 바쁜 엄마를 기다리며 밤 10시까지 연습실 한쪽에서 혼자 바를 잡고 놀았어요. ‘발레를 진정으로 좋아하는가? 좋아하지 않는 걸까?’ 이런 생각조차 해볼 겨를이 없었지요. 발레는 제 생활이었으니까요. 망설임 없이 예원중학교에 입학해 발레를 계속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엄마는 국립발레단 단장이었기에 주위 사람들이 색안경을 끼고 저를 봤습니다. 사춘기 소녀이던 제게는 시샘과 수군거림이 그 어떤 훈련보다 힘들었어요. “엄마, 단장 그만둬!” 하고 바락바락 소리 지르며 운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일부러 고등학교는 캐나다 발레 학교로 유학 갔습니다. ‘단장 딸’이라는 굴레에서 자유로워졌지요.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고등학교 이후 키가 껑충 자라서 176cm가 되었습니다. 토슈즈를 신고 서면 군무에서 혼자 거슬릴 만큼 큰 키예요. 이번에는 “왜 이렇게 나를 키가 크게 낳았어!”하며 엄마 무릎에 얼굴을 묻고 울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요즘 많은 한국 발레 학도들이 입상한다는 로잔 콩쿠르에 나갔는데 뚝 떨어진 겁니다(이건 아픈 기억이라서 어떤 인터뷰에도 말하지 않았지만요). 그 충격으로 스트레스성 골절이 왔습니다. 이런 골절에 유일한 약은 쉬는 것이라더군요. 1년 반 동안의 긴 휴식이 시작되었습니다. 엄마는 제게 처음으로 “발레를 그만두는 게 어떻겠냐”고 권했습니다. 큰 키로는 ‘미운 오리 새끼 발레리나’가 될 테니까요. ‘발레는 좋아한다고 해서 다 되는 게 아니구나’ 싶었어요. 그래서 마음을 독하게 먹고 발레를 그만두었습니다. 몸무게가 8kg이나 쪘고, 금단현상처럼 몸이 한없이 무기력해졌어요. 캐나다에서 평범한 대학생으로 살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또 위로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오디션이 있다. 보러 가거라” 하셨어요. 저는 더 생각할 것도 없었어요. 단칼에 “안 가” 했지요. 어떻게 정을 떼었는데, 이제 와서 다시 발레를 하라는 말인지요. 엄마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너, 후회할지도 몰라. 오디션 떨어지더라도 지금처럼 대학 생활 계속하면 되잖니”라면서요. 결국 마음을 비우고 오디션을 봤습니다. 모던한 작품으로 유명한 세계적인 안무가 보리스 에이프만 발레단이었습니다. 키 큰 무용수를 선호한다는 그 발레단. 하지만 체중이 8kg이나 불어버리고, 1년 넘게 스트레칭도 하지 않은 굳은 몸으로 무얼 하겠습니까. 그런데 보리스 에이프만의 생각은 달랐나 봅니다. 저에게서 ‘재능이 보인다’고 하더군요. 결국 6개월의 수습 기간을 거쳐 이 발레단에 입단했습니다.
기쁨도 잠시였어요. 지옥의 문이 열렸지요. 50여 명의 단원은 모두 러시아어를 하는 구소련 연방 출신이고, 전 유일한 동양인이었어요. 스케줄 표도 못 읽어 남들이 슈즈 신으면 따라서 신곤 했어요. 외로웠지요. 그런데 외로움보다 서러움이 더 컸어요. 그렇게 소외를 눈물로 견디던 6개월이 지났습니다. 믿지 못할 일이 벌어졌어요. 보리스 에이프만 작품 <차이코프스키>에서 주역(폰 멕 남작 부인 역)을 맡은 겁니다. 군무 무용수로 무대를 밟기만 해도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주역이라니요! 하루가 멀다 하고 엄마에게 전화해서 울던 딸, 그날도 전화로 엉엉 울었습니다. 처음으로 엄마 앞에서 기뻐서 울어본 날이었습니다.”
(위) 최리나 씨가 유학 시절 엄마 사진으로 만든 액자와 최태지 단장이 두 딸에게 쓴 쪽지.
둘은 카메라도 의식하지 않고 앨범 속 사진에 푹 빠졌다. 딸은 한남동 집에서 두 다리 뻗고 누워본 게 얼마만인지 모른다.
모녀의 대화, 불량 엄마 혹은 최고의 멘토
엄마 “9월 초, 리나가 오랜만에 한국에 들어왔어요. 보리스 에이프만 발레단의 <차이코프스키> 내한 공연 차였어요. 자신감 넘치는 딸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노라니 저와 딸이 지내온 삶의 기승전결이 묘하게도 닮았더군요. 문화적 차별과 갈등, 신체적 이유로 발레를 그만두었다가 오뚝이처럼 일어난 과정, 그리고 주역 무용수가 된 결말까지요.”
딸 “엄마와 한가로이 이야기 나누고 있는 이 순간이 어색해요. 제가 어릴 때 엄마는 엄마가 아니었거든요. 웬만한 ‘워킹맘’도 가사를 돌보기 힘든데, ‘프리마 돈나’였으니 어땠겠어요. 원망도 많이 했어요.”
엄마 “리나는 유치원 때부터 ‘엄마, 나 치과 가서 이 빼고 올게’ 하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혼자 치과에 다녀왔거든요. 야무지고 기특하지만, 어린 아이를 홀로 보내야 하니 가슴이 찢어졌어요.”
딸 “엄마가 제게 직접 발레 레슨을 한 것은 딱 한 번이었어요. 일 때문에 바쁘기도 했지만, 진짜 이유는 그게 아니었어요. 원래 엄마는 유명한 호랑이 선생님인데 학생인 제가 딸이다 보니 사소한 것 하나 지나치지 못하셨죠. 단 한 번의 레슨으로 엄마도 저도 진이 쏙 빠졌어요. 하지만 엄마는 결정적인 순간에 늘 저의 멘토였어요. 발등이 골절되었을 때 ‘아무 생각도, 걱정도 하지 말고 무조건 쉬어라. 연습은 꿈도 꾸지 말고’라며 제 휴식을 ‘지도’해주셨어요. 보리스 에이프만 발레단 오디션에 통과했는데도 가지 않겠다고 했을 때도 그랬어요. 가슴이 터질 듯 설레었지만, 또 한 번의 실패는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어요. 자신이 없었지요. 그 순간 엄마는 또다시 냉정한 스승이 되었어요. 주저하는 제 등을 슬쩍 떼민 거죠.”
엄마 “제 새끼인 데다 무용 선배 아닙니까. 리나의 겉과 속을 누구보다 정확히 알았어요. 저도 리나를 낳고 나서 발레리나로서는 ‘코끼리’ 정도인 80kg에 육박했으면서도 발레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발레를 정말 사랑했고, 리나 역시 그랬거든요. 딸에게 ‘평범한 대학생’으로 살라고 했지만 딸의 온라인 메신저 닉네임이 ‘아직 버리지 못한 내 꿈’인 것을 보고 가슴이 미어져 오디션을 권했지요. 하지만 사실은요, 딸이 발레를 그만뒀으면 했어요. 성공한 프리마 돈나? 다들 부러워했지만 사실 전 외로웠거든요. 발레리나가 된다는 것은 강해야 하고, 항상 긴장해야 하는 고독한 길입니다. 저도 두 번이나 집어던진 일이었잖아요. 딸에게 그처럼 혹독한 운명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어요. ‘쿨’하게 오디션을 권한 뒤에도 사실 ‘붙기를!’ ‘떨어지기를!’하는 상반된 마음이었어요.”
최리나 씨의 발(왼쪽)과 최태지 단장의 발. 딸은 “엄마는 발레하기에 유리한 발을 타고났다”며 둘의 발은 닮지 않았다고 말했다.
세상에서 제일 잘 통하는 모녀
딸 “저희 말고는 아직까지 한국에 모녀 발레리나가 없습니다. 발레의 고장 러시아에는 꽤 있더군요. 그래서 저희를 보는 보리스 에이프만의 감회도 남다른가 봅니다. 1992년 엄마가 프리마 돈나일 때 안무가와 무용수로 만났는데, 15년 뒤인 2007년 그 프리마 돈나의 딸과 함께 작품 활동을 하고 있으니 ‘두 세대를 위한 안무를 하는군!’ 하며 흐뭇해했습니다. 에이프만이 얼마 전 엄마한테 이렇게 말했대요. ‘리나에게 재능이 보였지만, 사실 발레리나 딸이어서 받지 않으려 했다’고요. 부모만 믿고 나태해지는 2세대들이 더러 있기 때문이었답니다. 뽑고 나서도 기대를 안 했대요. 몇 달 하다가 그만둘 것 같았다나요.”
엄마 “딸이 대견하죠. 그쪽에서는 동양 애가 한 1년 경험 쌓으러 왔나 보다 했을 텐데 주역을 맡았으니까요. 유럽 무용수들도 못 견디고 한 달 만에 나갔다는데…. 한국에 돌아오고 싶다고 우는 딸에게 ‘한 달만 버텨보자’며 달랠 때 가슴이 찢어졌는데, 벌써 1년이 넘었습니다.”
딸 “엄마가 그랬어요. ‘난 여린 듯하면서도 굉장히 강하다는 평을 들었는데, 넌 강한 걸 넘어 독한 것 같다’고요. 제가 발레가 힘들어 손까지 떨면서 펑펑 울 때 누가 봐도 관둘 것 같거든요. 그런데 다음 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훌훌 털고 일어나요. 저보다 재능 있는 발레리나가 참 많아요. 제 유일한 장점은 근기 根氣 라고 생각해요. 근기를 실감할 때마다 엄마 피가 흐르는 걸 느껴요.”
엄마 “저도 어쩔 수 없는 엄마인가 봐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궁에서 열린 딸의 데뷔 공연에 참석했을 때, 눈물이 펑펑 나서 무대를 제대로 볼 수 없었어요. 냉철하게 보고 나서 부족한 점을 지적해줬어야 했는데, 그때 저는 순전히 엄마 마음이었어요. 저렇게 당당하게 무대를 장악하며 춤추고 있다니…. 공연이 끝나고 ‘브라보’ 하고 외치며 박수 치는 관중들의 소리에 정신이 들었어요.”
딸 “힘든 고비를 넘길 때마다 ‘아, 엄마도 그랬겠구나…’ 해요. 이건 어떤 스승도, 그 스승이 피붙이라 해도 전수해줄 수 없는, 몸소 체득해야 하는 깨달음입니다. 나이 먹고 연륜이 쌓일수록 ‘발레리나 최태지’ ‘엄마 최태지’ ‘여자 최태지’ 모두 이해하게 돼요.”
인터뷰 질문과 카메라 셔터가 딸에게 좀 더 집중되는 요즘, 최태지 단장은 더없이 충만하다. 오래전 그를 가르친 스승이 “발레의 신 神이 너를 한번 사랑하면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는데, 그 신이 딸에게도 아낌없는 사랑을 주고 있는 모양이니까. 인간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여자 둘이란 바로 모녀이고, 어느 모녀인들 징글징글하도록 서로를 속속들이 알지 않을는지. 예술가로서 같은 굴레를 짊어진 이 모녀 사이는 그보다 더할 것이다. 끔찍하도록 애틋한 분신이다.
최리나 씨가 촬영을 위해 취한 발레 동작까지도 최태지 단장은 놓치지 않았다. “어깨 좀 더, 좀 더! 그렇지, 발뒤꿈치 신경 쓰고!”
- 우리나라 첫 모녀 발레리나, 최태지, 최리나 씨 운명까지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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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발레단 최태지 단장과 보리스 에이프만 발레단 주역 최리나 씨 모녀. 우린 그들의 무대를 못 볼 수도 있었다. 문화적 갈등, 신체적 제약에 부대껴 날개를 접었다면 말이다. 딸을 둘이나 낳고 복귀한 최태지 단장, ‘프리마 돈나의 딸’이란 무거운 훈장을 얹고 춤췄던 최리나 씨. 속울음 삼키며 비상하기까지 예술과 인생을 대하는 면면이 꼭 닮은 둘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9년 10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