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안의 미식 유전자 이욱정 씨의 외가는 입는 것보다 먹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식도락 집안이었다. 일본에서 태어나 성장하고, 요리하는 걸 좋아해 일식, 한식, 양식까지 섭렵한 어머니는 ‘가족 사랑은 식탁에서 시작된다’는 철학을 지니셨다. 또 절대 미각의 소유자인 아버지는 만주 태생으로, 그 옛날 내륙 지방에서 생선회를 주문해 먹었을 정도로 집안 형편도 넉넉했다. 그런 부모님 덕분에 늘 멋스러운 그릇에 차린 제대로 된 아침밥을 먹고 자랐으며, 그의 어머니는 쿠키와 빵, 아이스크림, 두부, 순대까지 웬만한 건 집에서 직접 만들어주셨고, 행여 외식이라도 하는 날에는 먹고 싶은 메뉴는 뭐든지 다 시켜주셨다. 이욱정 씨는 어머니가 요리하실 때 옆에서 잔심부름을 하거나 오븐에서 빵이 부풀고 구워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머니의 음식 솜씨 덕에 그의 집은 친구들 사이에서 맛있는 아지트가 되었고, 지금도 팔순의 노모 댁에는 손때 묻어 너덜너덜해진 요리책이 쌓여 있다.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미식 유전자, 요리와 먹을거리에 유난히 관심 많던 가족…. 이러한 환경은 자연스럽게 그가 음식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이끌었다. 창의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은 구내식당 밥을 자주 먹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고, 끼니를 대충 때우거나 여럿이 있을 때 메뉴를 통일하는 것을 싫어한다. 음식에 대한 모험심, 도전, 그것을 실천하는 행위는 곧 호기심을 자극해 창의성의 발로가 되기 때문이다. 그는 4년 전 <8.15의 기억>이라는 특집물을 만들면서 MT용 식단을 짜고 장보기 담당이었는데, 샐러드와 연어 애피타이저, 돼지고기 된장구이와 매운 양념 닭고기 바비큐, 식사는 동치미 국수 또는 명란젓 찌개 중 선택, 그리고 디저트까지 코스 메뉴로 구성한 그날의 메뉴는 지금까지 KBS MT 역사상 가장 호화로운 메뉴로 기억되며 전설로 남아 있다. 평소에도 장 보러 가는 걸 좋아하는데, 시식 코너 투어는 기본, 신제품은 꼭 사서 먹어보고 때맞춰 나오는 제철 재료도 놓치지 않는다.
1 BBC의 유명 요리사 켄 홈을 <누들로드>의 프리젠터로 기용한 것은 전 세계 방영을 미리 염두에 둔 치밀한 기획이었다. 켄 홈과 함께 중국 만리장성에서.
2 1년 6개월 동안 10개국을 누비는 고된 촬영의 흔적인 여권.
3 <누들로드>의 기획에서부터 완성까지 모든 과정을 꼼꼼하고 생생하게 담은 단행본이 얼마 전 출간됐다. 예담.
누들로드에서 길을 찾다 올 초 인구에 회자된 KBS 특별 기획 다큐멘터리 <누들로드>. 방송이 끝나기도 전 유럽과 아시아의 10개 방송사에 판매되었고 전 세계 20여 개국에서 방영을 앞두고 있으며, 기존 한국 다큐의 통상적인 문법을 넘어섰다는 평가를 받아 얼마 전 2009 한국방송대상에서 대상의 영예를 거머쥔 이욱정 PD의 역작. 주방에서 요리하는 사람들(요리사든, 시장의 아낙이든, 시골의 할머니든)을 만나고, 그들이 만든 음식을 먹고, 그 음식에 담긴 이야기를 듣고, 거기에 만화적인 상상력과 점잖은 정석에서 벗어난 구성, 약간의 장난기, 이 모든 재료가 합쳐져서 나온 결과물이 바로 <누들로드>다.
약 1년 6개월 동안 2백50일 넘게 10개국을 누비며 해외 취재와 촬영, 매일 새벽 2~3시까지 이어진 편집으로 몸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지만, 애초부터 좋아했고 그토록 하고 싶었던 ‘음식’을 주제로 한 본격적인 작업이었기에 즐겁게 할 수 있었다.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법은 출장지에서 그 지역의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었다.“사람은 자석처럼 자기가 좋아하는 것으로 끌려가게 돼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음식에 대한 로망을 오래전부터 갖고 있었고, <누들로드>를 만들면서 저의 길을 찾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갖고 있던 호기심과 꿈을 실현했다는 것은 행운이고, 감사해야 할 일이지요.”
대학에서 영문학을, 대학원에서 문화인류학을 전공하고, 입사 7년 차 때는 과감히 미국 유학을 떠나 신문방송학 석사 학위를 취득한 그의 교육 배경과 음식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열정 그리고 역사, 게임, 시사, 문화 관련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며 쌓은 다채로운 경험도 <누들로드>를 만들기 위한 ‘마중물’이었지 싶다.
국수의 길을 따라 아주 먼 길을 오래도록 여행하고 돌아온 그는 음식을 만들고 함께 나누는 일이 얼마나 숭고한 행위인지 깨달았다고 이야기한다. 오죽했으면, 한국방송대상 수상 소감에서 “이 시간에도 주방에서 땀 흘리고 있을 세상의 이름 없는 요리사들과 영광을 함께한다”고 했을까? 하나의 음식은 하나의 독자적인 문화나 한두 명의 천재가 발명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이름 없는 수많은 요리사들을 통해 완성되기 때문이다. 국수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1 이욱정 씨가 요리 유학을 준비하면서, 평소 아끼던 후배 프로듀서 김승욱 씨와 절친한 형 윤중구 씨(엠브리오 건축사사무소 대표)를 초대해 조촐한 이별 파티를 열었다. 단행본 <누들로드>의 맨 마지막에 있는 ‘Thanks to’에는 두 페이지에 걸쳐 정확히 75명의 이름 혹은 팀이 나온다. 평소 주변 사람들을 얼마나 잘 챙기는지 보여주는 단적이 예다.
2 그의 책장에 꽂혀 있는 요리 관련 서적. <누들로드>의 자양분이 되었다.
런던으로 떠나는 요리 유학 <누들로드> 이후 방송, 신문, 잡지 등에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그가 돌연 요리 유학을 결심했다. 심사숙고 끝에 정한 목적지는 영국 런던의 요리 학교 ‘르 코르동 블루’. 요리 공부를 하기로 결심한 건 ‘좋은 요리사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기 위해서’다. 그를 프랑스가 아닌 영국 런던으로 향하게 한 건 8할이 BBC, 나머지 2할이 켄 홈과의 인연이다. 한 나라의 요리와 요리사를 매혹적으로 만들 수 있는 요리 프로그램의 힘이 얼마나 큰지 그는 이미 알고 있고, 현재 음식 프로그램의 메카는 런던이다. 세계에서 가장 음식이 맛없는 도시로 악명 높았던 런던이 파리를 앞서는 코즈모폴리턴으로 등극할 수 있었던 건 미디어 특히 TV 때문이었고, 그 좋은 예가 바로 BBC다. 제이미 올리버나 고든 램지를 유명 셰프로 만든 것도, 영국 재래시장이 레노베이션 후 성공적으로 자리 잡은 것도 BBC의 힘이 컸다(제이미나 고든이 재래시장으로 장 보러 가는 장면이 자주 전파를 탔다).
“요즘 한식의 세계화가 화두지요. 한 나라의 음식을 세계화하는 것은 곧 문화를 파는 것이고, 문화를 파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미디어입니다. 제 임무는 훌륭한 우리의 음식 문화로 제2, 제3의 제이미 올리버를 키우고, 전 세계인이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한식 세계화에 일조하는 겁니다. 그 다리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분명 우리 음식에는 무한한 잠재력이 있는데, 아직까지 그것을 표현하고 알리는 방법은 미숙하다. 요리사건 프로듀서건 그 포문을 열 사람이 필요한 시점. <누들로드>를 제작하면서 그는 우리의 기획, 우리의 상상력, 우리의 영상 제작 능력이면 세계 어디라도 내놓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고, 우리의 음식 자원에 우리 요리사들의 창의력이 더해지면 세계의 톱 레스토랑에 진입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믿는다. 고등학교 1학년인 아들과 아내와 함께 낯선 런던에 새 둥지를 틀고, 40대 중반에 다시 시작하는 요리 공부는 분명 녹록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의 2년이 그를 더욱 단단하게 만드는 뼈아픈 담금질이 되어 스타 PD로 우리 앞에 다시 돌아오기를 기대한다.
이욱정 씨가 앞치마를 둘렀다. 이별 파티의 메뉴는 자신이 좋아하는 명란과 메밀국수를 포함해 네 코스로 구성하고 차가운 사케를 곁들였다. 일식 솜씨가 뛰어난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메뉴와 테이블 세팅을 모두 일본풍으로 했다.
1 호박 명란젓 애피타이저 애호박을 슬라이스해 굽고 명란젓을 한 조각 얹은 뒤 송송 썬 쪽파를 뿌린다. 명란을 소스처럼 먹을 수 있는 간편한 전채 요리.
2 안창살 소금구이 남자가 할 수 있는 단순한 조리법은 구이. 좋은 부위를 구입해 살짝 구운 뒤 소금만 뿌려 먹어도 맛있다.
3 냉메밀국수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소바는 일본 에도 시대 남자들의 스피디하고 감각적이며 경제적인 라이프스타일에 꼭 맞는 최상의 음식이었다. 물론 맛도 좋다.
4 단팥죽 명란젓, 소금구이, 메밀국수의 짭짤한 맛을 달큼함으로 중화시키기 위해 선택한 디저트.
- [나의 쿠킹 스타일]다큐멘터리 <누들로드>이욱정 프로듀서 국수에 탐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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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한국방송대상에서 <누들로드>가 대상을 수상했다. 지난 3년간 국수의 길을 따라 먼 길을 여행하면서 한 번도 마음 편히 국수를 먹어본 적이 없다는 이욱정 PD. 이제는 아무 생각 없이 국수 한 그릇을 비울 수 있게 됐다는 그를 만났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9년 10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