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율이시 홍동백서’, 정경심, 2007, 한지에 수묵 채색
제사, 형제들끼리 돌아가면서 지내면 안 될까 추석에 꼭 빠질 수 없는 이야기가 바로 제사다. 제사는 조상과 후손의 만남의 자리요, 부모 형제가 서로 정을 나누는 자리다. 하지만 요즈음은 어떠한가. ‘자식은 다 같은 자식인데 제사는 왜 장남만 모셔야 하느냐’ ‘명절이 되면 여자들은 뼈 빠지게 일만 한다’고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제사의 순기능보다 역기능이 더 크게 들린다.
우리 집 이야기를 할까 한다. 우리 집은 1년에 명절 차례 두 번, 기제사 여섯 번, 모두 여덟 번 제사를 지낸다. 제사는 한번에 3대를 지내는데, 대를 달리할 때마다 간장이나 나물 등 기본적인 것만 그대로 두고 과일 등 나머지는 모두 새로 올린다. 명절 때는 무려 세 번 상을 다시 차리니 제사 시간은 물론 비용도 만만치 않다. 이런 불편 때문에 생전에 모친께선 “내가 죽으면 이것저것 차리지 말고 깨끗한 물 한 그릇만 떠놓아라” 하며 유언처럼 말하곤 하셨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내가 ‘제사를 지낼 때마다 일일이 제물을 갈지 말고 한 번에 메와 술잔만 대 代 수대로 여섯 그릇만 놓고 지내면 어떻겠느냐’고 하니 형수님들이 모두 좋다고 해 조상 대대로 내려온 제사 방식을 바꾸었다.
나는 이를 ‘모둠제사’라고 부른다. 제물도 큰집 한 곳에서만 다 준비하지 않고 서로 잘하는 음식을 하도록 해, 둘째는 고기와 적, 셋째는 나물과 떡, 다섯째는 전, 막내는 과일, 이렇게 형제끼리 각기 몫을 나누어 준비토록 했다. 제삿날이 돌아오면 모두 정성껏 제물을 준비해 와 순식간에 한 상이 차려졌다. 이렇게 몇 년이 지난 어느 해 설 차례 때이다. 집안에서 막내인 내가 ‘다 같은 자식인데 굳이 장남 집에서만 제사를 지내란 법이 어디 있느냐, 형제끼리 돌아가면서 지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을 했다. 갑작스러운 이 말에 집 안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한참 동안 침묵이 흐르자 큰형님께서 조심스럽게 ‘그러면 기제사는 내가 맡고, 설과 추석 차례만 너희들끼리 돌아가면서 지내는 게 어떠냐’고 했다. 어느 누구도 말이 없자 ‘막내인 내가 안을 냈으니 거꾸로 나부터 다음 추석 차례를 우리 집에서 모시겠다’고 했다.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집사람이 내 옆구리를 꾹꾹 찌르면서 어떻게 그런 결정을 자기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하느냐며 불평을 해댔다. 의논 끝에 기제사는 맏형 집에서, 명절 차례는 형제끼리 돌아가면서 지내기로 합의했다. 한번은 장모께서 ‘어떻게 제사를 돌아가면서 지내느냐’고 물으시기도 했다.
자식들이 제사를 돌아가면서 지내는 것이 과연 우리 풍속에 어긋나는 것일까? 한마디로 그렇지 않다. 고려시대와 조선 중기인 17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오늘날처럼 큰아들이 제사를 전담하지 않고 큰아들, 작은아들 또는 딸들이 한 조상씩 맡아 지냈다. 이를 윤회봉사라 했으며, 심지어는 외손봉사도 널리 시행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윤회봉사와 외손봉사는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성리학이 사회 구석구석에까지 영향을 미치자 오늘날처럼 장자가 제사를 주관하게 되었다. 이는 부계 중심의 종법 질서가 확고해지고, 재산도 아들딸 구별 없이 똑같이 나누는 균등 상속에서 차등 상속으로 바뀌면서 제사도 윤회봉사에서 장남 단독봉사로 변화했던 것이다.
이제 우리의 상속법도 아들딸 구별하는 차등 상속에서 균등 상속으로 바뀌었으니, 제사에 대한 부담도 장남한테만 지우지 말고 차례만이라도 형제끼리 돌아가면서 지내는 건 어떨까. 이것이 합리적이다. 지금도 제주도에서는 형제끼리 제사를 각자 나누어 지내는 윤회봉사를 한다.
제사는 반드시 사당이나 집에서만 지내야 한다는 법도 없다. 조선시대에도 관리가 지방으로 발령이 나 제사 때 집에 오지 못하는 경우 사당을 대신하는 의미로 사당도를 걸어놓고 현지에서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실제로 형제들 간에 돌아가면서 차례를 지내다 보니, 부모님과 조상에 대한 생각과 제물에 대한 정성이 각별해질 뿐만 아니라, 장남인 큰형님의 고충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또 비록 차례 때이긴 하지만 형님들은 동생
집에 갈 수 있어 좋고, 조카들도 큰집, 작은집을 오가게 되어 가족 간의 유대도 한결 두터워짐을 느꼈다.
제사는 몇 대까지 지내야 하는가 박물관에 근무하는 내게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이 ‘제사는 몇 대까지 지내는 것이 맞느냐’는 것이다. 한마디로 제사를 몇 대까지 모셔야 한다는 법은 없다. 조상의 제사 대수는 예로부터 의견이 분분했다. 우리나라는 관습적으로 4대 봉사를 당연시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4대를 제사 지낸 것은 아니다. 유교식 제례를 처음 수용한 고려 말에서 조선 초까지만 해도 신분과 지위에 따라 봉사 대수가 달랐다. 고려 때 4품 이상의 대부는 3대 조상을 제사하고, 6품 이하는 2대 조부모까지, 7품 이하의 하급 관원과 서민은 부모 제사만 지내도록 했다.
그러다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6품 이상은 3대 봉사, 7품 이하는 2대까지 봉사하고, 서민은 부모 제사만 지내도록 했다. 이를 조선 왕조 법전인 <경국대전>에 명문화하여 거행토록 했다. 하지만 당시엔 조상의 제사를 주관하는 당사자의 신분에 따라 봉사 대수를 결정했기 때문에 시행상 혼란이 따랐다. 예를 들어 6품 관직에 있을 때는 3대까지 제사를 지내다가 관직이 없는 자식이 제사를 모시게 되면 부모 제사만 지내야 하는 모순이 생겼다. 조선 후기에 들어오면서 양반의 경우 4대까지 제사를 지냈다. 양반 숫자가 크게 늘어난 말기에는 일반 서민까지도 모두 4대 봉사를 하게 되었다. 4대 봉사를 하지 않으면 상놈 소리를 듣기까지 했다. 일제가 의례 준칙을 만들어 기제사는 부모와 조부모 2대까지만 지내도록 강제했지만 대부분 4대 봉사를 했다. 오늘날은 예전처럼 4대 봉사를 하는 집안은 그리 많지 않다. 그래도 어느 누구도 상놈 집안이라 손가락질하지 않는다.
차례상 차리는 법
차례(설, 한식, 단오, 추석 등에 지내는 제사)는 지방의 풍습과 각 가정의 전통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전문가들도 차례상 차리는 예법에 대해 고례 古禮에는 정확히 정의된 게 없으므로 형식보다는 상차림의 정성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1열 시접(숟가락 담는 대접), 잔반(술잔, 받침대)을 놓고 메를 올린다.
2열 어동육서 魚東肉西(생선은 동쪽, 육류는 서쪽에 놓는다), 두동미서 頭東尾西(생선의 머리가 오른쪽을 향하게 한다)
3열 고기탕, 생선탕, 두부탕 등의 탕류를 놓는다.
4열 좌포우혜 左鮑右醯(왼쪽에 포, 오른쪽에 밥알만 뜬 식혜)
5열 조율이시 棗栗梨枾(왼쪽부터 대추, 배 등의 과일과 약과, 강정), 홍동백서 紅東白西(붉은 과일은 오른쪽, 흰색 과일은 왼쪽)
제사는 정성이 최고다 지금이야 전화 한 통화면 스키장 콘도든 관광지 호텔이든 원하는 곳 어디에서든지 제물을 차려주어 제사를 지낼 수 있다지만, 그래도 제사 때 제일 어려운 것이 제물 준비다. 제사 음식에는 만드는 사람의 정성이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옛날에 가난한 선비가 살았다. 하도 찢어지게 가난해서 제삿날이 돌아와도 선친께 변변히 대접을 하지 못했다. 선비는 궁리 끝에 장터에 나가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도포 소맷자락 속에서 신주를 꺼내 주인이 보지 못하도록 살짝 음식 앞에 내보였다. 그러고는 아버지만 들을 수 있도록 작은 소리로 “아버님, 여기 밤, 대추가 있습니다. 여기 감이 있습니다. 여기 배가 있으니 많이 드십시오.” 이렇게 과일 맛을 보이고, 어물전에 가서는 “아버님, 여기 조기가 있습니다. 여기 명태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푸줏간에 가서 “아버님, 여기 소고기가 있습니다. 여기 돼지고기가 있습니다”, 채소 가게에 가서는 “아버님, 여기 숙주나물과 도라지, 고사리가 있으니 많이 드십시오”라고 했다. 그날 밤 아버지가 꿈에 나타나 “오늘 저자에 나가서 가게마다 다니며 제사 음식 푸짐하게 잘 먹었다. 오죽하면 네가 그렇게 했겠느냐”라며 부자가 되는 방법을 알려주어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제사란 음식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얼마만큼 정성이 들어갔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정성만 있다면 저잣거리 제사면 어떻고 요즈음 신세대의 콘도 제사면 어떻고 호텔 제사면 어떤가. 제사는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정성이다. 이벤트 회사에 주문해 차린다면 제물을 아무리 많이 차린들 무슨 소용이 있나. 차라리 정성이 담긴 맑은 물 한 그릇이 더 낫지 않겠는가.
제사상에는 왜 대추, 밤, 곶감을 올리나 조율이시가 됐건 홍동백서가 됐건 대추, 밤, 감, 이 세 과일은 아무리 간소한 제사라 할지라도 제사상 맨 앞줄에 반드시 올린다. 혼인 때 폐백상에도 이를 올린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대추는 가지가 부러질 정도로 열매가 다닥다닥 열린다. 뿐만 아니라 다른 나무와 달리 꽃이 한 송이 피면 반드시 열매 하나를 맺고 떨어진다. 사람도 태어났으면 대추처럼 반드시 결혼을 하여 자식을 낳고 가야 한다는 뜻이다. 그것도 대추나무처럼 많이 낳고 가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자손 번창하라고 제사상 첫머리에 대추를 놓는 것이다.
그럼 밤은 왜 올리는가. 대부분의 식물은 싹이 돋아나면 싹을 낸 최초의 씨앗은 사라져버린다. 하지만 땅속에서 새싹을 틔운 최초의 씨밤은 그 나무가 크게 자라도 땅속에서 썩지 않고 생밤인 채로 오래오래 남는다. 이런 묘한 생리 때문에 밤을 자손과 조상을 연결하는 영원한 상징으로 여겼다. 조상을 모시는 위패나 신주를 반드시 밤나무로 깎아 만드는 이유도 그 같은 밤의 상징성 때문이다.
감은 어떤가. 감 씨를 심으면 반드시 감나무가 나와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고욤나무가 나온다. 감나무를 만들려면 3~4년쯤 된 고욤나무에 감나무를 접붙여야 한다. 그제서야 나무에서 감이 열리기 시작한다. 고욤나무에 감나무를 접붙여야 감이 열리듯이, 태어났다고 다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가르침을 받고 배워야 제대로 된 사람이 된다. 생채기를 내어 접붙일 때 아픔이 따르듯이 사람도 교육이란 아픔을 겪어야만 한 인격체로 살 수 있다는 뜻에서 제사상에 감을 놓는 것이다.
왜 지방에는 모두 ‘학생’이라 쓰는가 제사상 앞에 ‘현고학생부군신위 顯考學生府君神位’라고 쓴 흰 종이를 붙인다. 바로 ‘지방’이다. 왜 지방에는 하나같이 ‘학생 學生’이라고 쓸까. 이를 풀어보자. 현고 顯考란 아버지(考)가 돌아가셨으나 제삿날 거룩하게 나타나셨다는 뜻이다. 부군 府君이란 ‘아버님’이란 뜻이고, 신위 神位란 ‘신령님의 자리’란 뜻이다. 관직이나 벼슬이 없었던 사람에겐 으레 ‘학생’이란 칭호를 붙인다. 지방이나 신주에 학생이라 쓴 말은 비록 벼슬을 하지 않았으나 평생을 공부하는 자세로 살았음을 나타낸 것이다. 옛날에는 남자로 태어나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가는 것을 가장 큰 영광으로 여겼다. 그러니 못 배운 것이 얼마나 한이 되었으면 죽어서까지 지방에 학생이란 칭호를 썼는지 이해가 간다. 한마디로 지방의 학생이란 칭호는 이승에서 못 배운 한을 저승에서 풀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반면 여자의 지방에는 학생이란 호칭 대신 ‘유인 孺人’이라 쓴다. 유인이란 9품직의 부인에게 내렸던 칭호다. 조선시대에는 각 품관의 정처 正妻에게는 남편의 직급에 맞는 관작을 주었다. 즉 1품관의 정처에게는 정숙부인 貞淑夫人, 2품관의 정처에게는 정부인 貞夫人, 9품 이하 문무관의 부인에게는 ‘유인’이란 작호 爵號를 내렸다. 하지만 여자에게는 설사 남편이 관직이 없더라도 지방에 ‘유인’이란 칭호를 쓰도록 했다. 그래서 성씨가 경주 이씨면 지방을 ‘현비유인경주이씨’라 쓴다.
이처럼 부인에게 작호를 부여한 것은 내조를 잘해 남편으로 하여금 청렴결백하고 공무에 충실하도록 하기 위한 특별한 배려라 할 수 있다. 한마디로 관료가 잘못을 하면 그 부인에게도 절반의 책임이 있다는 의미다.
기왕에 이야기가 나왔으니 죽은 이를 부르는 호칭에 대해 알아보자. 죽은 이를 부르는 호칭에는 공자나 맹자같이 자를 붙이는 경우도 있지만 선생, 처사, 학생 등 호칭이 제각각이다. 도대체 그 기준은 무엇이고, 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이들 호칭은 일종의 ‘사시 私諡’라 할 수 있다. 특히 시호는 죽은 후 내린다. 나라에 공을 세운 이가 죽었을 경우 조정에서 시호를 내려준다. 하지만 벼슬 없이 초야에 묻혀 학문에 전념하던 선비나 유학자에게는 제자나 문인들이 존경의 뜻을 담아 사시를 올린다. 먼저 공자나 맹자, 주자와 같은 성현에게 붙이는 ‘자 子’는 무슨 뜻인가. ‘자’란 남자의 통칭이다. 하지만 ‘자’를 붙이는 것은 곧 스승을 높인다는 뜻이다. 성씨 다음에 ‘자’를 붙인 공자, 맹자, 순자, 열자, 주자 같은 호칭이 그 예이다. 또한 성도 聖道를 전한 사람에게도 ‘자’를 붙인다. 특히 일가의 학설을 세워 학파를 개조한 사람에게 존칭의 뜻으로 ‘자’를 붙여 높인다. 한마디로 ‘자’란 최상의 존칭이다. ‘자’보다 한 단계 아래가 선생이란 칭호다.
이를테면 율곡 선생, 퇴계 선생이라 부르는 것이 그러하다. 또 유학자가 죽으면 선생 혹은 처사 處士라는 호칭을 붙이기도 한다. 비록 오늘날 선생이란 호칭은 아무에게나 붙일 수 있는 일반적인 것이 되어버렸지만, 이는 학문이 율곡이나 퇴계와 같은 반열에 들 수 있음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차례 순서
1 분향재배 제주가 제상 앞에 무릎 꿇고 분향을 한 뒤 절을 두 번 한다.
2 강신재배 강신이란 신위께서 강림하시어 음식을 드시기를 청한다는 뜻이다. 제주 이하 모든 사람이 손을 모아 서 있고, 제주가 신위 앞에 나아가 꿇어 앉아 분향하고 집사자가 술을 술잔에 차지 않도록 조금 따라 제주에게 주면 제주는 받아서 모사 그릇에 세 번 나누어 부은 뒤 빈 잔을 집사자에게 돌려보내고 일어나 두 번 절한다.
3 참신 강신을 마친 후 제주 이하 모든 참신자가 함께 두 번 절한다.
4 초헌 제주가 신위 앞에 나아가 꿇어 앉아 분향한 후 집사자가 잔을 제주에게 주면 제주는 잔을 받아 집사자가 따른 술을 양손으로 받들어 집사자에게 주고 집사자는 그것을 받아 상에 올린다.
5 계반삽시 메(밥) 그릇 뚜껑을 열고 수저를 꽂는 것을 말하는데 수저 바닥이 동쪽을 향하게 꽂는다.
6 독축 초헌이 끝나면 제주 이하 모든 참사자가 무릎을 꿇고 부복(공손히 엎드림)하며 축관은 꿇어 앉아 축문을 읽는다. 읽기가 끝나면 잠시 후 일어나고 제주는 두 번 절한다.
7 아헌 아헌이란 두 번째 올리는 잔이다. 두 번째 잔은 맏며느리가 올리는 것이 예지만 올리기 어려울 때는 제주 다음가는 근친자나 장손이 올린다(맏며느리가 잔을 올릴 경우에는 네 번 절한다.)
8 종헌 세 번째 올리는 잔으로, 아헌자 다음가는 근친자가 아헌 때의 예절과 같이 한다.
9 유식(또는 첨작) 종헌자가 채우지 않은 술잔에 제주가 무릎을 꿇고 다른 잔에 술을 조금 따라서 좌우측 집사를 통하여 술을 채운다.
10 합문 참사자 일동이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가는 것으로, 대청이나 마루에서 조용히 기다린다(대청일 경우에는 뜰 아래로 내려선다.)
11 계문 문을 여는 것을 말한다. 제주가 앞에 서서 기침을 하고 일동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간다.
12 헌다 숭늉을 갱과 바꾸어 올리고 메(밥)를 조금씩 세 번 떠서 말아놓고 정저한다. 이때 메에 꽂아놓은 수저를 숭늉 그릇에 반드시 담가놓는다.
13 철시복반 숭늉 그릇에 있는 수저를 거두고 메 그릇을 덮는다.
14 사신 참사자 일동이 두 번 절하고 지방과 축문을 불태운다.
15 철상 상을 걷는 것을 말하는데, 모든 제수 祭需는 뒤에서 물린다.
16 음복 조상께서 주신 복된 음식이란 뜻으로 제사가 끝나면 참사자와 가족들이 시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