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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문화 예술 유람기 - 한국화가 박희섭 김태희 부부와 임태규 정혜전 부부의 작업실 新 노매드 작가들의 베이징 상륙기
베이징 어느 외딴 마을에 컨테이너 박스 작업실을 만든 박희섭 씨 부부와 임태규 씨 부부. 새로운 환경은 창작의 활력소이기에 그 먼 곳에 둥지를 틀었단다. 형, 동생 하는 막역한 사이인 이들이 한지붕 아래 한가족처럼 살고 있는 베이징 작업실에서는 소문대로 후끈한 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컨테이너박스 작업실 앞에 선 작가들. 왼쪽부터 박희섭, 김태희, 정혜진, 임태규 작가 .

베이징 시골에 신접살림 차린 사연 허름한 컨테이너 박스 건물에서 청포도처럼 청쾌한 두 부부가 나왔다. 베이징 번화가에서 비껴 선 외딴 마을에 작업실을 낸 박희섭・김태희 씨 부부와 임태규・정혜진 씨 부부다. 네 사람은 모두 한국화를 공부한 작가들. 고적한 마을 분위기와 영 딴판인 이들의 등장은 그 자체가 작품이었다.
그들 중 정혜진 씨가 유난히 수줍게 싱긋거린다. 결혼 연차를 물으니 결혼한 지 1년도 안 되었단다. 지난해 10월 결혼해 11월에 이곳으로 왔으니, 이 새 신부는 듣도 보도 못한 베이징 시골에서 신접살림을 차린 것이다. 심지어 임태규 씨의 전시 일정이 빠듯해 신혼여행도 못 갔다. 결혼 7년 차인(그러나 아이가 없으니 늘 신혼 같다는) 박희섭・김태희 씨 부부에게도 이곳이 영 낯설기는 마찬가지. 어쨌든 두 부부가 합심해 이 거대한 컨테이너 박스 건물에서 지내게 된 사연이 궁금했다.
몇 년 전 박희섭 씨가 전시 차 중국에 들렀다가 중국에서 활동하는 한국 작가들의 작업실에 방문했다. 서울보다 임대료가 훨씬 저렴해서 작업하기에 충분히 넓은 공간에서 지낸다는 점이 우선 끌렸다. 그래서 지난해 6월 레지던시 프로그램으로 베이징에 잠시 머물렀다가 아예 이곳에 작업실을 내기로 했다. 이 소식을 임태규 작가가 들었다. 박희섭과 임태규 작가는 2006년 고양 스튜디오의 한 레지던시 프로그램에서 만나 형, 동생 하는 막역한 사이. 결국 올해 6월 베이징에서의 개인전을 앞두고 있었던 임태규 작가도 베이징 작업실에 합류하기로 했다.


1 두 부부가 사는 곳은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마을이라 어디든 가려면 택시를 불러 함께 이동해야 한다. 카메라 앞에서 장난기가 발동해 자전거 수레를 빌려 타고 동네 한 바퀴 돌아봤다.

작업실을 물색하던 두 부부는 바로 앞 마당에 작은 숲이 있는 컨테이너 박스를 발견했다. 넷은 만장일치로 이곳을 작업실로 정했다. 황량하기 이를 데 없는 작업실을 각오했던 이들에게 작은 숲은 횡재였다. 높이 7m에 면적 1백50평(495㎡)의 컨테이너 박스를 반으로 나누고, 각각 한 귀퉁이에 2층짜리 살림 공간을 만드는 공사를 했다. 작업 공간에서 계단을 타고 올라가면 부엌이 있고, 문을 열면 침실과 화장실이 있는 단순한 구조다. 컨테이너 박스를 반으로 접은 듯 두 집의 구조가 대칭으로 똑같다.
유쾌한 고립, 깊은 몰입 박희섭・임태규 씨에게는 공통점이 몇 있다. 둘 다 대학원 후배를 아내로 맞이했다는 점, 작업에 ‘수공의 품’이 많이 든다는 점, 그리고 한국화에서 시작해 자기만의 화풍을 세웠다는 점이다. 두 작가의 작업 과정을 들여다보았다. 박희섭 씨는 공예 재료인 자개를 회화 작품에 사용한다. 한지에 여러 번 선을 긋듯이 가느다란 자개를 무수히 붙여 이미지를 만든다. 바탕이 되는 한지를 마련하는 데에도 품이 많이 든다. 들기름을 여러 번 바른 한지를 2년쯤 묵힌 뒤 다시 오방색의 분채 가루로 칠한다. 임태규 씨는 한지에 가는 먹선을 긋고 또 그어 현대인의 초상을 그린다. 까슬까슬한 먹선을 입은 인물들은 경비행기를 타며 질주하고, 용 머리에 올라타 하늘을 날고, 목마를 탄 채 칼싸움을 한다. 빈틈이 보이지 않을 만큼 크고 작은 인물들이 이야기를 만들며 화폭을 빽빽이 메운다. 

2 한지에 가는 자개를 촘촘히 붙여 만드는 박희섭 씨의 회화 작품.

이렇듯 박희섭・임태규 씨는 젊은 한국화가 중에서 독창적인 화법으로 주목받는 작가들이다. 30대 후반, 작가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도약의 시기를 살고 있다. 그런데 왜 그들은 중국에서 작업을 개시한 것일까? 우선 박희섭 씨의 대답. “곧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이니 작업에 새 전기를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새로운 환경을 찾던 중 베이징에 가봤는데 베이징이란 도시의 기운이 저를 강하게 끌더군요. 오래된 땅에 흐르는 역동적인 기운이요.” 임태규 씨는 “거의 고립된 것이나 다름없는 이곳에 있으니 작업량이 두 배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몰입도 훨씬 깊게 되고요”라고 답했다.
베이징은 요즘 현대미술계 기획자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곳이다. 인근에 있는 798 예술지구를 움직이는 약 70%의 힘은 해외 바이어 아닌가. 이들의 작품이 한국에서는 ‘변형된 한국화’지만 세계를 무대로 했을 때는 ‘박희섭표 화풍’ ‘임태규표 화풍’이 된다. 장르에 연연하지 않고 고유한 개성으로 승부할 수 있다. 그래서 이들은 무한한 가능성을 보고 베이징에 정착했다.


3 임태규 씨의 신작 ‘Erehwon’(2008) 앞에 자리한 임태규・정혜진 씨.

“이 집이 저 집이고, 저 집이 이 집이에요” 베이징에 온 뒤로 박희섭・임태규 씨의 작업에 새로운 변화가 일었다. 우선 마당의 작은 숲에 자리 잡은 늙은 버드나무가 박희섭 씨의 화폭에 옮겨졌다. “여기 있는 버드나무는 사람의 다리나 손가락의 뼈마디를 닮은 듯 희한하게 생겼어요. 중국 버드나무가 원래 이런가 싶었는데 이곳 사람들도 이런 버드나무는 처음 본다고 하더군요.” 기묘하게 생긴 느티나무도 그렇거니와, 이들의 작업실 앞에서 제비가 늘 낮게 나는 걸 보면 터가 심상치 않은 것 같다며 그는 껄껄 웃었다.
임태규 씨는 지난 5월과 6월에 베이징 798 예술지구의 갤러리 ‘아트 시즌스’에서 연 개인전에서 가로 8m, 높이 3m가 넘는 거대한 작품을 선보였는데, 여기에 두 부부의 작업실 풍경을 담았다. 화폭을 수놓은 무수한 남녀 군상은 진지하나 심각하지 않은 표정이다. 매일의 일상을 새로운 파도 하나를 넘듯 때론 유쾌하고 익살스럽게, 때론 숨가쁘게 살고 있는 모습이 그려졌다.
새 둥지에 적응하랴, 작업에 몰두하는 남편 뒷바라지하랴, 아내들은 잠시 작업을 보류한 상태다. 하지만 아내들은 바쁘다. 베이징에 아는 사람도 별로 없고, 시내에서 한참 떨어진 곳이다 보니 이들 네 사람이 서로의 동료이자 이웃이자 가족이며 친구 아닌가. 세 끼 밥 해주고, 간식 만들어주고, 함께 산책도 해야 한다. 그런데 지내보니 넓은 작업실에 둘만 있는 것보다 넷이 함께하면 훨씬 활기가 넘쳤다. 그래서 이곳의 오전 풍경은 둘 중 한 작업실에서의 수다스러운 티타임으로 시작된다.


4 전시를 준비하며 분주히 작업 중인 박희섭・김태희 씨.

‘누구네 집’이라 할 것 없이 네 사람은 한식구처럼 지낸다. 김태희 씨가 “이 집이 저 집이고, 저 집이 이 집이에요”라고 할 정도다. 체력 보강이 필요할 때면 신선하고 저렴한 해산물과 채소를 잔뜩 사다가 마당에서 ‘보양식 바비큐 파티’를 연다. 김태희 씨는 형수 노릇을 톡톡히 한다. 요리 솜씨가 수준급이라 열악한 환경에서도 철마다 각종 김치를 척척 담그고, 입맛 없다 싶으면 매콤한 아구찜을 만들어 모든 이의 입이 귀에 걸리게 한다. 그뿐이랴. 독특한 심미안까지 갖춰 웬만한 중국 헤어 숍에서 만족하지 못하는 남편의 머리를 직접 잘라주는 미용사이기도 하다.
전시가 임박해 작업이 풀리지 않을 때는 극심한 스트레스를 경험하지만 그마저도 네 작가는 반갑단다. 이렇게 변화무쌍한 환경에서 지낼 수 있는 것도 젊은 작가들에게는 행운이며 복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기회가 된다면 뉴욕에서, 혹은 인도 어느 시골 마을로 옮겨 다니며 작업을 계속하고 싶다. 훗날 이곳 베이징의 버드나무 옆 작업실은 왁자지껄 유쾌한 전초 기지로 기억될 것이고.

* 임태규 씨의 개인전 5월 9일부터 7월 24일까지 베이징 798 예술지구에 있는 아트 시즌스에서 열렸다. 문의 86-10-5978-9850(베이징), 02-3443-7475(서울). 박희섭 씨의 개인전은 9월 5일부터 22일까지 베이징 798 예술지구에 있는 아트사이드에서 열린다. 문의 86-10-5978-9196(베이징), 02-725-1020(서울)

나도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9년 9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