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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김남조 날마다 시가 내 시린 손을 잡아주길
60년 동안 1천 편의 시를 쓰고도 “내게 있어 문학은 ‘병이면서, 병이면서, 또 병이면서 겨우 약간의 치유’, 병이라도 오랜 지병은 정겨울 것이기에 그 병이 싫지가 않다”라는 여든두 살의 시인 김남조 선생을 만났습니다. ‘백지를 능가하는 글을 쓰고 침묵보다 나은 말일 때 말하라’며 자신을 담금질하는 여든두 살의 靑年 시인. 그가 우리에게 선물하는 깨달음의 시간입니다.



이 시간이 지나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것처럼 그 대문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입국 심사대 앞에 선 것처럼. 한 시대를 두고 큰 이름을 얻은 작가 김남조 선생을 만나러 온 길입니다. 철 대문 개폐기 소리가 들리고 그가 역광 속에 섰습니다. 숱 많은 파마 머리와 단정한 앞맵시가 희부연 빛 속에 드러납니다. 후배 작가들의 교과서 같은 시인, 문청들이 경배하는 시인. 그의 집 대문 앞에서 내 가슴은 다시 황황합니다.
그를 ‘한국의 사포 Sappho’(인류 최초의 여성 시인), ‘교과서 시인’(그의 시 ‘설일’ ‘정념의 기’ ‘겨울바다’ ‘낮잠’ 등 다수가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되면서 ‘교과서 시인’이라는 별칭이 붙었다)이라고 했던가요. 그의 시 첫 줄을 읽으려면 심호흡부터 크게 한번 하게 된다는, 그 정도로 문장의 미학이 대단해 곱씹게 된다는 어느 작가의 말이 떠오릅니다. 문청을 자처하던 내 여고 시절, 늦은 밤에 정좌하고 읽던 그 글들도 떠오릅니다. 순결한 말더듬이 같은 그 시를 읽으며, 난 말갛게 회개하는 기분을 얻곤 했습니다. 그 시인의 집 거실에서, 그가 내온 삼각포리 커피우유를 크리스털 잔에 따라 마시며, 시를 읊어주는 그 청안한 음성을 듣게 되다니. 이 시간이 송구할 뿐입니다.
“겨울 나무와 바람/ 머리채 긴 바람들은 투명한 빨래처럼/ 진종일 가지 끝에 걸려/ 나무도 바람도/ 혼자가 아닌 게 된다// 혼자는 아니다/ 누구도 혼자는 아니다/ 나도 아니다/ 하늘 아래 외톨이로 서 보는 날도/ 하늘만은 함께 있어주지 않던가// 삶은 언제나/ 은총의 돌층계의 어디쯤이다/ 사랑도 매양/ 섭리의 자갈밭의 어디쯤이다// 이적진 말로써 풀던 마음/ 말없이 삭이고/ 얼마 더 너그러워져서 이 생명을 살자/ 황송한 축연이라 알고/ 한 세상을 누리자// 새해의 눈시울이/ 순수의 얼음꽃 승천한 눈물들이/ 다시 땅 위에 떨구이는/ 백설을 담고 온다”_‘설일’


1 1976년 한 출판 기념회에서 서정주 선생과 함께 찍은 사진.
2 남편 김세중 교수와 어느 연회장에서(1974).


그의 시는 모든 날을 알고 있었다 갈라진 벽지에도 시심이 깃들어 있을 듯한 이 집에서 그는 50년을 살았습니다. 네 아이의 어미로 일가를 이루었으며, 16권의 시집, 12권의 수필집을 잉태했습니다. 그리고 1천여 편의 시. 그 안에 그의 인생 내력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습니다.
1927년생. 출생지는 경북 대구. 4남매였으나 모두 일찍 죽고 홀로 남은 외딸과 어머니. 그의 어린 시절에서 우화 같은 과거는 유실됐습니다. 아시아의 작은 반도, 식민지의 아이로 태어난 아이들이 모두 그러했듯이. 유년에 대한 그의 기억은 빈방에서 가위로 종이 썰고 놀던 기억, 일본어를 국어로 부르라는 강압에 어린 마음에도 비애가 치받곤 하던 기억만 있습니다. 아버지를 따라 도일 渡日해 규슈 여고를 다니던 식민지의 아이, 폐결핵을 앓아 장기 결석으로 퇴학 조치(출석률 100%를 경합적으로 시키던 시대라 장기 결석이 불가피한 학생들은 병이 나으면 재입학된다는 조건부로 자진 퇴학 조치됐다)된 여고생 김남조, 외국인이라곤 찾을 수 없는 일본 학교에서 학적마저 잃은 병든 아이가 꺼끄러운 연습장에 써 내려간 잡문 수기들, 그리고 그때 만난 타고르의 시편들. “이런 세계가 있나 하는 깊은 충격을 받았죠. ‘선 善은 문을 두드리지만, 사랑은 이미 문이 열려 있음을 안다’라는 구절을 읽으며 영혼에 벼락을 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그때부터 글 쓰는 흉내도 좀 내고 문학을 지망하게 된 것 같습니다.”
서울대 국어교육과를 다니던 중 6・25 전쟁으로 마산에 피난가 국어 선생 하던 시절, 마산 성지여고에서 연극 공연을 지도하다 만난 미술 교사 김세중(한국 근대 조각의 개척자로, 후에 대한민국의 상징적 이미지가 된 광화문 앞 충무공 동상을 조각했다. 세종대왕 동상, 유엔탑, 국회의사당의 애국과 평화상 등이 대표작이다)과의 결혼, 전쟁의 와중에 탄생한 처녀 시집 <목숨>, 남편도 그도 서울대 교수가 되고 아이 넷을 키우는 평균적인 삶을 산 나날들, 아무리 바빠도 주일만큼은 꽃을 둔 식탁에, 아침 목욕을 시키는 정성으로 4남매를 키운 이야기, 김세중 교수가 국립현대미술관 초대 관장으로 미술관 건립에 몰입하다 과로로 준공식 전에 돌연 사망한 사연, 남편과 사별했을 때조차 시가 애처로워지는 걸 경계한 ‘시인 김남조’의 이야기, 남편이 그리워 죽겠다고 울부짖기 전에 ‘안식을 주는 가정, 음식을 데워 기다리는 아내가 되지 못했음’을 자책한 시, 그 후로 효창동 양옥집에서 홀로 살아온 시간….
“그땐 이상한 시절이어서 남편들이 12시 통금 시간이 돼야 귀가하는 집이 많았고, 나 역시도 강의와 원고 쓰기, 강연이 겹치는 데다, 가사와 육아 부담도 있었어요. 항상 스위치로 작동되는 기계처럼 노동에 휘몰렸지요. 저절로 외롭다, 그립다 같은 애연한 율조가 솟아나왔죠. 그 양반이 늦게 들어오는 바람에 그 무수한 저녁시간에 쓴 수필을 주부들은 맛있다는 듯이 나누어 읽었지요. 그땐, 젊은 날에 열심히 살면 미래에 함께 쉬고 여행하는 시기가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어느 날 그가 떠나더라는 겁니다. 요즘 젊은 부부들에게 ‘현실, 그때를 아끼라’고 말하고 싶어요. 또 남성의 삶이 여성의 삶보다 더 어렵다는 것, 더 고개가 높고 더 삭막하고 긴장이 많다는 걸 이해하라고 하고 싶어요. 머슴이나 문지기의 자리에 놓인 ‘아버지’의 기 눌림을 풀어줘야 한다는 말도.” 그의 이 강물 같은 이야기에 시간은 의미를 잃고 있습니다.
김세중 선생이 가고 남은 흔적, 4남매 중 장녀 김정아 씨는 경원대 교수로, 장남 김녕 씨는 서강대 교수로 교육자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둘째 아들 김석 씨(뉴욕에서 컴퓨터 그래픽 아트 작가로 활동)와 셋째 김범 씨(2001년 에르메스 미술상 수상)는 미술가로 살고 있습니다. 며느리 유현미 씨도 요즘 가파르게 ‘뜨고 있는’ 미술가입니다(<행복> 2009년 8월호 표지 작가). 김남조 선생은 여성 작가라면 누구나 져야 할 짐, 책상과 밥상을 함께 부여잡고 가야 하는 숙제를 아는지라, ‘예술이 항상 최고’라는 말로 며느리의 대학원 진학(뉴욕대)을 독려했습니다.
“서 있지 않고 쉼 없이 걷는 삶/ 배고픈 날도 걸어가는 삶/ 그런 줄을 알면서 아들아/ 내일이면 큰 바다를 건널/ 너의 방 불빛에/ 엄마는 척추를 다친 사람만 같구나// 엄마를 닮아/ 감상에 시달림이 고통이라는/ 그 미안한 내 아들아/ (중략) / 엄마의 참얼굴은 너도 모른다/ 마음은 한지라/ 수시로 문풍지 소리를 내고/ 실은 사랑도 모른단다/ 가슴 닳아 뭉개져서/ 핏물 질펀히 흐르는 일 외는/ (후략).”_‘아들에게’ 중


3 50년 동안 살아온 효창동 집 2층 거실. 그 안에는 한국 근대 조각의 개척자인 남편 김세중 교수의 조각 작품과 미술가인 둘째 아들 김석 씨, 셋째 아들 김범 씨, 며느리 유현미 씨의 작품이 함께 자리한다. 그리고 선생의 기록을 정리한 자료와 스크랩북이 한쪽 벽을 차지하고 있다.

시, 사랑, 그 구원의 손길 이쯤에서 소설가 박범신 씨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딸이 대학 때, 새내기 아무개가 내 딸의 ‘아버지’가 유명 작가라는 말을 듣고 ‘박씨’인 내 ‘딸’에게 물었답니다. ‘그럼 언니 아버지가 바로 박완서 씨야?”…제때 웃으셨나요?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이 이야기 앞에서 ‘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차라리 무색합니다. 시가 죽었다는 이 시대에, 살아남은 시마저 수다스러운 걸개그림 같은 이 시대에 시력 詩歷 60년의 시인은 시로 무얼 더 말하고 싶은 걸까요.
“시를 쓴다는 건 참으로 적멸한 일입니다. 하물며 그 시를 읽는다는 건 영화를 보거나 축구를 보는 것에 비해 얼마나 소박한 구경거리입니까. 좀 과장하면 권태로울 수가 있는 것이지요. 그래도 우리는 시를 읽습니다. 시에서 사랑을, 진리를, 나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칼릴 지브란의 예화가 있습니다. 그가 열다섯 살에 먼 지방엘 갔는데 어른들이 ‘너, 누구와 왔니?’ 물었고, ‘네, 저는 저하고 함께 왔습니다’ 했답니다. 이 말에 문학적 진실이 있습니다. ‘나는 나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문학이 바로 ‘나를 찾는’ 일을 도와줄 것이지요. 또 문학 하지 않는 이들도 문학이라는 거대한 성에 사는 것과 같아요. 사람은 자신의 삶의 필자이며 작중 인물이니까요. 소설가가 삶을 구상하듯이 모두들 다음 날의 설계를 다지며, 흔들리는 부분을 오늘 바로 세우려 하지요.” 그 이야길 듣고 있자니 투명한 말들이 내 중심에 고요하고 격렬히 쌓이는 것 같습니다.“잎이 아닌 뿌리에서 더욱 봄다웁기를./ 능금 익히듯 사람들 마음에 공들이고/ 충직한 농부에서 모범을 취하여라/ 백지를 능가하는 글을 쓰고/ 침묵보다 나은 말일 때 말하여라.”_‘좌우명’ 중
‘사랑의 시인 김남조’란 표현은 이제 관용구처럼 돼버렸습니다. 그의 시는 유난스럽지 않고 과장하지 않고 건조하지도 않게 사랑을, 생을 그렸습니다. 부정, 냉소는 한 오라기도 없이 나 아닌 다른 존재들에 대해 애끊으며 그려낸 시. 정인에 대한 사랑, 자식에 대한 사랑, 자연에 대한 사랑, 종교적인 사랑, 시에 대한 사랑 등 그 곁가지는 모두 ‘사랑’이라는 줄기에서 나왔습니다. “나는 읽는 이의 고뇌를 치유하지는 못하더라도 돌을 던지는 아픔을 주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세상에 부스러기라도 남는다고 생각할 적에, 가능하면 따뜻한 마음을 시에 담아 남기고 싶었습니다.” 이 한마디에서도 그의 정신적 품위를 느낄 수 있습니다. 갑자기 이야기 하나가 떠오릅니다. 문인들과의 저녁 자리에서 김남조 선생이 서빙하는 젊은 처자에게 편지처럼 접은 만 원권을 악수하듯 슬쩍 건네주고, 눈빛으로 서로 웃더라는 이야기. 나와 타인의 삶에 대한 예의에서 비롯된 따뜻함, 그 삶에서도 즙처럼 스며 나오는 것입니다.“떫은 사랑일 땐/ 준 걸 자랑했으나/ 익은 사랑에선/ 눈 멀어도 못다 갚을/ 송구함뿐이구나.”_‘사랑초서’ 53 중
60년 동안 시를 쓴 선생은 아직도 쓰려는 첫 단계에서 시에 겁먹으며, ‘주십시오. 나는 비어 있습니다. 부디 도와주십시오’란 마음입니다. 그렇게 시를 원고지에 쓰고 나면 큰아들이 컴퓨터로 쳐서 출판사에 보냅니다. 큰아들이 컴퓨터로 문서화하면서 비평할 건 비평하고, ‘이 말은 요새 안 쓰니 바꾸면 어떠냐’ 하면, 어머니는 고쳐 쓰기도 해 시집 한 권을 만들어냅니다. 다 쓰고 나서는 “나는 시인이 아니다./ 시를 구걸하는 사람이다/ 이 고백 진심이었다// 백기 들고/ 항복 항복이라고 굴복한 일/ 여러 번”(‘나의 시에게’ 중)이라고 고백합니다.
“바깥사람이 세상 떠났을 때 6개월 정도 글을 안 썼다는 얘기가 있습니다만, 그 시간 동안 메모는 자꾸 하게 됐어요. 그런데 정말로 진정한 시인은 시를 안 쓸 것입니다. 기도도 정말로 좋은 기도는 반만 하는 것처럼요. 언젠가 한 신부님의 시에 감복했는데, ‘나의 가장 아름다운 시가 나의 삶보다 덜 아름답게 하여 주시고’라는 거였어요. 삶으로 쓰는 시….” 이쯤에서 그의 시를 소리 내어 낭송하고 싶은 건 왜일까요?“진검을 지닌 이/ 진검 그것 외엔 가진 거 없는 이는/ 좀체 칼을 뽑지 않는다// 한 남자와 한 여자도/ 사랑한다는 마음의 진검을/ 평생 동안 아껴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날에 서로/ 알고 있었다”_‘진검’


그의 시 1천여 편 중 1백 편을 골라 담은 시집 <오늘 그리고 내일의 노래>(왼쪽 책)가 올해 초 출간됐다. 천 년을 간다는 한지에 납활자 방식으로 인쇄한 영구 보존판 활판 시집이다.

나이 듦에 대하여 그는 요즘 작고한 문인들 이름을 백지에 써 내려보고는 그들의 삶과 문학을 숙연히 짚어본다고 합니다. 자신도 곧 그 반열에 끼게 될 것을 예감하면서. “내 중년은 힘들었어요. 여행도 없고 양식도 없고 연애도 없고 이어령 씨처럼 지적인 탐욕도 없었으며 마음이 배고프고 소모된 여자로 지냈어요. 그런데 노인이 되니까 아픔도 순하게 왔다 가요. 젊어서는 실바람에도 칼금이 그이는 아픔을 느꼈으나, 이제는 좀 덜 슬프고 덜 외롭고 덜 아프고. 요즘 나는 두 시간 동안 앉아서 깊이 생각만 하고 있어도 전혀 심심하지 않아요. ‘오늘도 천지간 이 빛에 목욕 중이니 나의 눈 행복하다’ 하면서. 젊을 때는 사랑의 결핍에 늘 가슴 아팠지만 지금은 제 사랑이 모자랐다는 것도 깨달았어요. 스스로 위로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고 젊어서는 찾지 못했던 행복이에요.” 저렇게 청안한 눈빛은 삼가함과 기다림의 세례를 받은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겠지요.
“언젠가 신부님께 좋은 말씀을 들었어요. ‘죽기 전에 죽으면 죽을 때 죽지 않으리라’는. 우리가 죽음처럼 치열하게 아끼고 절실하게 살면 죽을 때는 초연할 수 있다는 이야기죠. 남은 세월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은 많이, 치열하게, 절실하게 감동하는 일입니다. 나의 여생에도 날마다 시가 내 시린 손을 잡아주기를 염원합니다. 이런 데 좀 욕심 내며 살다가, 가게 될 땐 편하게 만족하면서 떠날 겁니다. 지금까지 산 것도 참 괜찮았어요. 이 광막한 자연 안에 생명으로 살았다는 것, 참 좋은 일이었어요.” 가슴에 무언가가 가득 차오릅니다. 잠언 같은 이 이야기는 오랫동안 내 마음에 응고돼 있을 것만 같습니다.
‘깨달음’이라는 게 사는 나라의 출국 심사대를 빠져나온 듯, 철 대문을 열고 세상에 나왔습니다. 8월의 햇무리구름이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내일도 선생은 뜰에 앉아 낮과 밤이 가고 다시 아침이 오는 것을 무욕하게 바라볼 것입니다. 바라보는 일이 일인 저 구름처럼. 간절한 마음, 따스한 마음으로 사람과 세상을 바라보고 있을 것입니다.
“…나의 시/ 내게서 독립하여/ 나의 이인칭이 되어라// 두 문으로 마주 서서/ 절로 오는 거 절로 다녀가게 길 터주며/ 안 쓰이는 외로운 이름들을/ 간절히 간절히 호명할지니// 나의 시/ 나 떠난 후에도/ 오래오래 너는 그렇게 하여라/ 부름 없는 외로운 이름들을/ 땅 끝까지 불러주는/ 눈물 같은 순정의/ 이인칭이 부디 되어라’_‘나의 시에게 2” 중


김남조 선생은 평소 한복을 즐겨 입는데, 지금 입은 옷은 디자이너 이영희 씨가 지어 선물한 것이다. 단정하고 품위 있는 김남조 선생과 많이 닮았다.


최혜경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9년 9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