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민자 선생 작업실에 모인 가족.
왼쪽이 딸 하태임, 중간에 선 사람이 사위 강영길, 오른쪽의 대형 캔버스 앞에 선 사람이 류민자 선생. 문 왼쪽 벽에 걸린 작품과 딸의 앞뒤로 놓인 작품이 하인두 선생의 추상화, 그 앞의 화이트 톤의 그림이 하태임 씨의 유화, 그 옆 사진 두 점이 강영길 작가의 작품. 그 외의 모든 작품은 류민자 선생의 동양화다.
안개 속에 나타난 몽롱한 산자락을 대하자 가슴이 할랑거린다. 건너편에서 달려오던 지프차가 앞 유리창으로 물벼락을 들씌워도 마음이 찌푸려지지 않는다. 물과 나무가, 강과 산이, 흑과 백이 뒤엉켜 있는 양평 청계리, 수묵산수 같은 풍경을 가득 안고 그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한국 추상회화의 선구자 고 하인두 화백의 자취가 깃든 집과, 그가 평생 애끓게 사랑한 아내 류민자 선생(동양화가), 딸 하태임(서양화가), 사위 강영길(사진작가), 아들 하태범(조형예술가) 작가의 ‘예술’을 만나러.
자식이 승업 承業하는 것만큼 큰 효도가 없다는데, 아들딸에 사위까지 미술 하는 가족이 되었으니 이것만큼 복된 일이 있을까(물론 자식들이 자신과 똑같은 업고를 치러야 하는 데서 오는 애달픔도 크겠지만). 더구나 이 가족은 하인두 화백의 20주기를 맞아 <오색 동행>이라는 특별한 전시를 준비하고 있다. 인사아트센터 각층에서 각각 개인전을 여는, 그래서 갤러리를 다 돌고 나면 ‘예술 가족’의 서사가 한눈에 보이는 전시.
청계리의 아늑한 산자락에 안긴 이 집에는 지금 류민자 선생과 딸 부부인 하태임・강영길 씨가 살고 있다. 나란히 선 두 동의 작업실을 사이좋게 나눠 쓰면서. 그나마 세월에 깎여 편안해진 것이라는 정갈한 성품의 류민자 선생 작업실은 클로로포름 냄새가 감돌 것처럼 청결하다. 곳곳에 걸린 하인두 화백의 작품이 공간에 훈기를 더한다. “우리 딸 태임이의 작업실은 물감 자국 때문에 정신을 못 차려요. 나랑 작업실을 함께 쓸 때 싸우길 얼마나 싸웠는지….” 어머니는 아들(하태범)이 독일로 가기 전 쓰던 작업실을 딸과 사위에게 내주었다.
예술과 생존 사이의 외줄타기 하인두, 류민자. 이 부부 작가의 이야기는 흘려 넘길 수 없는 구석이 있다. 여자는 집 때문에 좁아지고 남자는 그 여자 때문에 좁아진다는데, 이 부부의 삶은 좀 남달랐다. 작가로서, 그리고 식솔을 챙기는 지아비 지어미로서 슬픔과 기쁨과 영광의 물방울을 모두 나눠 마셨다. ‘여고생 류민자’가 다니던 덕성여고의 미술 교사 ‘하인두 선생님’, 그때 ‘이미 단발머리 소녀 류민자를 마음에 들였으나 겁쟁이 주제에 엄두도 못 내고’(<월간 샘터> 1980년 7월호에 실린 하인두의 글 ‘몸져 누운 겁쟁이’ 중) 말았던 청년 하인두. 졸업 후 우연히 다시 만났지만 “선생님 이미 늦었어요”란 말에 한 달 이상을 몸져 누운 하인두를 찾아간 류민자. 그렇게 사랑을 하고 반대 끝에(덕성여고 미술 교사로 일하던 1960년, 하인두 화백은 북에서 내려온 친구를 재워줬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인 ‘불고지죄’에 걸려 옥살이를 했다. 그 이후로 여러 공민권이 박탈돼 교직은 물론 취업, 공직, 해외여행 등이 금지된 채 16년을 살았다. 그 충격으로 하인두 선생은 우울증과 신경쇠약에 시달리기도 했다. 이게 결혼 반대의 이유다) 결혼도 하고 아이 셋도 낳고 20년 넘게 동고동락했다.
남편 대신 식솔 생계 해결하느라 그림 한 번 그리지 못하고, 밤이면 아기를 업은 채 남편의 작업(강렬한 색으로 그린 선 밑에 나일론 천을 놓고 천을 접거나 주름지게 꿰매는 일)을 도왔던 아내가 급성 간염으로 흑달까지 와 죽게 생겼을 때 남편은 병실에서 사라졌다. “명동화랑에 개인전 날짜 잡아놨다. 10월 18일 우리 결혼기념일이다. 이제 열심히 그림 그려라. 당분간 학교도 쉬고….”
1 하인두 화백의 작품으로 만든 대형 태피스트리 작품 아래 자리한 아내와 딸.
며칠만에 나타난 남편 덕분에 아내는 첫 개인전을 열 수 있었다. 그 이후 아내는 학교를 그만둔 후에도 화실을 차려 입시반 지도로 밥벌이를 해야 했지만 매년 격년제로 부부가 개인전을 열면서 서로 북돋웠다. 1987년 하인두 선생이 직장암 말기 선고를 받았을 때 아내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죽는 순간까지 그림을 그리다 죽는 것도 얼마나 행복할까’라며 남편을 깨우치고 격려했다. 하인두 선생이 세상 떠나기 전의 날들을 집약하듯 열심히 살았던 건, 1989년 스무 번째 개인전까지 치르며 3백 호 대작 ‘혼불’을 완성할 수 있었던 건 아내의 북돋움이 컸다. “평소엔 무뚝뚝하던 하인두 선생님이 내 그림 보고는 ‘자야, 그림 좋다. 내가 글을 쓸 테니까 너는 그림 그려라’ 하곤 했어요. 투병 중에도 내게 “당신은 그림에 설명이 많아요. 좀 단순화시켜봐요”라며 조언했고요. 그해 저도 샘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류민자 선생의 눈에 어린 물기에, 잠시 그의 말을 받아 적기가 힘들다.
예술의 세계와 ‘생존’의 세계를 함께 꾸려야 했던 이 부부. 의무와 자유를 둘 다 가지려는 욕망을 잘 다스리고, 결혼과 자신을 둘 다 존중하는 법을 잘 알았던 사람들이다.
따로 또 같이, 닮은 듯 다른 그림 하인두 선생의 그림에는 한국적 추상 미술에 대해 고민한 흔적이 낭자하게 스며 있다. 고뇌 끝에 그가 만난 답은 오방색과 단청, 만다라였고 그는 이 형태들에서 동양의 정신세계를 발견했다. 반복되는 패턴이 무수히 그려지지만 항상 캔버스 복판에는 구심점이 있는, 일종의 ‘우주도’ 같은 그림. 류민자 선생은 대자연, 탑, 반가사유상 등을 강렬한 색면으로 표현하는데, 그의 작품에서도 만다라적 세계관이 그림의 구심점이다. 서양화(하인두), 동양화(류민자)로 표현 기법은 다르지만 한국성, 대자연, 우주라는 모호한 개념을 색과 형태로 드러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작품은 그 끝이 맞닿아 있다고 평론가들은 입을 모은다.
“흔히 부부는 닮는다고 한다. 두 개의 개성이 닮는다는 것은 예술의 세계에서는 죽음이나 마찬가지이다. 어느 한쪽이 희생되는 경우가 많은 것도 이에 연유됨이다”(평론가 박영택 선생이 <오색 동행>전을 위해 쓴 글)란 문장 앞에서 류민자 선생은 이렇게 일갈한다. “같은 방향을 보면서 사니까,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사니까 좋은 나쁘든 서로 스며드는 게 아닐까요?”
또 다른 씨앗 하태임, 하태범, 강영길 딸 태임, 아들 태범에게 하인두 선생과 류민자 선생은 그저 생물학적인 유전자를 나눠준 부모가 아니었다. 마음과 범절이 찌들지 않은 것도, 예술 하는 사람의 기쁨을 갖게 한 것도 아버지 어머니 덕이었다고 두 사람은 고백한다. 이 집엔 하인두 선생이 딸 태임의 담임 선생님에게 보낸 편지가 남아 있다. “…
2 아치울에 살 때 정원에서 찍은 하인두 화백의 모습.
1 청계리 집 뒷동산에는 하인두 선생 10주기 때 조각가 정관모 선생이 만든 그림비가 세워져 있다. 그림비 건립을 위해 강원룡 목사, 구상 선생, 강국진 선생 등 많은 이가 정성을 보탰다.
2 하인두 선생이 그린 자화상과 아내를 위한 스케치.
3 하인두 화백의 흔적이 남아 있는 화구.
하태임은 현재 미술(서양화) 전공으로 기왕이면 고졸 후엔 파리에 유학시킬 계획으로 있습니다. 부모로의 못다 한 것까지 여식에게 저의 꿈과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보충수업과 자율학습은 부득이 시간을 제외해주시고 편의를 봐주시고 많은 편달을 바라 마지않습니다. 태임 아비 하인두 드림” 딸의 재능에 믿음을 실어주었던 아버지의 1주기 회고전이 열린(1990년) 다음 날 딸 태임은 파리로 유학을 떠났고, 자신만의 관념을 세운 후에야 돌아왔다.
파리 유학 시절 만나 결혼한 하태임・강영길 부부에게도 충만한 부부의 목록이 있다. 상업 사진 작가로 활동하는 한편 아내의 권유로 가끔 작은 전시를 열어오면서 강영길 작가는 순수 예술의 씨앗이 가슴속에 자라고 있음을 알았다. 그는 2006년부터 순수 사진 작가의 길을 걷고 있다. 하태임 작가는 캔버스 위에 연속적으로 원색의 붓질을 하며 완성도를 이뤄가던 작품 위에 ‘지우는’ 붓질을 다시 가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강영길 작가는 구름, 바다, 대나무를 찍는데, 현대 사진과 거리가 먼 과거의 기억, 풍경 너머의 정신을 보여주는 사진, 회화적인 사진을 만들고 있다.
1 하인두 화백은 오방색과 단청, 만다라 등의 형태에서 동양의 정신세계를 발견했다.
반복되는 패턴이 무수히 그려진 캔버스에는 늘 구심점이 존재하는 ‘우주도’ 같은 그림이다. 하인두, 혼불, 캔버스에 유채, 1989
2 하태임 작가는 색채의 반복으로 생기는 틈새 공간이나 차이를 들여다보고, 그리는 행위를 통해 지우는 개념을 표현한다. 눈에 볼 수 없는 철학이나 개념을 가시적인 색채로 풀어내는 것. 하태임, 통로(Un Passage), 캔버스에 유채, 2008
3 강영길 작가는 대나무에 따라붙는 관념과 의미를 모두 지우고 대나무만 바라본다. 유년의 기억과도 오버랩되는 대나무는 그의 또 다른 자아이기도 하다. 강영길, 존재, D-Print Diasec, 2008
4 류민자 선생은 대자연이라는 모호한 개념을 색과 형태로 드러내는데, 이 안에서 생명의 규칙을 발견하게 된다. 명료한 윤곽선, 강렬한 색면으로 만다라적 세계관을 표현한 작품이 주를 이룬다. 류민자, 정토 3, 캔버스에 유채, 2009
5 하태범 작가는 전쟁의 흔적을 사진으로 찍고 그걸 다시 무채색의 작은 모형으로 재구성한다. 그 모형을 처음에 찍은 사진과 같은 구도로 다시 찍는 작업을 한다. 세상사를 바라보는 무감정한 제3자의 시선. 하태범, AmbivalencWhite-Modell , photo, 2008
“2003년부터 2004년까지 상업 사진과 순수 사진을 병행할 때 제 작업엔 컬러가 거의 없었습니다. 정서가 모호하고 추상적인 작가였지요. 그런 저에게 구체적인 개념과 시각적인 재현 능력을 만들어준 사람이 하태임 씨입니다.” “십몇 년 동안 한솥밥을 먹어온 사람들이 갖는 교집합일까요? 저속으로 촬영한 사진처럼 많은 시간을 조망하게 하는 강영길과 하태임의 작품, 이렇게 정리하고 싶은데….” 남편에게 작가로서의 길을 비춰준 등대 같은 아내, 아내의 빛과 그림자가 되어준 남편의 다이얼로그다.
하인두 선생의 막내아들 태범 씨는 지금 독일에서 자신만의 성을 쌓아가고 있다. 전 세계 분쟁 지역, 폭력이 휩쓸고 간 잔해를 사진으로 찍고 그걸 다시 무채색 또는 회색의 작은 모형으로 재현하거나, 사진으로 촬영하는 작업을 하는 작가다. 피해 현장을 보면서 슬퍼하거나 분노하되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감정에는 진정함이 결여된, 제3자의 시선을 꼬집고 있다.
예술의 첫 단추는 그래도 가족 예술가들에게 가족은 위안인 동시에 부담이고, 영혼의 반려인 동시에 족쇄인지도 모른다. 예술이란 것이 모든 걸 던지지 않으면 양보하지 않는 세계이므로. 하지만 이 가족의 이야기는 이 평범한 공식에서 조금 비껴 나 있는 것 같다. 시대와 장소를 공유하며 에너지의 삼투압을 이뤄낸 예술가 가족, 깊고 넓은 자극을 주고받은 가족. 거기에 하나 더, 돌아와 쉬게 만드는 항구 같은 가족. 다섯 명의 작가가 한 공간에서 펼치는 그림 잔치가 기대되는 건 이 때문일 것이다.
6 뒤에 보이는 작품은 하태임 작가의 초기 작품으로 남편 강영길 씨는 이 초기작을 특별히 좋아한다.
1 하태임 작가의 그리기와 지우기 작업을 가능케 하는 원색의 물감들.
2 동양화를 그리는 류민자 선생의 벼루와 먹, 연적.
3 현재 독일에서 작업 중인 아들 하태범 작가.
* 하인두 화백 20주기 기념전 <오색 동행>전은 8월 5일부터 18일까지 인사아트센터에서 열린다. 하인두 화백의 ‘혼불’ 시리즈를 비롯한 유화 작품, 크로키 그리고 부인을 묘사한 스케치와 수필도 함께 만날 수 있다. 문의 02-736-1020
- <오색동행>전 여는 고 하인두 화백 가족 예술가 가족의 그림 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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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하인두 화백은 누구보다 복 많은 예술가다. 아내, 딸, 아들, 사위가 예술에 투신해 자기만의 관념을 세워가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과 장소를 공유하며 서로에게 깊고 넓은 자극을 주고받고 있다. 하인두 화백 20주기를 맞아 각자의 개인전을 한 공간에서 여는 이 다섯 예술가를 만나러 갔다. 에너지의 삼투압을 이뤄낸 예술가 가족의 행복한 그림 이야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9년 8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