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처럼 부연 안개가 동막리 갯가에 피었습니다. 해무 海霧 덕분에 버석한 머리칼도 옷깃도 마음도 젖어듭니다. 세상에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을까, 물 빠진 개펄 위에 난 물 자국 바라보며 생각합니다.
물기 가득한 동네, 강화도에 시인 함민복이 삽니다. 1996년 강화도 낡은 집칸에 세 든 그는 ‘메리야스 한 장 크기의 창문’(<눈물은 왜 짠가> 중) 달린 방에서 시를 쓰고, ‘시단 주선 酒仙 3인’답게 찐하게 술을 마시고, 갯사람들 일손 도우며, 이장 선거 날 돼지를 잡기도 하며 삽니다. 이태 전에는 ‘한 달에 집세는 보증 없이 십만 원, 집아, 고맙다’(‘집에 대한 패설’ 중)던 동막리 집에서 이사 나와 온수리 파출소 앞 작은 방에 세 들었습니다. 누렁이 한 마리 짖지 않는 노총각의 집, 냉골 윗목에 내가 주저앉자 마흔여덟 살의 수줍은 시인은 날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합니다.
“이 방 안에서 인사성이 가장 밝은 친구는 전기 스탠드입니다. 늘 소녀처럼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있습니다. 저리 겸손하게 고개 숙이고도 밝고 환하게만 살아갈 수는 없을까.”_<눈물은 왜 짠가> 중
시만 보고는 한 떨기 실국화 같을 줄 알았는데, 차돌 같은 몸씨의 시인입니다. 맵싸하다는 느낌을 주는 눈매, 충청도 태생의 어눌한 말투가 뿜는 훈기에 마음은 금세 풀어 헤쳐집니다. 문인들 사이에서 말을 재미나게 하기로 유명하다는(단, 술을 마시면!) 그 말문을 틔우기 위해 시 이야기 대신 시답지 않은 이야기, 이 동네 재미난 간판 이야기부터 그에게 물어봅니다. “여기가 온수리잖아요. 요 앞 길상농협 근처에 ‘온수 얼음집’이 있어요. ‘온수로 만든 얼음 집’. 헤헤. 예전에 본 간판 중에 젤 그럴듯한 간판이 뭐냐 하면 ‘허송세월 비디오’. 허허, 누가 저렇게 지었나, 깨달은 놈 같네, 했어요.” 문학 이야기만 아니면 한나절 넘도록 달게 말하는 사람이라더니, 정말 그렇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있자니 어느새 마음이 번번해집니다.
이왕 간판 이야기 꺼냈으니 시인 함민복의 ‘간판’ 이야길 해볼까 합니다. 김선우 시인의 평, ‘궁핍이 다른 사람에게 위로가 되는 가난의 시 세계’처럼 그의 시는 ‘가난한 휴머니즘의 시’라는 간판으로 우리 기억에 있습니다. 이게 그의 전부가 아니고, 이 가난 타령은 진력날 때도 됐지만, 그래도 그를 알려면 그 인생을 좀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1962년생, 출생지는 충북 중원군 노은면. 그에게 동화 같은 과거는 없습니다. 다만 짠 내 나게 가난하게 살아 짠 내 나는 진실만 남았을 뿐입니다. 품을 팔거나 어우리소(소 주인과 이익을 반으로 나눠 갖는)를 기르던 아버지 이야기, 두 부자가 돈이 될 만한 나무뿌리를 구하러 산에 갔다 오면 차려져 있던 어머니의 밥상, 부자를 기다리며 데우고 또 데워 한껏 짜진 된장국이 아들 입엔 다디달아 자꾸 찍어 먹었다는 이야기도, 단지 무료라는 이유로 한국전력부설공고에 들어가 기계 앞에서 속울음을 울던 시절도, 공고를 나와 원자력발전소의 기곗밥 먹으며 산 4년 세월도, 발전소 기계 앞에서 신경쇠약과 우울증이 찾아온 시절도, 뒤늦게 서울예대 문창과에 들어가 오규원 선생에게 맵게 배우던 시절도, 1988년 여름 한 달에 1백8편의 단시를 써서 데뷔한 사연도, 밥을 위해 매형네 공장에서 기계 냄새 맡고 살면서도 한밤중 이부자리에서 시를 쓰던 시절도, 산속에서 개, 돼지 기르며 산 시절도… 모두 그의 글 안에 들어 있습니다. 진물 같은 눈물 나는 인생.
1천 권 팔리기도 힘든 나라에서 1만 권이 팔리는 시인이 됐지만 인세가 들어오면 집안의 빚 청산에 바빴던 나날도, 1996년 경로당에 딸린 방 한 칸으로 이사한 어머니를 위해 처음 소설 원고를 쓰고 받은 그의 전 재산 2백만 원(태어나서 만져보는 제일 큰 액수의 돈) 이야기도, 이사한 어머니를 뵈러 가 “이층집에서도 다 살아보시네요” 눙치며 막내아들이 애써 감추던 눈물도, ‘내 머리카락 한 올보다도 힘이 없던’ 어머니가 올해 봄 건너가신 더 좋은 세상 이야기도, ‘내가 한 번이라도 가족사진을 찍어보았다면 사진 속 사람들의 행복한 순간이 내게 번져올 수도 있으련만’ 하는 바람도, 마니산에서 따 온 두릅을 데쳐 끼니를 해결하는 노총각의 하루도… 모두 시가 됐습니다.
“하루 여섯 마리 개를 잡으면서/ 인생의 비린 맛 신맛을 알아야/ 참 사람살이를 알 수 있다는 말놀이를 떠올리면서/ 이 정도 비린내 나는 삶이라면/ 한번 살아볼 만하지 않는가 호언하면서/ (중략) / 개 쓸개 여섯 개를 지푸라기 끈으로/ 포도나무 섶에 종자 주머니처럼 매달면서// 하루 여섯 마리 개를 죽이면서/ 하루 여섯 번 나를 죽이면서.”_‘여름, 그 무덥던 어느 날’ 중
(위) 함민복 시인의 동시집 <바닷물 에고, 짜다> (비룡소) 중
그렇게 홍역 같은 삶이 시가 됐고, 그 시는 역시 고단한 일상을 살아내느라 많이 다쳤을 우리 마음을 위로했습니다. 애끈한 존재들을 감싸 안는 착한 시들. 두 번째 시집 <자본주의의 약속>에서 그의 시는 ‘이빨이 센’ 시, 제일 앞서 간 시였지만(자본주의에 대한 야유를 담고 있다) 그조차도 시의 화자가 너무 착해 딱하기만 했지요. 하지만 또 그게 말랑말랑한 힘이 되어 누군가의 가슴을 치댔던 시. 차창룡 시인의 제대로 된 비평을 싣습니다. “그는 망가지지 않았다. 누구보다 더 건강하다. 가난한 삶을 살았던 시인들은 결국 자신의 부정 정신을 시 속에 털어놓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렇지만 그의 시는 자조를 거뜬히 넘어선, 따뜻한 마음으로 솟아나는 시, 아직 사랑의 힘을 굳건히 믿고 있는 시다. 가난한 시를 읽지만 그 시를 읽으며 마음이 끝내 나락으로 빠져들지 않음은 그러한 힘 때문일 것이다.”
“나 혼자만 있을 때는 가난한 게 최고로 편해요. 가난하다는 건 뭔가 부족하다는 건데 난 뭘 원하는 것도 없으니까 가난한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한데 어머니 아프게 되고, 돈은 없고. 출판사에서 책 몇 권 내기로 약조한 다음 돈을 받아서 어머니를 시립병원에 모셨는데, 그때 그런 생각 들었어요. 돈 없는 사람들은, 대학교 못 나온 사람들은 대학병원을 못 가는구나…. 근데 나 혼자 살 때는 그냥 술, 담뱃값 대고 방세 내고 그 정도. 그것만 있어도 내 자유가 얻어지니까. 뭐, 또 가난은 가능성이니까. 안 가진 것은 가질 수 있다는 희망이니까. 가난하다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 가난해도 행복해질 수 있다, 이런 정도?” 참 바보 같은 긍정. 그래서 그 착한 마음을 들여다보려면 마음에도 적당히 뜸이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적어도 내게는 분주하고 힘든 삶 속에서 평화로운 삶을 열망할 때 마음에 시가 잘 떠오르는지도 모를 일”이라며 “제발 분주하라 내 삶이여!”(<눈물은 왜 짠가> 중) 외치는 시인. 이런 마음 숨겨야 하는데, 이야기를 들을수록 자꾸 함민복이라는 시인이 좋아집니다.
“詩 한 편에 삼만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덥혀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집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_‘긍정적인 밥’ 중
어떤 작가는 그의 글을 읽을 때 손을 깨끗이 씻고, 첫 줄을 읽으려면 심호흡부터 크게 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렇게 말간 시, 그러면서도 깊숙한 곳을 건드리는 시를 쓰는 그가 ‘마침내’ 동시집 <바닷물 에고, 짜다>를 냈습니다. 그가 강화도 갯가에 ‘세 들어’ 살면서 만난 볼락, 졸복, 짱뚱어, 상괭이, 새우 이야기입니다. 태양전지에 플러그 꽂은 것처럼 글로 쏟아낸 바다 동시들은 그의 시만큼 짭조름하게 맛납니다. “집게야/ 너는 집이 있어 좋겠구나// 꼭/ 그렇지도 않아요// 우린 외식도 못하고/ 외박도 못해요.”(‘집게’) “달리는 배로 뛰어오른 숭어는/ 숭어잡이 가던 어부들도/ 잡지 않고 살려 준대/ 그러면서/ 뭐라고 하는지 알아?// 어허, 교통사고 나셨군/ 다음부터 잘 보고 뛰세요// 텀벙!”(‘바다 교통사고’)
난 미리 알아챘었습니다. ‘가난 문학’의 최고봉인 <눈물은 왜 짠가>속에서도 ‘맑은 동시 작가 함민복 아저씨’의 모습이 슬몃슬몃 보였었습니다. 이웃집 버섯장 안에서 느타리버섯을 향해 혼잣말할 때부터 알아봤습니다. “너희들도 알지? 이 집에 이제 학생이 세 명이야. 신담비, 신초롱, 신소라. 열심히 커~어. …열심히 크라고 했는데 너대답이 없는 것으로 보아, 잘 새겨들은 것으로 알고 나 간~다. 나는 하얀 맨살 부끄럽다고 갓으로 얼굴 가린 버섯들을 등 뒤로 하고 버섯장을 나선다” 할 때부터. “급한 일이 많은지 빨리 움직이는 피라미”(<눈물은 왜 짠가> 중) 할 때부터.
(위) 10년 넘게 동네 청년들을 쫓아다니며 바다를 드나든 그는 바닷속 생물의 습성, 생태까지 제법 꿰뚫게 됐다. 그 삶에서 체득한 경험을 바탕으로 쓴 동시가 바로 <바닷물 에고, 짜다>(비룡소)다. 볼로냐 국제도서전에서 라가치 상을 수상한 염혜원 작가의 그림과 그의 말간 동시가 함께 실려 있는 이 책은 어른들도 꼭 보라고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오규원 선생님이 ‘동심은 질로 치면 최고의 단계다. 시의 가장 깊은 부분은 동심에 가 있을 거다. 다만 유치한 것과 동심을 혼동하지 마라’ 가르치셨어요. 저도 살아보니 동심은 인간이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시심의 출발점이더라고요. 그래서 동시 쓰고 싶었어요.”
그는 동시집 끝에 “어린이들. 미안합니다. 이 시를 읽은 여러분보다 난 시를 못 써요. 어른이 되었거든요. …여러분이 말하는 것을 보면 거의 다 시예요. …어린이 여러분, 내 시를 읽어줘서 고맙습니다. 누군가의 시를 읽어주는 여러분 맘이 바로 아름다운 시입니다”라고 썼습니다. 이 글을 읽는데,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기로 약속한 소년 같은 그 표정이 떠오릅니다. 천지에, 자기 신화를 드러내지 못해 안달인 사람들의 세상에서 이런 사람을 잠시라도 만났다는 것, 행운입니다.
“동시 쓰는 선생님들은 사람 자체가 진짜 어린이예요. 빵하고 우유 먹고. 시 쓰는 이들하고는 달라요. 대학생 때 ‘방정환 기념 대학생 동요・동시 백일장’에 나가느라 방정환 선생님 묘지엘 찾아가는데 도저히 못 찾겠는 거예요. 한참 두리번거리는데 같이 간 친구가 그래. “야, 저기 제사상에 술 대신 오렌지 주스하고 그런 것만 놓였잖아. 저기 맞는 거 같아.” 아드님인가가 와서 준비를 하는데 정말 맞더라고요. 그렇게 동시 쓰는 분들은 동심에 진짜 가까이 붙어 사시는데, 그렇게 안 살면서도 동시 쓰는 거, 그런 부분은 그분들에게 굉장히 죄송한 부분이고요.” 이 말을 할 때 그는 너무 솔직한 사람 특유의 황황한 표정입니다. 일곱 살 때도, 스무 살 때도 꼭 이 표정일 것 같은 무구함입니다.
“돌게끼리 만나/ 길을 비키라고/ 다투다가/ 가위 바위 보로/ 결정하기로 합니다// 가위, 바위,/ 가위./ 가위, 바위,/ 가위./ 가위, 바위,/ 가위.// 자꾸 가위만 내/ 승부가 나지 않는데도/ 서로 이겼다고/ 양손으로 V자를 만들어 치켜듭니다// 옆으로 가기 때문에 부딪히지 않는다고/ 항상 보만 내는 불가사리 기죽어 중얼거립니다.”_‘돌게’
‘누군가의 시를 읽어주는 마음이 바로 아름다운 시’라는 시인. 어린이 마음이 되어 동막리 해수욕장에 놀러 나온 아이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허명의 덫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아, 더 아이 같고 더 어른 같은 시인. 그런데 우리는 그를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가난한 시인’이라는 불도장을 그의 가슴팍에 찍어버리고 그가 어떤 다른 시를 써도 ‘가난의 휴머니즘’으로 읽어버렸습니다(세 번째 시집 <말랑말랑한 힘>에선 ‘가난한 이야기, 사적인 이야기’를 죄다 빼고 바다 중심으로 채웠는데도). “정병근 시인이 만날 이야기합니다. ‘넌 과장된 부분이 있어. 강화도에 살기 때문에, 가난하기 때문에….’ 전 맞다고 그랬어요. 내가 다른 이야길 써도 가난한 이야기가 아니면 기삿거리가 안 되는 사람이니까요. 사실 내가 과장됐다는 건 그만큼 나를 잃었다는 것, 그리고 내가 고정되어 보였다는 소리 같고. 내가 이 정도밖에 못 써서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나 보다 싶고. 아, 그러면 내가 앞으로 더 잘 써야 하는 과제가 생기는 거구나, 그러니까 더 좋고. 허허.”
작년 촛불 집회가 한창이던 6월 29일, 시청 앞에서 비폭력을 외치던 그는 고립되어 있는 전투 경찰을 구출하다가 다른 전경들에게 포위돼 시위대의 먹잇감이 됐습니다. 이 소식을 전한 한겨레신문 최재봉 기자는 ‘비폭력을 외친 시인을 짓밟다니’란 기사 말미에 시위 삼아 함민복 시인의 시 한 편을 붙였습니다. “꽃에게로 다가가면/ 부드러움에/ 찔려// 삐거나 부은 마음/ 금세// 환해지고/ 선해지니// 봄엔/ 아무/ 꽃침이라도 맞고 볼 일.”(‘봄꽃’) 한때 필명이 ‘함성’이었던 시인 함민복은 앞으로 상식이 통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이 꽃침 같은 글, 조금이나마 각성하게 하는 글을 쓰겠다고 합니다(그는 한국의 시인들이 대거 참여한 노무현 대통령의 추모 시집 <고마워요 미안해요 일어나요>에 ‘당신은 지지 않았다’란 시를 쓰기도 했다). 자신의 울타리뿐 아니라 사회 전체를 생각하면서 살아가게 하는 글, 그리고 강화도의 역사에 대한 글을 써볼 생각이라고 합니다. ‘함성’ 함 시인 파이팅!
마지막 이야길 하려 합니다. 그의 책 <눈물은 왜 짠가>를 읽다가 목에서 컥 소리가 나며 울음이 튀어나온 이야기입니다. ‘아버지 사형제의 자식들 이십사 형제’ 중에 처음으로 그가 대학생(“전문대학이지만”이라고 그는 썼다)이 되었을 때 농가 부채에 시달리는 사촌 형이 서울 올라와 쥐여준 만 원의 용돈. 그리고 몇 년 후 배달꾼이 밥 덮어 온 신문지에 그의 첫 시집 인터뷰가 나온 걸 보고 그 김칫국물 묻은 신문지를 비닐에 싸 진품 서화라도 다루듯 내내 간직했던 까막눈 사촌 형. 이 이야기 끝에 그가 쓴 글입니다. “가족과 피붙이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서로에게 향긋한 냄새를 풍겨주는 것만이 아닌, 시큼한 냄새가 나는 김칫국물 자국을 서로에게 남겨주는 존재가 아닌가. 나는 형의 가슴에, 형은 내 가슴에 엎질러진 김칫국물이 아닌가. …그래 시큼한 김칫국물이 모여들어 딴 세상으로 떠난 김칫국물들을 그리워하는.”
짜디짠 김칫국물처럼 자꾸 물켜게 만들지만, 그래서 자꾸 그리워지는 게 가족인가 봅니다. 아, 바닷물도 짜고, 눈물도 짜고, 가난도 짜고. 짠 세상. 짜서 더 맛난 세상. 짜서 더 그리운 가족. 언젠가 그에게도 ‘짠맛 가득한 가족’이란 게 생겼으면, 그래서 가족사진 한 방 박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위) 강화도 온수리의 작은 집에서 전지에 플러그 꽂은 것처럼 바다 이야기를 써내려간 함민복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