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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년 만에 다시문을 연 명동예술극장의 외관
명동이란 이름은 조선 초 지명인 한성부 남부 명례방 明禮坊에서 유래되었다. 조선 시대 명동은 주택가였으나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집단 거주하면서 백화점, 극장, 금융기관 등이 들어섰다. 1930년대 시인 이상이 우리말로 보리를 뜻하는‘무기’라는 다방을 명동에 열면서 예술인이 모여들었다. 이른바‘다방 문화’의 시작이었는데 당시 다방은 문학 강연과 독립투사 추모회, 요리 강습회까지도 수용한 일종의 의식 있는‘문화센터’개념이었다고. 이후 광복과 한국전쟁의 질곡을 겪으면서 명동은 여전히 대한민국 문화1번지로 남았다. 특히 한국전쟁 직후부터 1960년대까지는 명동 거리를 휘적휘적 다니거나 다방에 앉아 있는 당대 문인과 예술인을 자주 만날 수 있었다. 시인 박인환은 명동의 노래로 회자되는 ‘세월이 가면’과 ‘목마와 숙녀’를 남겼고, 수필가 전혜린은 독일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돌체다방을 드나들었다.‘명동 백작’이라 불리던 소설가 이봉구는 배우 최불암의 모친이 운영하던 선술집‘은성’에 매일같이 들러 구석에서 조용히 술을 마셨기 때문에 ‘은성의 풍경화’로 불리기도 했다. 이러한 문화의 중심에는 1957년 자리 잡은 명동국립극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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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명동국립극장
역사와 함께 핀 문화의 꽃, 명동예술극장 2009년 6월 5일, 옛 국립극장 자리에 명동예술극장이 다시 문을 열었다. 백발이 성성한 원로 배우들이 한자리에 모여 감격을 금치 못했다. 이곳, 명동예술극장의 역사는 7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강점기인 1934년 10월, 일본 다마다 건축사무소에서 일본인을 위한 영화 전용관으로 바로크 양식의 ‘명치좌’를 건립했다. 대지 5백5평, 건평 7백49평, 객석 8백20석의 3층 건물로 당시로는 상당한 규모였다. 명치좌는 해방 이후 서울시의 시 공관으로 각종 공연과 정치 집회 장소로 쓰였다. 한국 오페라의 대모 김자경이 주연한 베르디 오페라 <춘희>(1948)의 초연이 열린 곳도, 이해랑이 연출하고 최무룡이 주연을 맡은 셰익스피어의 <햄릿>(1949)을 국내 최초로 공연한 곳도 이곳이었다. 1957년 ‘중앙국립극장’이란 이름을 걸고 나라를 대표하는 명실상부한 공연장임을 알리자, 각지에서 예술인들이 모여들었고 자연히 국립극장 인근의 다방과 주점은 이들의 사랑방이요, 토론장이 되었다. ‘동방쌀롱’에 가면 이해랑 선생을 비롯한 연극계 인사들을, ‘천동다방’에서는 공초 오상순 선생을 비롯한 많은 시인을 만날 수 있었다. ‘오비스캐빈’ ‘쉘브르’ 같은 술집에서는 포크 가수들의 노랫가락이 시원한 맥주의 안줏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1973년 국립극장이 이전한 후 중심지를 잃고 절망한 예술인들은 명동을 떠나갔고, 명동국립극장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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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예술극장
1 명동예술극장 5층 옥상에 만든 야외 공연장.
2 외관은 고풍스러운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지만 내부는 현대적 공연 시설의 무대를 마련했다.
3 과거 3층 건물을 4층으로 만들어 층마다 창문의 모양이 다르다. 창을 통해 보이는 명동 거리가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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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장이 장충동으로 이전한 후 명동이 시들해지더군요. 명동을 다시 살리기 위해 극장을 복원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은행 건물 위에 극장만 새로 크게 지으면 되지 않느냐고 했지만 그건 아닙니다. 뿌리가 있어야지요. 옛 문화의 뿌리가 그대로 존재해야 가치가 있는 거지, 무조건 새로 크게만 짓는다고 과거의 영광이 돌아오지는 않아요.”(김장환 명동관광특구협의회 명예회장은 1982년 회장직 취임 이후 20여 년에 걸쳐 헌신적으로 명동예술극장 복원에 공헌했다.)
4 극장1층 로비에서 옛 국립극장 시절의 공연 포스터를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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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로 창고극장 & 갤러리
1 삼일로 창고극장 위층에 있는 갤러리 내부. 뒤 쪽에 보이는 벽에 극장을 거쳐간 수많은 작품과 배우들의 사진이 걸려 있다.
2 갤러리 곳곳에는 나쇼날 야외전축, 색이 바랜 아코디언 등 정대경 대표가 틈틈히 수집한 빈티지 아이템이 놓여있다.
3 객석 의자는 2007년에 연극배우 박정자 씨가 마련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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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삼일로 창고극장 & 갤러리의 외관.
“사실 명동예술극장이 복원되었다고 해서 명동이 다시 문화의 중심지가 된다고 확신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사적 소유가 공적 소유가 되면서 문화재로서 즐기고 향유할 수 있다는 점에 서는 감사하죠. 또 이것을 필두로 명동을 비롯한 이른바 북촌에 남아 있는 건물, 문화적 흔적들이 더 이상 사라지지 않았으면 해요. 명동성당과 지금 명동예술극장인 명치좌, 서울시의회와 차이나타운의 흔적, 그리고 리모델링으로 많이 훼손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외관이 보존되어 있는 미스코시 백화점(현재 신세계백화점) 등은 서울시가 20세기에 온갖 굴곡의 역사를 겪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들이죠.”(이영미 문화평론가 &<광화문연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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