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해주세요.
본문 바로가기
세계 건축의 4대 거장,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20세기 오가닉 건축의 역사를 쓰다
미국이 낳은 최고의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1867~1959). 지금 뉴욕 구겐하임 뮤지엄에서는 개관 50주년을 기념해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특별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창조적인 아웃사이더’로 한 편의 드라마와 같은 삶을 살다 간 세계적 건축가의 아흔한 해의 생을 기록한 것이다.


(왼쪽)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에 있는 낙수장. 계곡 위에 지은 여름 별장으로 자연과 동화되는 유기적 건축에 대한 라이트의 철학이 잘 드러나 있다. ⓒ Scott Frances/Esto
(오른쪽) 검은 중절모에 긴 타이, 검은 재킷을 즐겨 입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뉴욕 구겐하임 뮤지엄을 설계했다.


한 남자에게 재판관이 묻는다. “당신이 누군지 밝히시오.” 그러자 답한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건축가올시다.” 재판관이 어찌 그런 대답을 할 수 있느냐고 묻자 반짝이는 눈빛으로 그가 답한다.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소이다.” 한번은 그 남자가 설계한 빌딩의 입주자가 물이 새어 책상 위로 떨어진다는 불평을 하자 그 남자는 이렇게 답했다. “그렇다면 책상을 옮기시오.” 그 남자가 바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이다.
건축가나 인테리어 디자이너에게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신화적 존재다. 세상은 그를 르코르뷔지에, 미스 반데어로에, 발터 그로피우스와 함께 ‘세계 건축의 4대 거장’이라 부른다. 20세기 미국에 혁신적 주택을 만들어 인기를 얻었으며, 뉴욕에 구겐하임 뮤지엄이란 기념비적인 건축을 남겼다.
그는 1932년 자서전 를 발간하면서 출생 연도와 학력, 성장 배경, 일과 관련해 지어낸 이야기들을 교묘하게 섞어놓았다(그가 사망한 지 30여 년이 지나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문서 보관소’가 문을 열고, 학자들이 그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자서전의 허와 실이 밝혀졌다). 그런데도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건축사에 남긴 업적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스스로의 신화를 더욱 극적으로 만들기 위해 가면을 쓴 셈이었다. 그의 사생활이 순조로울 리 없었다. 세 번의 결혼과 두 번의 이혼, 생계를 꾸려가기에도 벅찬 상황에서 사치품을 수집한 그였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파란만장한 일생은 1993년 퓰리처상 수상 시인 폴 멀둔 Paul Muldoon이 대본을 쓴 오페라 <빛나는 이마>가 되었고, 2000년에는 한 편의 연극으로 공연되었다.
2000년 미국건축가협회에서는 ‘20세기 10대 건축물’을 선정했는데 그중 4개가 라이트의 건축물이었다. 낙수장, 뉴욕 구겐하임 뮤지엄, 로비하우스, 존슨 왁스 빌딩이 그것이다. 올해로 뉴욕 구겐하임 뮤지엄이 설립 50주년을 맞이했다. 1943년에 설계하기 시작한 이 건축물에서 라이트는 수년 동안 자신을 사로잡았던 ‘조각과 같은 건축’을 구현해보았다. 이 건축물은 1959년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91세의 나이로 서거한 지 6개월 뒤에 온전한 모습을 드러냈다.


탈리에신 주택. 프레리 주택 양식의 대표적인 예로 한쪽은 라이트의 집으로 한쪽은 스튜디오로 사용했다.


유니티 교회. 당시만 해도 실험적인 건축 자재였던 철근 콘크리트로 지은 교회이다. 라이트 특유의 기하학 형태와 패턴이 곳곳에 드러나 있다.

프뢰벨 블록으로 터득한 조형 원리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건축은 기하학적이다. 컴퍼스・직선자・삼각자를 도구로 원, 사각형, 삼각형, 육각형 등의 패턴을 표현했다. 어린 시절 프뢰벨(독일의 교육가로 세계 최초로 유치원을 세워 유아교육에 앞장섰다)의 나무 블록으로 3차원 구성체를 만들며 조형 감각을 키운 덕이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을 임신한 순간부터 방 안에 영국 대성당의 사진을 걸어놓았다. 아들에 대한 애정이 지나쳤던 어머니는 라이트의 일탈과 잘못을 눈감아주고 죽을 때까지 그를 곁에 두고 함께 살기를 바랐다. 반면 용모가 뛰어난 음악가이자 웅변가이며 설교자이기도 했던 아버지는 가정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어린 라이트에게 바흐와 베토벤의 음악을 열심히 들려주었을 뿐이었다. 라이트는 그런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 잘생긴 외모에 독서와 그림 그리기, 음악 감상, 물건 만들기에 소질이 있으며 잡동사니 수집가이기도 했다. 세상에서 자신의 흥미를 끄는 것이 있으면 닥치는 대로 읽고 모으고 탐닉했다. 지식을 중요하게 여기는 집안에서 태어났기에 낯선 것에 대한 흡수도 빨랐다.
대학에 다니던 그는 학업을 중도에 포기하고 현장에서 직접 배우겠다는 각오로 기회의 땅 시카고로 떠났다. 1871년 발생한 대화재로 도시의 70%가 불에 타버린 시카고에서는 재건 공사가 한창이었다. 1886년 무렵의 시카고는 건축을 실험하기 위한 세계적 중심지였다.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폼 잡기를 좋아한 라이트에게 시카고는 도전과 기회의 땅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몇몇 건축사무소를 전전하다 루이스 설리번 Louis Sullivan의 건축사무소에 들어가 본격적인 건축 실무를 배웠다.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 ‘아름다움은 기능이나 형태에 내재된 것이다’ 같이 기능주의를 주창한 루이스 설리번. 라이트는 그의 사상에 ‘자연’이란 요소를 결합해 자신만의 건축 철학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유기적 건축 organic architecture’이다. 자연과 하나 되는 건축이 진정한 건축임을 강조한 것. 이는 프랑스 모던 건축의 선구자 르코르뷔지에의 ‘집은 살기 위한 기계’라는 이론과 대립했다.


위스콘신 주의 제이콥스 하우스. 라이트의 유기적 건축 이론을 대표하는 프레리 주택 양식을 이어받은 유소니언 주택.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이 제이콥스 하우스이다.

‘멋쟁이’ ‘바람둥이’ ‘천재’ 건축가의 오류 세기의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범한 첫 번째 오류는 바로 자신의 자서전을 통해 스스로의 어두운 기억을 교묘하게 바꾸어놓았다는 것. 두 번째 오류는 무책임한 가장이었다는 것이다. ‘아빠’라는 소리를 싫어한 그는 자신이 가정적인 남자인 모습을 상상해본 적조차 없었다. 쪼들리는 생활 속에서도 빚을 내어 스스로를 가꾸고, 미술품을 수집하고, 고급 자동차를 몰며 자신의 허영심을 채우는 데 아낌없이 썼다. 패션에도 관심이 많았던 라이트는 항상 스카프, 중절모, 지팡이 등으로 포인트를 주었다. 그리고 건축 설계를 할 때와 마찬가지로 절대로 유행에 휩쓸리는 법 없이 자신만의 독특한 패션 스타일을 연출했다. 세 번째 오류는 사회적 통념이나 일반인이 생각하는 도덕성과 다른 ‘위험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1909년 마흔둘(그가 자서전에 기록한 나이로는 ‘마흔을 넘기지 않은 시점’)의 라이트는 생활고 속에 가족을 버려두고, 한때 클라이언트였던 사람의 아내와 함께 유럽으로 도주했다. 그는 이런 부정을 정당화하며 “결혼은 인간의 굴레가 아니다. 사람이 개인적 자유와 결혼 생활의 노예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경우 전자를 선택해야 한다. 간통은 세상과 맞서는 진실이다”라며, 사회의 위선적 태도가 진정한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언변은 거침이 없었다. 도전을 받을 때면 위험을 감수하고 쇼맨십을 발휘했다. 경제적 고비 앞에서는 능구렁이 같은 화법으로 대처해 위기를 모면하곤 했다. 프레젠테이션을 할 때면 화려한 미사여구로 길게 서정적인 묘사를 하고, 근사한 약속들을 늘어놓아 자신의 진짜 의도를 숨겼다. 건축가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던 시절 그는 숱한 사건과 사고를 몰고 다녔다.
그런데도 세상이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를 최고의 건축가, 건축의 아버지로 인정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오늘날 미국 대도시(특히 뉴욕, 시카고, 보스턴)의 스카이라인을 만드는 데 기초를 닦은 루이스 설리번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를 ‘손안에 든 좋은 연필’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라이트는 설리번에게는 열정적인 학생이었으며, 빠른 속도로 기술을 익혀 설리번의 특징적인 장식을 자신의 언어로 변형하기까지 했다. 설리번은 라이트에게 주택 설계를 일임했고 1890년부터 1892년까지 여섯 채의 주택을 지었다. 1930년대에 이르러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미국 주택 역사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기존의 미국 주택 양식을 전면 거부하고 파괴했다. 대신 휴먼 스케일에 입각해 각각의 공간이 물 흐르듯 이어지는 집을 지었다. 이것이 그가 말한 유기적 건축이었다.


뉴욕 구겐하임 뮤지엄이 오픈하던 날의 사진. 1959년 4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세상을 떠나고 6개월 후에 문을 열었다. 세계 박물관 건축의 기념비적 디자인으로 기록되는 작품이다.


(왼쪽) 뉴욕 구겐하임 뮤지엄 내부 모습. 전시장은 건물의 벽면을 따라 나선형으로 설계했다.
라이트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내려오면서 작품을 감상하도록 설계했지만, 실제로는 반대로 지었다.
(오른쪽) 세 차례의 대대적인 보수 공사가 있었던 탈리에신 주택. 그는 1952년 마지막 공사를 하며 여기에 극장을 만들었다.


20세기 오가닉 건축의 탄생 1911년 위스콘신 주 스프링그린에 지은 ‘탈리에신 Taliesin 주택’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건축은 자연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유기적 건축론이 반영된 주택이다. 자연이란 유기체가 전체와 부분의 균형을 이루듯 땅과 환경 그리고 건축물이 조화를 이루는 것, 그래서 마치 일체화된 것처럼 보이는 것이 유기적(오가닉) 건축이다. 탈리에신 주택에서 그와 제자들은 자연의 풍요를 누리며 주말이면 목초지에서 소풍을 즐겼다. 자신의 유년 시절을 회상하며 노동의 피로에서 해방되는 시간을 가졌다. 자연에서 나고 자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폐쇄된 공간을 싫어했다.
그의 유기적 건축의 출발점은 1900년대 초반에 지은 프레리 주택이었다. 프레리 주택에는 수입이 적은 사람을 위한 기본적이고 표준화된 주택, 좀 더 좋은 재료로 좀 더 특별하게 지은 주택, 고가의 맞춤형 모델로 완전히 수공으로 내부 장식을 한 주택의 세 가지 유형이 있었다.
프레리 주택은 1930년대의 유소니언 주택으로 이어진다. 대표적인 예로 ‘제이콥스 Jacobs 하우스’가 있다. 단일 가족을 위한 주택으로 복제 가능한 설계에 건축비가 적당해 어떤 장소와 상황에도 맞춰서 지을 수 있다. 유소니언 주택은 미국 사회와 가정생활에서 일어난 변화를 수용해 중산층에서도 교육을 잘 받은 전문직 고객에게 인기를 얻었다. 유소니언 주택의 백미는 1935년부터 1939년까지 건축한 에드거 카우프만의 여름 별장 ‘낙수장(Fallingwater House)’이다. 펜실베이니아에 있는 이 집은 자연과 최대한 가까이 살아야 한다는 거주자의 철학을 담아 계곡 위에 캔틸레버 cantilever 구조로 지었다.
그는 1949년과 1950년 두 해 동안 6백 건이 넘는 건축 설계를 의뢰받았다. 그의 생애 마지막 프로젝트는 1957년에 설계한 캘리포니아 주 산라파엘의 마린 주 청사였다.시대와 타협하지 않은 그의 독특한 건축은 이렇게 세계 건축의 역사 속에 남았다. 한 건축평론가는 그가 시대에 맞지 않는 매력적인 인물이었다고 평한다. 21세기가 되어서야 논란이 되고 있는 건축의 화두를 20세기 모더니즘의 초기부터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이 비평가는 불완전했을지라도 온전히 자신의 의지대로만 살아온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를 ‘건축계의 돈키호테’라 부른다.


탈리에신 웨스트. 애리조나에 지은 집으로 서쪽에 있는 탈리에신 주택이란 의미에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라이트는 1939년부터 매년 겨울을 이곳에서 보냈다.

김명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9년 7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