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산 장불재 가는 길에 만난 산딸나무 꽃을 그리고 “무등산 산딸나무 꽃, 흐드러지게 피었습니다. 꽃이 아니랍니다. ㅎㅎㅎㅎ. 속았지만 기분은 좋습디다. 난중에 열매 묵으러 또 한번 갈랍니다. 열매가 딸기랍니다”라고 쓴다든지, 채송화 화분 그려놓고 “피어야 할 것들 결국 피고야 만다”라고 쓰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국민장이 있던 날엔 노란 종이비행기 하나 그리고 “고마운 사람… 사랑합니다. 슬퍼도… 행복합니다”라고 쓴다.
그리고 <행복> 7월호 표지 작품인 ‘풍란’. 그의 작업실 옥상에서 키우는 풍란을 포토샵으로 삭삭 그려놓고 “며칠째 저러구만 있습니다. 비 겁나 온다는디. 초록을 즐기는 것도 큰 병” 이렇게 눙친다. 그렇게 이웃집 사무실 문틈에 끼워진 그림 편지는 하루를 시작하는 누군가에게 말랑말랑한 힘으로 무릎 펴고 일어날 기운을 북돋는다. <행복> 독자들에게도 그 문안 편지가 도착했다.
원래 그는 수많은 붓질을 캔버스 위에 켜켜이 쌓아 추상 화면을 만드는 작가였다. 캔버스 위에 사각형도 동그라미도 그려보고 그렇게 쳐다보다가 다시 또 지우고, 나무토막, 컵라면 밑둥까지 붙이고 다시 물감을 덧바르고… 그러면서 이 선과 면, 사물 사이에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주는 작업을 했다. 그런 그가 작년 여름, 광주 대인시장 한복판의 제수용품 상점 자리에 작업실을 얻어 들어오면서 그림이 달라졌다. “시장에 와서 보니, 내가 예전에 그렸던 그림은 덜 그려진 그림 같았어요. 복잡하고 번잡한 게 바로 인생의 맛 아닌가 생각하게 됐고, 그림이 점점 친절해졌어요.” 번잡한 세상과 소통하기 시작한 그의 캔버스 위에는 벙긋이 웃는 염소 한 마리가 그려지고 ‘찔레꽃 웃다’란 글씨가 올려졌다. 갈치 한 마리가 나무 판 위에 먹으로 그려졌다. 이제 기쁨도 슬픔도 아픔도, 일상의 사소한 부딪힘이나 삐걱거림마저도 곰삭혀내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졌다.
“그런데 작가가 왜 포토샵 그림까지 그리냐고요? 포토샵 작업이어서 가볍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에요. 붓 대신 마우스를 들었다 뿐이지, 내겐 똑같은 회화 작업이니까, ‘순수 포토샵 작업’이라고 할까.” 그렇게 마우스는 그에게 자유로운 그림 세상 하나를 선물했다. 그리고 그 ‘순수 포토샵 작품’은 보는 이의 찬 배를 어루만져주는 밥 보시기처럼 그렇게 뜨끈하게 다가오는 그림이 됐다.
갈치는 진화한다 시장 골목에 작업실 ‘화실 아래 넝쿨덩쿨’을 차리고 난 후 그는 갈치, 고등어, 전어, 병어, 참돔 같은 생선을 눈에 들이기 시작했다. 그 싱싱한 물고기들을 나무판에도 그리고 한지에도 그리고, 못 쓰게 된 컴퓨터 부품, 깨진 알전구 머리, 녹슨 찜기, 철망을 붙여 조각품으로 만들어낸다. 간간이 고물상 임 사장이 작업실 앞에 놓고 가는 나무 기둥, 문틀, 철못 따위 물건들의 쓸모를 찾아주고, 출생지가 전부 다른 그 물건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그는 솜씨 좋은 중매쟁이 같다. 인연 없는 물건들끼리 새로운 인연을 맺어주는. 그렇게 태어난 물고기들을 보고 시장 이웃들은 “와따 맛나겄다” 품평을 늘어놓으며, 작업실 간판을 ‘어물전’이라고 고쳐서 달라고 농을 건넨다. 그가 가장 신나게 만드는 건 물고기 중에서도 갈치다. “그 길쭉한 놈이 주는 파격의 비례미가 참 좋아요. A4 사이즈의 재미없는 가로세로 비례에 길들여져 있었는데, 갈치란 놈이 내 과제를 하나 풀어준 것 같아요.”
그가 이 작업실에 둥지를 튼 지 일주일 만에 ‘대인예술시장 프로젝트(빈 상가가 늘어나는 구도심의 대인시장에 작업실을 만들어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예술 프로젝트)’가 시작됐고, 지금은 24개의 빈 점포에 45명의 작가가 깃들어 있다. 처음엔 호기심 반 경계심 반으로 “내가 미술을 알가니” 했던 상인들도 시장통에 작가들이 늘어나면서 “언제 쩌짝 바람벽에 그림 쪼까 그려주면 좋겄는디. 비어 있응게 아심찮혀서” 하는 이들로 변했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삶에 고급, 저급이 있을 수 없듯 예술에도 고급, 저급은 없다. 그 경계를 허무는 생활 속 예술이 진짜 예술’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더 이상 짜낼 게 없는 치약처럼 자신을 소진하며 그려야 하는 게 작가의 숙명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속박을 벗어난 그림, 속박을 벗어나고서도 산만하지 않게, 그렇게 살고 그리는 법을 시장 골목에서 배우는 중이다. “눈치 보지 않고, 폐 끼치지 않고, 재미있게 살고 싶은 사람”일 뿐이고, “속없고, 쓸데없는 짓 많이 하고, 미련한 짓 많이 하고”가 삶의 모토라는 이 남도 사내에게서 갑자기 갯내가 훅 끼친다. 지나가던 옆집 상인이 작업실 문을 드르륵 열며 “많이 늘었다, 갈치! 잔치 한번 해야제?” 수말스러운 인사를 건넨다. 
1 신양호, ‘갈치 090605’, 2009
2 신양호, ‘Untitled 0846-1582790’, 2009
3 신양호, ‘채송화 09060102’, 2009
화가 신양호 씨는 광주에서 태어나 조선대학교 미술교육과를 졸업했다. 회화, 조각, 포토샵 작업 등 장르 구분 없는 ‘종합 작가’로, 대인예술시장에 터를 잡고 구체적인 삶이 오롯이 그려지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진지하게 예술 하는 이가 있다면 어디든 예술의 메카라는 신념으로 광주에 뿌리내린 ‘지역’ ‘전업’ 작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