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내조의 여왕>을 봤는데 꼭 우리 집 이야기 같더라고요. 제게도 그런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네요.” 지난 주 부부 집단 상담에 참가한 한 남편의 말이다. 옆에 있던 그의 아내는 입을 삐죽이며 “지금껏 자기 맘대로 살아왔으면서 내조의 여왕을 기대해?”라고 받아쳤다.과연 대한민국 남자들은 내조의 여왕을 필요로 할까? 또 내조의 여왕이 되려고 팔 걷어붙인 아내를 바라보면서 남자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내조 內助와 내조 耐助 둘 다 필요해 남자들이 결혼할 때 거는 기대는 아내가 언제라도 먹을 것, 입을 것, 잠자리, 섹스 정도는 기본으로 제공하고, 그 외에 옵션 사항으로 나를 성공시키는 내조의 여왕, 동시에 나를 즐겁게 해주는 레저의 여왕이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런 심리 이면에는 ‘의존 성향’이라는 것이 있다. 무능한 남자일수록 의존 성향이 강하고, ‘과거는 용서해도 무능한 건 용서 못해’를 운운하며 내조와 레저를 모두 기대한다.
<내조의 여왕>의 주인공 온달수는 전형적인 의존 성향의 남편. 늦둥이 막내로 사랑만 받고 자랐기에 의지박약, 우유부단, 포부와 비전 상실의 남자가 됐다. 거기에 모성성만 비대해져 착해빠진 남자가 온달수다. 그런 면에서 남자들이 아내로부터 바라는 내조는 ‘모성성’과 ‘부성성’의 조화로운 제공이다. ‘부성성’이 결핍된 남자는 어렸을 때부터 남자로서의 정체성, 추진력, 어려움에 맞장뜨는 용기, 배포 같은 것을 키우지 못했기에,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힘과 용기가 턱없이 부족하다. 그래서 누군가 내가 인생길을 열어갈 수 있도록 먼발치에서 기다려주고 참아주는 내조 耐助를 해줬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의존 성향의 남편들은 십중팔구 그 대상이 아내이기를 바란다.
이기적인 내조는 싫다! 드라마는 온달수와 천지애를 각각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로 대입했다. 그러나 평강공주와 천지애의 내조는 처음부터 초점이 달랐다. 평강공주는 온달에게 초점을 두었지만 천지애는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었다. 공주의 품위를 지켰던 평강공주와 남편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아부와 비굴로 무장하는 것도 불사한 천지애가 대조된다. 스스로 신분을 낮추고 평민이 되는 것을 선택할 수 있었던 평강공주와 자신의 서민 생활을 인정하지 못하는 천지애가 대조된다. 결국 천지애의 내조는 남편을 통해 자신의 욕구를 채우려는 이기적인 목적일 뿐이었고 그것은 곧 남자의 자존심을 깔아뭉개고 출발한 내조였다. 그것은 마스코트형의 사람(어린 공주)인 천지애가 ‘히스테리성 성격장애’, 즉 늘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하는 심리적 욕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내 아내가 자기를 위해 내조의 여왕을 자처하고 나선다면 “그냥 이대로가 좋으니 제발 참아달라. 남편은 아내의 필요충분조건이 아니니까”라고 말할 것이다.
아내의 내조는 자조 自助에서부터 건강한 정신세계를 가진 대한민국 남편들이 바라는 진정한 내조는 아내가 스스로 자기 인생을 꾸려가는 ‘자조 自助’다. 부부는 둘이 만나 하나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 된 둘이 만나는 것이다. 따라서 서로 ‘의지(leaning)’하는 관계이지 ‘의존(dependence)’하는 관계는 아니다. 불행한 부부는 대부분 상호 의존(동반 의존, co-dependence) 관계에 있다. 아내의 ‘자조’가 이뤄져 건강한 자존심이 바탕이 될 때, 그때서야 비로소 남편을 내조할 수 있게 된다. 평강공주가 온달을 내조할 수 있었던 이유도 그런 건강한 자존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가 온달에게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온달이 자기에게 영향을 받도록 했던 것이다.
진정한 내조, ‘새로운 이야기’를 쓰게 하는 일 심리적 상처를 입은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에 대해 부정적인 믿음을 갖고 있다. 이야기 치료(narrative therapy)에서는 이걸 ‘지배적 이야기(dominant story)’라 하고, 그것을 재해석해 새 의미를 부여하면 치료가 일어난다고 한다. 그것을 ‘대안적 이야기(alternative story)’, 즉 ‘새로운 이야기’라고 한다.
착하기만 했던 바보 온달. 그러나 평강공주는 ‘바보’라는 ‘지배적 이야기’를 ‘장군’이라는 ‘대안적 이야기’로 바꾸었다. 즉 온달로 하여금 자기가 바보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어머니의 품을 떠나지 못하는 유약한 남자였음을 스스로 깨닫게 하고 한 남자로서 포부와 삶의 방향성을 갖도록 했다. 천지애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는, 글쎄다.
내조의 여왕은 절대적 엄마의 가슴과 아버지의 가슴을 동시에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두 가지를 다 할 수 있어야 비로소 내조의 여왕이며 윈루즈 win-lose가 아닌 윈윈 win-win의 행복을 누릴 테니까. 
내조 內助와 내조 耐助 둘 다 필요해 남자들이 결혼할 때 거는 기대는 아내가 언제라도 먹을 것, 입을 것, 잠자리, 섹스 정도는 기본으로 제공하고, 그 외에 옵션 사항으로 나를 성공시키는 내조의 여왕, 동시에 나를 즐겁게 해주는 레저의 여왕이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런 심리 이면에는 ‘의존 성향’이라는 것이 있다. 무능한 남자일수록 의존 성향이 강하고, ‘과거는 용서해도 무능한 건 용서 못해’를 운운하며 내조와 레저를 모두 기대한다.
<내조의 여왕>의 주인공 온달수는 전형적인 의존 성향의 남편. 늦둥이 막내로 사랑만 받고 자랐기에 의지박약, 우유부단, 포부와 비전 상실의 남자가 됐다. 거기에 모성성만 비대해져 착해빠진 남자가 온달수다. 그런 면에서 남자들이 아내로부터 바라는 내조는 ‘모성성’과 ‘부성성’의 조화로운 제공이다. ‘부성성’이 결핍된 남자는 어렸을 때부터 남자로서의 정체성, 추진력, 어려움에 맞장뜨는 용기, 배포 같은 것을 키우지 못했기에,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힘과 용기가 턱없이 부족하다. 그래서 누군가 내가 인생길을 열어갈 수 있도록 먼발치에서 기다려주고 참아주는 내조 耐助를 해줬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의존 성향의 남편들은 십중팔구 그 대상이 아내이기를 바란다.
이기적인 내조는 싫다! 드라마는 온달수와 천지애를 각각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로 대입했다. 그러나 평강공주와 천지애의 내조는 처음부터 초점이 달랐다. 평강공주는 온달에게 초점을 두었지만 천지애는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었다. 공주의 품위를 지켰던 평강공주와 남편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아부와 비굴로 무장하는 것도 불사한 천지애가 대조된다. 스스로 신분을 낮추고 평민이 되는 것을 선택할 수 있었던 평강공주와 자신의 서민 생활을 인정하지 못하는 천지애가 대조된다. 결국 천지애의 내조는 남편을 통해 자신의 욕구를 채우려는 이기적인 목적일 뿐이었고 그것은 곧 남자의 자존심을 깔아뭉개고 출발한 내조였다. 그것은 마스코트형의 사람(어린 공주)인 천지애가 ‘히스테리성 성격장애’, 즉 늘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하는 심리적 욕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내 아내가 자기를 위해 내조의 여왕을 자처하고 나선다면 “그냥 이대로가 좋으니 제발 참아달라. 남편은 아내의 필요충분조건이 아니니까”라고 말할 것이다.
아내의 내조는 자조 自助에서부터 건강한 정신세계를 가진 대한민국 남편들이 바라는 진정한 내조는 아내가 스스로 자기 인생을 꾸려가는 ‘자조 自助’다. 부부는 둘이 만나 하나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 된 둘이 만나는 것이다. 따라서 서로 ‘의지(leaning)’하는 관계이지 ‘의존(dependence)’하는 관계는 아니다. 불행한 부부는 대부분 상호 의존(동반 의존, co-dependence) 관계에 있다. 아내의 ‘자조’가 이뤄져 건강한 자존심이 바탕이 될 때, 그때서야 비로소 남편을 내조할 수 있게 된다. 평강공주가 온달을 내조할 수 있었던 이유도 그런 건강한 자존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가 온달에게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온달이 자기에게 영향을 받도록 했던 것이다.
진정한 내조, ‘새로운 이야기’를 쓰게 하는 일 심리적 상처를 입은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에 대해 부정적인 믿음을 갖고 있다. 이야기 치료(narrative therapy)에서는 이걸 ‘지배적 이야기(dominant story)’라 하고, 그것을 재해석해 새 의미를 부여하면 치료가 일어난다고 한다. 그것을 ‘대안적 이야기(alternative story)’, 즉 ‘새로운 이야기’라고 한다.
착하기만 했던 바보 온달. 그러나 평강공주는 ‘바보’라는 ‘지배적 이야기’를 ‘장군’이라는 ‘대안적 이야기’로 바꾸었다. 즉 온달로 하여금 자기가 바보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어머니의 품을 떠나지 못하는 유약한 남자였음을 스스로 깨닫게 하고 한 남자로서 포부와 삶의 방향성을 갖도록 했다. 천지애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는, 글쎄다.
내조의 여왕은 절대적 엄마의 가슴과 아버지의 가슴을 동시에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두 가지를 다 할 수 있어야 비로소 내조의 여왕이며 윈루즈 win-lose가 아닌 윈윈 win-win의 행복을 누릴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