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인문학’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어려운 시대일수록 인문학이 해야 할 일은 늘어납니다. 인문학은 삶의 근본을 짚어보게 하고 시대의 물음에 답하는 학문이기 때문입니다. 먼 옛날에는 천문학만 있었습니다. 인간보다 신이 훨씬 중요했기 때문이지요. 인간이 스스로 존귀한 존재임을 깨닫고 자신을 되돌아보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인문학이 탄생했습니다. 천문학이 하늘과 그곳에 사는 신을 탐구하는 것이라면, 인문학은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사람 자체를 대상으로 합니다.
수많은 고전들이 사람다움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이 시대까지 남아 향기를 전해주는 고전들은 모두 인문학 서적들입니다. 사람다움에 대한 고전적 해석・이해의 역사를 짚어본다면 ‘이 시대에 사람다운 삶을 지탱하는 도시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에 대한 답이 나올 수도 있겠지요. 물론 학문에만 고전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음악에도, 미술에도, 건축에도 모두 고전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이 도시 서울에 어떤 고전이 남아 있을까요?
도시는 사람이 모여 살며 문명을 만들어온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공간입니다. 이 흔적들은 옛사람들의 세계관과 인간관을 반영하기 마련이고요. 그 자취들을 통해 현재 이 도시가 당면한 문제의 해법을 찾아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몇 년 전부터 등장한 뉴타운이나 새로 지을 제2롯데월드 등을 사람다운 삶과 어떻게 관계 지을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렇게 도시가 변화된 뒤에 또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이런 문제들에 대해 고민거리와 해답을 찾는 길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것이 이 시대 인문학의 쓸모가 아닐까요.
그렇다면 사람다움이란 무엇인가
고대인들이 생각한 ‘인간’은 모호한 존재였습니다. 인간은 ‘신과 동물’의 중간쯤에 있는 존재였고, 그래서 동물로 퇴화(또는 타락)하지 않기 위해 신에게 매달려야 했습니다. 고대와 중세 사람들은 인간의 동물적 본능을 거부하는 것이 참된 삶이라고 믿었지요. 신의 뜻은 언제나 인간 내면의 목소리보다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학’은 점차 이런 태도를 바꾸어놓았습니다. 신의 대리인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의 권위가 아니라 인간의 ‘본능과 본질’이 더 중요해졌습니다. 18세기 중반 루소는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설파했고, 19세기 말에 니체는 심지어 ‘신은 죽었다’고까지 선언했습니다.
신이 차지했던 ‘학문적 관심’의 자리를 ‘인간’이 새로 차지하게 됐습니다. 신과 혈연으로 맺어진 인간이 아니라 ‘독립된’ 인간이 떠올랐지요.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윈은 ‘인간은 동물’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이 지적 혁명의 기간은 산업혁명의 시기와 대략 일치합니다. 19세기 말부터 진화론은 전 세계를 휩쓸었습니다. 동물이 인간이 되는 것만이 진화가 아니었습니다. 스펜서는 진화론을 사회 변화를 설명하는 데 활용했지요(사회진화론). 이제 개인도, 민족도, 인종도 모두 진화의 주체가 되었습니다. 진화를 이끄는 원리는 아주 단순했습니다. 경쟁! 생존경쟁, 우승열패, 적자생존, 약육강식 등의 근대판 사자성어가 세상의 변화를 설명하는 명료한 공식이었습니다. 이 세계관에 따르면 승자는 옳기 때문에, 뛰어나기 때문에 승리하는 법입니다. 만약 신이 있다면, 그조차 승자의 편이리라. 진화론이 지배하는 세상은 곧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점철되는 ‘정글’이었습니다.
같은 무렵 ‘반동에 대한 반동’도 나타났습니다. 사회주의(공산주의)는 한 측면에서는 진화론을 거부하고 인간다움을 새롭게 정의하려는 시도였습니다. 그러나 땅 위에 완전히 새로운 건 없습니다. 마르크스와 그 추종자들은 자신들이 완전히 새로운 ‘과학적 사회주의’를 창안했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이 그린 미래 세계는 기독교의 천국과 닮았고, ‘혁명가들’에게 요구한 덕목 역시 중세 수도사들이 걸었던 길을 따르라는 것이었지요. 이브의 사과는 계급의 발생이었고, 사탄은 부르주아였으며, 교회는 당이었고, 사제는 혁명가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만들고 유지했던 국가는 저절로 ‘신성국가’의 모습을 띠었습니다.
과학혁명 이후에도 이렇듯 ‘인간다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19세기 이후 ‘새로운 인간’이 하나 더 생겨났습니다. 신도 동물도 아닌 존재, 즉 기계 인간입니다.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수많은 기계들이 발명되어 인간 곁에 자리 잡았습니다. 에너지원만 지속적으로 공급된다면 쉬지 않고 움직이는 자동 기계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인간이 동물 역시 기계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람 자신이 기계와 같을 뿐 아니라, 개개인이 부품이 되어 사회를 구성한다는 생각도 널리 퍼졌습니다. 이제 동물도 신도 기계처럼 움직이는 존재로 여겨지게 됐습니다. 개인이 살기 위해 팔다리를 자르는 일을 감수할 수 있다면, 사회의 생존을 위해 개개인을 희생시키는 일도 가능했습니다. 전체주의는 이런 생각을 자양분으로 삼아 무척 빠른 속도로 덩치를 키웠습니다.
20세기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그사이에 발생한 대공황은 세계를 정글로 보는 태도의 결과였고 승리가 지고지선이던 시대의 파국이었습니다. 홀로코스트는 ‘인간다움’의 밑바닥이 어디인지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때까지 인간이 만들어온 모든 ‘인간관’이 이 전쟁과 학살을 정당화하는 데 동원되었지요. 사람들은 때로는 신의 섭리에 따른다고 하면서, 때로는 자연적 질서에 따른다고 하면서, 때로는 유기체 국가(사회)의 생존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학살했고 그를 용인했습니다. 다시 인류 전체가 ‘반성거리’를 얻게 됩니다. 그러나 아직 해답은 없습니다. 다시 오래되었지만 여전한 질문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지요. 인간은 신인가요, 동물인가요, 기계인가요?
서울, 신의 울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이라도 인류의 역사가 ‘신이 있다는 믿음’과 함께 시작되었다는 사실까지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미 구석기시대 지구 상에 인간이 처음 출현한 시대 부터 인간은 동굴 벽에 그들의 ‘신앙’을 표현했습니다. 신이 하늘에 있다는 보편적 믿음이 자리 잡은 청동기시대에 인간은 비로소 도시를 만들었습니다.
고대와 중세의 도시는 ‘성벽으로 둘러싼 공간’이었지요. 성벽은 방어벽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먼저 ‘특별히 선택된 공간’임을 표시하는 구분선이었습니다. 구석기시대 사람들에게 동굴이었던 곳이 청동기시대 사람들에게는 ‘성 안’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구석기시대 사람들이 동굴 벽에 그림을 그려 넣은 것처럼, 청동기시대 이후의 사람들은 ‘성 안’에 당대의 문명을 쌓아두고 표시해왔습니다. 인류의 문명은 도시를 통해서만 발전했고, 농촌은 그저 문명의 바람이 스치는 곳일 뿐이었습니다.
그리스의 도시 아테네에는 아테네 여신을 모신 파르테논 신전이 있습니다. 이 신전이 있는 언덕의 이름은 ‘아크로폴리스’입니다. ‘높다’는 뜻의 ‘Akros’와 ‘도시’라는 뜻의 ‘Polis’를 합친 단어입니다. 메소포타미아의 ‘비빌론’은 ‘신의 문’이라는 뜻이며, 아라비아인들이 예루살렘을 부르는 이름인 ‘쿠드스’도 ‘신성한 도시’라는 뜻입니다. 우리말에서 수도를 뜻하는 보통명사이자, 현재의 수도를 부르는 고유명사인 ‘서울’ 역시 같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솟’ 솟대의 솟이며 솟다의 솟 과 ‘울’ 울타리, 곧 성벽. 울타리 안에 들어온 사람들이 ‘우리’ 이 합쳐진 말입니다. 우리 선조들은 먼 옛날 지구 반대편 사람들과 똑같은 생각으로 도시를 만들었고, 그곳에 ‘신의 울’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일연은 <삼국유사>에 환웅이 도읍한 곳을 ‘신시 神市’라고 썼습니다. 여기에서 ‘신시’란 서울의 한자 표기일 뿐이지요.
우리는 역사상 여러 서울을 만들고 버려왔습니다. 고조선의 서울, 고구려의 서울, 고려의 서울 등. 지금의 서울은 유교 국가의 ‘신시’로 만들어진 도시입니다. 그러나 이제 이 도시에서 전문가가 아니고서는 유교 경전의 원리를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지난 6백여 년 사이에 전 세계 모든 인류가 경험한 인간관과 세계관의 변화가 이 도시의 면모도 완전히 바꾸어놓은 결과입니다. 이미 진행된 변화를 되돌리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렇다고 앞으로의 변화의 방향에 대한 고민마저 포기해야 할까요? 오늘날 이 도시가 담고 가야 할 ‘신성’ 동시에 ‘인간성, 인간다움’ 은 무엇일까요? ‘인간다움’을 탐구하는 일은 인문학자들에게만 맡겨둘 것이 아닙니다.
사람답게 살다가 거기에서 죽고 싶은 도시가 있는가?
사람다움이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도 없는데, 사람다운 삶을 지탱하는 도시에 대해 생각하기는 참 어렵습니다. 역시 정답은 없을 듯합니다. 다만 사람들이 먼저 생각하는 주체로 바로 서야, 도시의 미래를 그릴 수 있지 않을까요. 내 삶의 공간에 대한 나의 태도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러한 태도가 이 사회에 받아들여질 여지가 있는가. 집이란 무엇인가. 돈을 벌어다 주는 수단인가, 혹은 나와 내 가족의 행복으로 가득한 공간이어야 하는가.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서울에서 살고는 싶지만, 서울에서 죽기는 싫다’고들 말하곤 합니다. 현재의 서울은 서울 사람들에게조차 ‘한탕 하고 튈’ 타인의 공간일 뿐입니다. 나중에 얼마나 망가지든 나와는 관계없다는 식의 생각이 팽배해 있습니다. 지나치게 속된 표현이기는 하지만, 수용하지 않을 수 없는 지독한 현실입니다. 물론 사람들은 꿈에서 더 큰 위안을 얻곤 합니다. 그러니 아름답지 못한 꿈이라고 비난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현실을 부정하고 무시한 대가는 언제나 컸습니다. 서울 사람들 대다수가 서울에서 살다 서울에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자식들에게 물려줄 삶의 공간도 바로 이 도시일 수밖에 없고요. 서울을 평생 동안 살아갈 공간으로 여긴다면, 이 도시를 대하는 태도도 달라지지 않을까요?
최근 1백 년 사이에 우리나라 사람이 공간을 대하는 태도는 엄청나게 달라졌습니다. 집에 대한 생각을 예로 들어보죠. 1백여 년 전 사람들이 부르던 ‘달타령’이라는 노래 가사에는 “초가삼간 집을 지어 양친 부모 모셔다가 천 년 만 년 살고 지고”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누구와 함께, 얼마나가 중요했을 뿐, 집의 규모와 격식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30년 전쯤에 나온 남진의 ‘임과 함께’에서는 집이 ‘그림 같은 집’으로 격상된 반면, 부모는 사라지고 사랑하는 임만 남았지요. 1980년대 윤수일의 ‘아파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예 집을 ‘사랑하는 사람조차 머물지 못하고 떠나가는 곳’으로 묘사했습니다. 사람마다 가치를 두는 곳이 다르니 옳다 그르다를 따질 일은 아닙니다만, 각각의 결말이 어떠할지에 대해서는 예상해보아야 합니다. 인문학은 이런 문제들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합니다. 물론 정답은 없습니다만 여러 가능한 답을 제시할 수는 있을 겁니다.
도시 공간을 인문학적으로 탐구하는 일은,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공간과의 관계를 성찰하는 일입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지만 나는 그 반대로 생각합니다. 많이 보면 볼수록 알게 됩니다. 골목골목을 다녀보면 무엇이 왜 중요한지, 지금처럼 문화재 복원과 파괴가 상품 가치라는 단일 척도로 결정되는 게 정말 옳은지 생각해보게 될 겁니다. 청진동 골목길을 예로 들어볼까요. 재개발로 인해 사라질 그 골목길에는 당장의 상업적 가치는 떨어질지 몰라도 그 골목에 추억을 담았던 사람들의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다른 가치가 많습니다. 그 골목에는 이 시대 사람들의 가슴속에 살아 있는 역사가 있습니다. 기억은 그렇게 공유되지만, 부동산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생기는 거죠. 아주 단순하게 질문을 던져보죠. ‘내 추억은, 또는 나 자신은 얼마짜리일까요?’ 이 도시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기억의 요소’들이 어느 정도의 가치를 가질까요? 이런 질문에 대답하려고 할 때만, 도시 공간의 역사적・공동체적 정체성이 비로소 살아날 수 있을 겁니다.
* 위 그림은 <서울은 깊다>(전우용 지음, 돌베개)의 표지 이미지를 구성한 것입니다.
수많은 고전들이 사람다움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이 시대까지 남아 향기를 전해주는 고전들은 모두 인문학 서적들입니다. 사람다움에 대한 고전적 해석・이해의 역사를 짚어본다면 ‘이 시대에 사람다운 삶을 지탱하는 도시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에 대한 답이 나올 수도 있겠지요. 물론 학문에만 고전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음악에도, 미술에도, 건축에도 모두 고전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이 도시 서울에 어떤 고전이 남아 있을까요?
도시는 사람이 모여 살며 문명을 만들어온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공간입니다. 이 흔적들은 옛사람들의 세계관과 인간관을 반영하기 마련이고요. 그 자취들을 통해 현재 이 도시가 당면한 문제의 해법을 찾아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몇 년 전부터 등장한 뉴타운이나 새로 지을 제2롯데월드 등을 사람다운 삶과 어떻게 관계 지을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렇게 도시가 변화된 뒤에 또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이런 문제들에 대해 고민거리와 해답을 찾는 길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것이 이 시대 인문학의 쓸모가 아닐까요.
그렇다면 사람다움이란 무엇인가
고대인들이 생각한 ‘인간’은 모호한 존재였습니다. 인간은 ‘신과 동물’의 중간쯤에 있는 존재였고, 그래서 동물로 퇴화(또는 타락)하지 않기 위해 신에게 매달려야 했습니다. 고대와 중세 사람들은 인간의 동물적 본능을 거부하는 것이 참된 삶이라고 믿었지요. 신의 뜻은 언제나 인간 내면의 목소리보다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학’은 점차 이런 태도를 바꾸어놓았습니다. 신의 대리인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의 권위가 아니라 인간의 ‘본능과 본질’이 더 중요해졌습니다. 18세기 중반 루소는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설파했고, 19세기 말에 니체는 심지어 ‘신은 죽었다’고까지 선언했습니다.
신이 차지했던 ‘학문적 관심’의 자리를 ‘인간’이 새로 차지하게 됐습니다. 신과 혈연으로 맺어진 인간이 아니라 ‘독립된’ 인간이 떠올랐지요.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윈은 ‘인간은 동물’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이 지적 혁명의 기간은 산업혁명의 시기와 대략 일치합니다. 19세기 말부터 진화론은 전 세계를 휩쓸었습니다. 동물이 인간이 되는 것만이 진화가 아니었습니다. 스펜서는 진화론을 사회 변화를 설명하는 데 활용했지요(사회진화론). 이제 개인도, 민족도, 인종도 모두 진화의 주체가 되었습니다. 진화를 이끄는 원리는 아주 단순했습니다. 경쟁! 생존경쟁, 우승열패, 적자생존, 약육강식 등의 근대판 사자성어가 세상의 변화를 설명하는 명료한 공식이었습니다. 이 세계관에 따르면 승자는 옳기 때문에, 뛰어나기 때문에 승리하는 법입니다. 만약 신이 있다면, 그조차 승자의 편이리라. 진화론이 지배하는 세상은 곧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점철되는 ‘정글’이었습니다.
같은 무렵 ‘반동에 대한 반동’도 나타났습니다. 사회주의(공산주의)는 한 측면에서는 진화론을 거부하고 인간다움을 새롭게 정의하려는 시도였습니다. 그러나 땅 위에 완전히 새로운 건 없습니다. 마르크스와 그 추종자들은 자신들이 완전히 새로운 ‘과학적 사회주의’를 창안했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이 그린 미래 세계는 기독교의 천국과 닮았고, ‘혁명가들’에게 요구한 덕목 역시 중세 수도사들이 걸었던 길을 따르라는 것이었지요. 이브의 사과는 계급의 발생이었고, 사탄은 부르주아였으며, 교회는 당이었고, 사제는 혁명가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만들고 유지했던 국가는 저절로 ‘신성국가’의 모습을 띠었습니다.
과학혁명 이후에도 이렇듯 ‘인간다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19세기 이후 ‘새로운 인간’이 하나 더 생겨났습니다. 신도 동물도 아닌 존재, 즉 기계 인간입니다.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수많은 기계들이 발명되어 인간 곁에 자리 잡았습니다. 에너지원만 지속적으로 공급된다면 쉬지 않고 움직이는 자동 기계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인간이 동물 역시 기계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람 자신이 기계와 같을 뿐 아니라, 개개인이 부품이 되어 사회를 구성한다는 생각도 널리 퍼졌습니다. 이제 동물도 신도 기계처럼 움직이는 존재로 여겨지게 됐습니다. 개인이 살기 위해 팔다리를 자르는 일을 감수할 수 있다면, 사회의 생존을 위해 개개인을 희생시키는 일도 가능했습니다. 전체주의는 이런 생각을 자양분으로 삼아 무척 빠른 속도로 덩치를 키웠습니다.
20세기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그사이에 발생한 대공황은 세계를 정글로 보는 태도의 결과였고 승리가 지고지선이던 시대의 파국이었습니다. 홀로코스트는 ‘인간다움’의 밑바닥이 어디인지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때까지 인간이 만들어온 모든 ‘인간관’이 이 전쟁과 학살을 정당화하는 데 동원되었지요. 사람들은 때로는 신의 섭리에 따른다고 하면서, 때로는 자연적 질서에 따른다고 하면서, 때로는 유기체 국가(사회)의 생존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학살했고 그를 용인했습니다. 다시 인류 전체가 ‘반성거리’를 얻게 됩니다. 그러나 아직 해답은 없습니다. 다시 오래되었지만 여전한 질문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지요. 인간은 신인가요, 동물인가요, 기계인가요?
서울, 신의 울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이라도 인류의 역사가 ‘신이 있다는 믿음’과 함께 시작되었다는 사실까지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미 구석기시대 지구 상에 인간이 처음 출현한 시대 부터 인간은 동굴 벽에 그들의 ‘신앙’을 표현했습니다. 신이 하늘에 있다는 보편적 믿음이 자리 잡은 청동기시대에 인간은 비로소 도시를 만들었습니다.
고대와 중세의 도시는 ‘성벽으로 둘러싼 공간’이었지요. 성벽은 방어벽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먼저 ‘특별히 선택된 공간’임을 표시하는 구분선이었습니다. 구석기시대 사람들에게 동굴이었던 곳이 청동기시대 사람들에게는 ‘성 안’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구석기시대 사람들이 동굴 벽에 그림을 그려 넣은 것처럼, 청동기시대 이후의 사람들은 ‘성 안’에 당대의 문명을 쌓아두고 표시해왔습니다. 인류의 문명은 도시를 통해서만 발전했고, 농촌은 그저 문명의 바람이 스치는 곳일 뿐이었습니다.
그리스의 도시 아테네에는 아테네 여신을 모신 파르테논 신전이 있습니다. 이 신전이 있는 언덕의 이름은 ‘아크로폴리스’입니다. ‘높다’는 뜻의 ‘Akros’와 ‘도시’라는 뜻의 ‘Polis’를 합친 단어입니다. 메소포타미아의 ‘비빌론’은 ‘신의 문’이라는 뜻이며, 아라비아인들이 예루살렘을 부르는 이름인 ‘쿠드스’도 ‘신성한 도시’라는 뜻입니다. 우리말에서 수도를 뜻하는 보통명사이자, 현재의 수도를 부르는 고유명사인 ‘서울’ 역시 같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솟’ 솟대의 솟이며 솟다의 솟 과 ‘울’ 울타리, 곧 성벽. 울타리 안에 들어온 사람들이 ‘우리’ 이 합쳐진 말입니다. 우리 선조들은 먼 옛날 지구 반대편 사람들과 똑같은 생각으로 도시를 만들었고, 그곳에 ‘신의 울’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일연은 <삼국유사>에 환웅이 도읍한 곳을 ‘신시 神市’라고 썼습니다. 여기에서 ‘신시’란 서울의 한자 표기일 뿐이지요.
우리는 역사상 여러 서울을 만들고 버려왔습니다. 고조선의 서울, 고구려의 서울, 고려의 서울 등. 지금의 서울은 유교 국가의 ‘신시’로 만들어진 도시입니다. 그러나 이제 이 도시에서 전문가가 아니고서는 유교 경전의 원리를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지난 6백여 년 사이에 전 세계 모든 인류가 경험한 인간관과 세계관의 변화가 이 도시의 면모도 완전히 바꾸어놓은 결과입니다. 이미 진행된 변화를 되돌리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렇다고 앞으로의 변화의 방향에 대한 고민마저 포기해야 할까요? 오늘날 이 도시가 담고 가야 할 ‘신성’ 동시에 ‘인간성, 인간다움’ 은 무엇일까요? ‘인간다움’을 탐구하는 일은 인문학자들에게만 맡겨둘 것이 아닙니다.
사람답게 살다가 거기에서 죽고 싶은 도시가 있는가?
사람다움이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도 없는데, 사람다운 삶을 지탱하는 도시에 대해 생각하기는 참 어렵습니다. 역시 정답은 없을 듯합니다. 다만 사람들이 먼저 생각하는 주체로 바로 서야, 도시의 미래를 그릴 수 있지 않을까요. 내 삶의 공간에 대한 나의 태도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러한 태도가 이 사회에 받아들여질 여지가 있는가. 집이란 무엇인가. 돈을 벌어다 주는 수단인가, 혹은 나와 내 가족의 행복으로 가득한 공간이어야 하는가.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서울에서 살고는 싶지만, 서울에서 죽기는 싫다’고들 말하곤 합니다. 현재의 서울은 서울 사람들에게조차 ‘한탕 하고 튈’ 타인의 공간일 뿐입니다. 나중에 얼마나 망가지든 나와는 관계없다는 식의 생각이 팽배해 있습니다. 지나치게 속된 표현이기는 하지만, 수용하지 않을 수 없는 지독한 현실입니다. 물론 사람들은 꿈에서 더 큰 위안을 얻곤 합니다. 그러니 아름답지 못한 꿈이라고 비난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현실을 부정하고 무시한 대가는 언제나 컸습니다. 서울 사람들 대다수가 서울에서 살다 서울에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자식들에게 물려줄 삶의 공간도 바로 이 도시일 수밖에 없고요. 서울을 평생 동안 살아갈 공간으로 여긴다면, 이 도시를 대하는 태도도 달라지지 않을까요?
최근 1백 년 사이에 우리나라 사람이 공간을 대하는 태도는 엄청나게 달라졌습니다. 집에 대한 생각을 예로 들어보죠. 1백여 년 전 사람들이 부르던 ‘달타령’이라는 노래 가사에는 “초가삼간 집을 지어 양친 부모 모셔다가 천 년 만 년 살고 지고”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누구와 함께, 얼마나가 중요했을 뿐, 집의 규모와 격식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30년 전쯤에 나온 남진의 ‘임과 함께’에서는 집이 ‘그림 같은 집’으로 격상된 반면, 부모는 사라지고 사랑하는 임만 남았지요. 1980년대 윤수일의 ‘아파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예 집을 ‘사랑하는 사람조차 머물지 못하고 떠나가는 곳’으로 묘사했습니다. 사람마다 가치를 두는 곳이 다르니 옳다 그르다를 따질 일은 아닙니다만, 각각의 결말이 어떠할지에 대해서는 예상해보아야 합니다. 인문학은 이런 문제들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합니다. 물론 정답은 없습니다만 여러 가능한 답을 제시할 수는 있을 겁니다.
도시 공간을 인문학적으로 탐구하는 일은,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공간과의 관계를 성찰하는 일입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지만 나는 그 반대로 생각합니다. 많이 보면 볼수록 알게 됩니다. 골목골목을 다녀보면 무엇이 왜 중요한지, 지금처럼 문화재 복원과 파괴가 상품 가치라는 단일 척도로 결정되는 게 정말 옳은지 생각해보게 될 겁니다. 청진동 골목길을 예로 들어볼까요. 재개발로 인해 사라질 그 골목길에는 당장의 상업적 가치는 떨어질지 몰라도 그 골목에 추억을 담았던 사람들의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다른 가치가 많습니다. 그 골목에는 이 시대 사람들의 가슴속에 살아 있는 역사가 있습니다. 기억은 그렇게 공유되지만, 부동산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생기는 거죠. 아주 단순하게 질문을 던져보죠. ‘내 추억은, 또는 나 자신은 얼마짜리일까요?’ 이 도시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기억의 요소’들이 어느 정도의 가치를 가질까요? 이런 질문에 대답하려고 할 때만, 도시 공간의 역사적・공동체적 정체성이 비로소 살아날 수 있을 겁니다.
* 위 그림은 <서울은 깊다>(전우용 지음, 돌베개)의 표지 이미지를 구성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