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라야에서 충격적인 광경을 보다 일주일 전에 네팔에서 막 돌아왔다는 엄홍길 대장은 눈매를 투박하게 뭉개며 웃었다. 이번에는 등반가가 아닌, 의료봉사단을 이끄는 대장 역할로 다녀왔다. 초등학생부터 60대까지 산행에 서툰 봉사자가 해발 3450m 에베레스트 중턱에 있는 남체 Namche라는 마을까지 가려면 엄홍길 대장의 도움이 절실했다. 게다가 1년 중 가장 춥고 눈이 엄청나게 쌓인 2월 초에 걸어 올라가야 하니 히말라야 전문가인 그도 긴장했다. 그런데 그곳에 도착한 그는 깜짝 놀랐다.
눈은커녕 따사로운 초봄 혹은 늦가을 날씨였다. “1985년부터 20년 넘게 매년 한두 차례씩 이곳을 드나들었는데, 이런 날씨는 처음이었습니다. 봉사자들이 고생 덜하고 안전히 의료봉사를 마칠 수 있어서 고마운 일이지만, 제게는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히말라야 지역에서 가속되는 지구 온난화. 만년설이 녹고, 계곡이 불고 산사태가 나서 마을이 고립되고, 빙하호가 터져 홍수가 났다. 일부 마을은 계곡이 말라 가뭄으로 고생하고 있다. 지구를 달구는 공장과 자동차는커녕 물소의 하품 소리까지 들릴 법한 평화로운 이곳에서 말이다. 경제 성장으로 인한 여유는 선진국이 죄 누리고, 정작 문명의 혜택과 거리가 먼 오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 엄홍길 대장이 두 발로 이곳을 누비며 실감한 변화다. 수돗물을 ‘물 쓰듯’ 쓰고, 곡식이 흉작이면 통조림을 먹으면 되는 도시 사람들은 이런 현상이 마음에 와 닿지 않을 터다. 그러나 그에게는 수천 미터짜리 수직 빙벽을 오를 때처럼 섬뜩한 현상이다. 하루가 다르게 녹고 있는 히말라야. 그 때문에 세계 최초로 8000m 넘는 봉우리 16곳을 모두 등정한 신화적인 산악인 엄홍길 대장이 또 다른 산을 향하고 있다. ‘지구 환경 파수꾼’이 되기로 한 것이다. 2007년 로체샤르를 끝으로 세계의 16곳 고지에 깃발을 꽂은 그는 이제 전 인류를 위한 ‘공공의 산’에 오르기로 마음먹었다. ‘엄홍길휴먼재단’을 발족해 직접 목격한 환경 파괴와 기후 변화의 심각성을 널리 알리고자 한다. 등반 20주년 기념사진집에 실린 그의 고백에서도 의지를 읽을 수 있다. “히말라야를 38번 도전했다가 20번 성공했고 그동안 10명의 동료를 잃었다. 지금 난 살아 있다. 믿기지 않는다. 기적이다. 그 이상의 표현이 없으리라. 산이 살려 보내지 않았으면 이미 땅속에 묻혔을 것이다. 때문에 죽은 동료들의 삶을 함께 살아야 할 의무가 있다. (중략)
무사히 내려오면 ‘인간 세계에 내려가 내가 너에게 베푼 은혜를 세상에 돌려주라’는 산의 속삭임이 귓가에 생생히 들리곤 한다. 때문에 오랜 시간 준비한 봉사재단을 만들었다.”
(왼쪽) 히말라야에 38번 도전, 20번 성공한 산악인 엄홍길 대장. ‘불굴의’ ‘의지의’ 라는 수식어가 제격일 이 사내가 여린 꽃 한 송이를 들었다. ‘거대한 산을 올랐다는 것은 풀 한 포기의 고통에도 아파하는 마음을 배우는 것’이라고 말하며.
“지금 난 살아있다. 기적이다. 산에서 무사히 내려오면 죽은 동료의 삶을 함께 살아야 할 의무가 있다.
‘인간 세계에 내려가 이 기적을 세상에 돌려주라’는 속삭임이 귓가에 생생히 들리곤 한다. 때문에 오랜 시간 준비한 봉사재단을 만들었다.”
엄홍길 대장은 천생 산 사람으로 살 것이다. 산을, 자연을 사랑하는 그의 품성은 코끼리와 거북이 조각 애장품에서도, 손이 오그라드는 추위에도 산행일지를 적은 수첩에서도, 동고동락을 함께한 셰르파들과 찍은 사진에서도 느껴진다.
산에 오르면, 나는 풀이나 돌멩이쯤 된다 산이 베푼 은혜. 그 뿌리는 유년기로 거슬러 간다. 그의 가족은 도봉산 중턱에 살았다. 전기도 없이 호롱불에 의지했고, 겨울엔 칼바람이 방 안 공기를 시퍼렇게 저몄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려면 산을 30여 분 올라야 했다. 그 시절엔 산이 그렇게 미울 수 없었다. 그러나 천생 ‘산 山사람’이 되어버린 그는 스물여섯 살에 히말라야 원정대에 합류했다. 엄홍길 대장이 히말라야처럼 머나먼 높은 산만 다닌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다. 주말마다 도봉산에 오른다. “아니, 대장님도 이런 산에 오르십니까?” 하는 인사를 받을 때마다 예의 투박하고 두툼한 미소를 지으며 “여긴 산 아닌가요?” 한다. 문득 그는 ‘산을 못 끊겠다’고 말을 툭 던졌다. 첩첩산중을 넘나든 대장이니 짧은 말에 심오한 뜻이 담겼으려니…. “이제는 산에 오르면 저는 풀이나 돌멩이쯤 됩니다.” 산에 스며서 산의 일부가 된 것이다. 산에 있으면 한 그루 고목처럼 자연스러운 사람. 그러나 한 그루 덤덤한 고목이 되기까지 그의 몸에 무수한 옹이와 상처가 돋아야 했다. 영화보다 파란만장한 등정기 중 열한 번째 봉우리 안나푸르나의 여정을 보자. ‘풍요의 여신’이라 불리는 안나푸르나는 4전 5기 끝에 올랐다. 네 번째 실패했을 때는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셰르파 두 명을 구하려다 로프가 발목에 감겨 오른쪽 발목이 180도 돌아가는 중상을 입었다.
그러나 쇠핀이 박힌 다리를 질질 끌며 다시 등산을 시작해 1999년 4월 마침내 성공했다. 비로소 얻은 깨달음. “그전까지는 산이란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대상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안나푸르나는 ‘산이란 경외의 대상’임을 일깨웠습니다. 기고만장하고 오만했던 제게 ‘산이 받아주어야 오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지요.”
우리는 이 땅을 후손에게 빌려 쓰고 있다 산이 허락해 그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그 길을 걸어 정상에 도달하고 무사히 내려온 순간, 그는 이미 ‘한 몸’이 아니다. 눈사태로 설원에 묻힌 동료들, 온갖 짐을 함께 지고 오른 셰르파, 그리고 그의 안위를 기원한 가족과 지인들… 그들의 염원이 깃든 모두의 몸이다. “16번째 봉우리 정상에 오른 환희의 순간, 후배 하나가 설맹(눈에 반사된 강한 자외선으로 일시적으로 시력을 잃는 현상)에 걸렸습니다. 90도 가까운 빙판길을 혼자 내려가기도 험난한데, 그 후배와 제가 서로를 줄로 연결한 채 함께 가야 했습니다. 너무 고통스러웠지요. 죽음이 오히려 편안할 것처럼요.” 혼자였으면 주저앉았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후배와 함께했기에, 그에게는 포기할 권리도 없었다. “세상은 이렇듯 ‘우리’로 엮여 있습니다. 이 당연한 이치를 도시 사람들은 잊고 살아갑니다. 실감할 기회가 없으니까요. 환경 다큐멘터리를 볼 때도 ‘관전’할 뿐이지 제 일로 여기지 않아요.” 빙하가 녹아 사냥을 못한 북극곰이 육지로 헤엄쳐 와 풀 뜯어 먹고 산다는 다큐멘터리가 TV에서 방영되는 동안 우리는? 소파에 누워 귤을 까 먹으며 멍하니 화면을 응시하다가 한마디 한다. “쯧쯧, 불쌍하다.” 당장 등 따뜻하고 배부른 인간의 마음은 이처럼 간사하고 건조하다. 엄홍길 대장은 “서로 하나가 되지 못하고 제 앞길만 연연하는 것은 우리가 자연에서 멀어졌기 때문”이라고 일침을 놓는다. “왜 인간이 지구의 주인이라 생각합니까? 대자연으로 보자면 인간과 북극곰, 혹은 길가의 소나무도 똑같은 생명체입니다. 우리는 그물처럼 연결되어 살고 있습니다. 이걸 몸으로 느끼며 산다면 들풀 한 종류가 멸종하는 것이 한 세계가 무너지는 일임을 알 겁니다.” 다른 종이 아닌 인간만 놓고 봐도 우리는 참 무책임하다. 만년설이 녹고 있는데 후손들의 터전이 걱정스럽지 않은가? 엄홍길 대장의 말에 어느 인디언의 속담이 떠올랐다. “우리는 이 땅을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것이 아니다. 후손에게서 잠시 빌려 쓰는 것이다”라는 인디언의 혜안을. 지구를 곱게 쓰고 후손에게 되돌려줘야 하는 우리는 시공을 초월한 운명 공동체다.
(왼쪽) 히말라야를 제 집 드나들듯 하던 그는 이제 청소년을 위한 등반에도 힘을 쏟을 예정이다.
(오른쪽) 온갖 고비를 함께 넘은 그의 발. 사진에 없는 오른발은 동상으로 발가락 하나를 잘라낼만큼 고초가 심했다.
지구를 지키는 일에도 대장이 필요하다
엄홍길 대장은 작은 모임부터 큰 강연까지 마이크 잡을 기회만 있으면 현장에서 관측한 기후 변화와 우리가 나아갈 길에 관해 이야기한다. 어떤 학자의 강의보다도 그의 말은 호소력이 있다. 생사를 다퉈가며 얻은 절실한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현학적인 표현도 없는, 오로지 발로 탐험하고 눈으로 목격한 이야기만 들려준다. ‘엄홍길 대장’의 한마디가 지니는 파급력을 그도 잘 알기에, 몇 번이고 같은 이야기를 반복할 준비가 되어 있다. 강의에서 유독 강조하는 것 중 하나가 ‘청소년의 자연 체험’이다. “요즘 아이들은 상대방을 배려하기는커녕 남과 어울릴 줄도 모릅니다. 방에 앉아 클릭 한 번이면 숙제를 할 수 있고, 운동장에서 발야구를 하기보다는 혼자 컴퓨터 게임에 빠져 있으니까요. 그러니 아이들에게 자연을 보호하자고 외치면 무슨 뜻인지 알아듣기나 할까요? 진정한 녹색 철학이란 ‘인간이 자연을 지켜주겠다’가 아닌 ‘인간은 자연과 하나이니 자연을 내 몸처럼 여기겠다’는 생각이거든요. 그래서 당장 시급한 것이 자연을 온몸으로 비벼가며 노는 시간,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자연 속에서 다른 아이들과 함께 하는 공동체 생활이지요.
이왕이면 친구들과 어려움을 함께 경험하는 등산이 좋고요.” 그는 시간이 허락할 때마다 학생들을 이끌고 산에 오른다.
먼 산꼭대기에서 독야청청 수련하는 대장님 대신 산토끼, 들풀 이야기를 구수하게 들려주는 옆집 아저씨가 되기로 했다. 기후 변화를 알리는 현장 탐험가, 청소년을 자연으로 이끄는 아저씨 대장님, 그 밖에도 그가 맡은 일이 많다. 대표적인 것이 세상을 떠난 동료의 가족을 위한 장학금 지원 사업, 기후 변화로 물 부족이나 홍수 피해를 입은 네팔의 재난구호기금 모금, 히말라야 산간 오지 마을에 학교를 세우는 일 등이다. 올 4월에 착공식을 하는 네팔 오지의 학교는 해발 3940m 팡보체 마을에 짓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는 학교다. 이 학교를 세우는 건 희박한 산소량만큼이나 교육 여건이 열악한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싶어서다. 인터뷰 내내 그는 한 번도 ‘성공기’를 읊지 않았다. 성공기란 결과이고, ‘정복’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그는 산 혹은 자연에 대해 감히 정복이란 말을 입에 올릴 수 없다고 말했다. “산이 제게 정상을 잠시 빌려줬을 뿐이지요.” 정상은 밟는 순간 내려오게 되어 있다. 그가 있어야 할 곳은 정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산은 ‘다음 행보를 계속하라’고 속삭였다. 엄홍길 대장은 그다음 산을 오르고 있다. 이번엔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러나 많은 선지자들이 넘어온 산이다. 이웃이 겪는 아픔과 고통의 산. 이 산을 기꺼이 넘어, 두루 행복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히말라야가 물었다. “너는 왜 산에 오르는가?” 이 준엄한 물음에 그는 한 걸음씩 몸으로 실천하며 이렇게 대답할 작정이다. “바로 이웃이 있기 때문입니다.”
눈은커녕 따사로운 초봄 혹은 늦가을 날씨였다. “1985년부터 20년 넘게 매년 한두 차례씩 이곳을 드나들었는데, 이런 날씨는 처음이었습니다. 봉사자들이 고생 덜하고 안전히 의료봉사를 마칠 수 있어서 고마운 일이지만, 제게는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히말라야 지역에서 가속되는 지구 온난화. 만년설이 녹고, 계곡이 불고 산사태가 나서 마을이 고립되고, 빙하호가 터져 홍수가 났다. 일부 마을은 계곡이 말라 가뭄으로 고생하고 있다. 지구를 달구는 공장과 자동차는커녕 물소의 하품 소리까지 들릴 법한 평화로운 이곳에서 말이다. 경제 성장으로 인한 여유는 선진국이 죄 누리고, 정작 문명의 혜택과 거리가 먼 오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 엄홍길 대장이 두 발로 이곳을 누비며 실감한 변화다. 수돗물을 ‘물 쓰듯’ 쓰고, 곡식이 흉작이면 통조림을 먹으면 되는 도시 사람들은 이런 현상이 마음에 와 닿지 않을 터다. 그러나 그에게는 수천 미터짜리 수직 빙벽을 오를 때처럼 섬뜩한 현상이다. 하루가 다르게 녹고 있는 히말라야. 그 때문에 세계 최초로 8000m 넘는 봉우리 16곳을 모두 등정한 신화적인 산악인 엄홍길 대장이 또 다른 산을 향하고 있다. ‘지구 환경 파수꾼’이 되기로 한 것이다. 2007년 로체샤르를 끝으로 세계의 16곳 고지에 깃발을 꽂은 그는 이제 전 인류를 위한 ‘공공의 산’에 오르기로 마음먹었다. ‘엄홍길휴먼재단’을 발족해 직접 목격한 환경 파괴와 기후 변화의 심각성을 널리 알리고자 한다. 등반 20주년 기념사진집에 실린 그의 고백에서도 의지를 읽을 수 있다. “히말라야를 38번 도전했다가 20번 성공했고 그동안 10명의 동료를 잃었다. 지금 난 살아 있다. 믿기지 않는다. 기적이다. 그 이상의 표현이 없으리라. 산이 살려 보내지 않았으면 이미 땅속에 묻혔을 것이다. 때문에 죽은 동료들의 삶을 함께 살아야 할 의무가 있다. (중략)
무사히 내려오면 ‘인간 세계에 내려가 내가 너에게 베푼 은혜를 세상에 돌려주라’는 산의 속삭임이 귓가에 생생히 들리곤 한다. 때문에 오랜 시간 준비한 봉사재단을 만들었다.”
(왼쪽) 히말라야에 38번 도전, 20번 성공한 산악인 엄홍길 대장. ‘불굴의’ ‘의지의’ 라는 수식어가 제격일 이 사내가 여린 꽃 한 송이를 들었다. ‘거대한 산을 올랐다는 것은 풀 한 포기의 고통에도 아파하는 마음을 배우는 것’이라고 말하며.
“지금 난 살아있다. 기적이다. 산에서 무사히 내려오면 죽은 동료의 삶을 함께 살아야 할 의무가 있다.
‘인간 세계에 내려가 이 기적을 세상에 돌려주라’는 속삭임이 귓가에 생생히 들리곤 한다. 때문에 오랜 시간 준비한 봉사재단을 만들었다.”
엄홍길 대장은 천생 산 사람으로 살 것이다. 산을, 자연을 사랑하는 그의 품성은 코끼리와 거북이 조각 애장품에서도, 손이 오그라드는 추위에도 산행일지를 적은 수첩에서도, 동고동락을 함께한 셰르파들과 찍은 사진에서도 느껴진다.
산에 오르면, 나는 풀이나 돌멩이쯤 된다 산이 베푼 은혜. 그 뿌리는 유년기로 거슬러 간다. 그의 가족은 도봉산 중턱에 살았다. 전기도 없이 호롱불에 의지했고, 겨울엔 칼바람이 방 안 공기를 시퍼렇게 저몄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려면 산을 30여 분 올라야 했다. 그 시절엔 산이 그렇게 미울 수 없었다. 그러나 천생 ‘산 山사람’이 되어버린 그는 스물여섯 살에 히말라야 원정대에 합류했다. 엄홍길 대장이 히말라야처럼 머나먼 높은 산만 다닌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다. 주말마다 도봉산에 오른다. “아니, 대장님도 이런 산에 오르십니까?” 하는 인사를 받을 때마다 예의 투박하고 두툼한 미소를 지으며 “여긴 산 아닌가요?” 한다. 문득 그는 ‘산을 못 끊겠다’고 말을 툭 던졌다. 첩첩산중을 넘나든 대장이니 짧은 말에 심오한 뜻이 담겼으려니…. “이제는 산에 오르면 저는 풀이나 돌멩이쯤 됩니다.” 산에 스며서 산의 일부가 된 것이다. 산에 있으면 한 그루 고목처럼 자연스러운 사람. 그러나 한 그루 덤덤한 고목이 되기까지 그의 몸에 무수한 옹이와 상처가 돋아야 했다. 영화보다 파란만장한 등정기 중 열한 번째 봉우리 안나푸르나의 여정을 보자. ‘풍요의 여신’이라 불리는 안나푸르나는 4전 5기 끝에 올랐다. 네 번째 실패했을 때는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셰르파 두 명을 구하려다 로프가 발목에 감겨 오른쪽 발목이 180도 돌아가는 중상을 입었다.
그러나 쇠핀이 박힌 다리를 질질 끌며 다시 등산을 시작해 1999년 4월 마침내 성공했다. 비로소 얻은 깨달음. “그전까지는 산이란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대상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안나푸르나는 ‘산이란 경외의 대상’임을 일깨웠습니다. 기고만장하고 오만했던 제게 ‘산이 받아주어야 오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지요.”
우리는 이 땅을 후손에게 빌려 쓰고 있다 산이 허락해 그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그 길을 걸어 정상에 도달하고 무사히 내려온 순간, 그는 이미 ‘한 몸’이 아니다. 눈사태로 설원에 묻힌 동료들, 온갖 짐을 함께 지고 오른 셰르파, 그리고 그의 안위를 기원한 가족과 지인들… 그들의 염원이 깃든 모두의 몸이다. “16번째 봉우리 정상에 오른 환희의 순간, 후배 하나가 설맹(눈에 반사된 강한 자외선으로 일시적으로 시력을 잃는 현상)에 걸렸습니다. 90도 가까운 빙판길을 혼자 내려가기도 험난한데, 그 후배와 제가 서로를 줄로 연결한 채 함께 가야 했습니다. 너무 고통스러웠지요. 죽음이 오히려 편안할 것처럼요.” 혼자였으면 주저앉았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후배와 함께했기에, 그에게는 포기할 권리도 없었다. “세상은 이렇듯 ‘우리’로 엮여 있습니다. 이 당연한 이치를 도시 사람들은 잊고 살아갑니다. 실감할 기회가 없으니까요. 환경 다큐멘터리를 볼 때도 ‘관전’할 뿐이지 제 일로 여기지 않아요.” 빙하가 녹아 사냥을 못한 북극곰이 육지로 헤엄쳐 와 풀 뜯어 먹고 산다는 다큐멘터리가 TV에서 방영되는 동안 우리는? 소파에 누워 귤을 까 먹으며 멍하니 화면을 응시하다가 한마디 한다. “쯧쯧, 불쌍하다.” 당장 등 따뜻하고 배부른 인간의 마음은 이처럼 간사하고 건조하다. 엄홍길 대장은 “서로 하나가 되지 못하고 제 앞길만 연연하는 것은 우리가 자연에서 멀어졌기 때문”이라고 일침을 놓는다. “왜 인간이 지구의 주인이라 생각합니까? 대자연으로 보자면 인간과 북극곰, 혹은 길가의 소나무도 똑같은 생명체입니다. 우리는 그물처럼 연결되어 살고 있습니다. 이걸 몸으로 느끼며 산다면 들풀 한 종류가 멸종하는 것이 한 세계가 무너지는 일임을 알 겁니다.” 다른 종이 아닌 인간만 놓고 봐도 우리는 참 무책임하다. 만년설이 녹고 있는데 후손들의 터전이 걱정스럽지 않은가? 엄홍길 대장의 말에 어느 인디언의 속담이 떠올랐다. “우리는 이 땅을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것이 아니다. 후손에게서 잠시 빌려 쓰는 것이다”라는 인디언의 혜안을. 지구를 곱게 쓰고 후손에게 되돌려줘야 하는 우리는 시공을 초월한 운명 공동체다.
(왼쪽) 히말라야를 제 집 드나들듯 하던 그는 이제 청소년을 위한 등반에도 힘을 쏟을 예정이다.
(오른쪽) 온갖 고비를 함께 넘은 그의 발. 사진에 없는 오른발은 동상으로 발가락 하나를 잘라낼만큼 고초가 심했다.
지구를 지키는 일에도 대장이 필요하다
엄홍길 대장은 작은 모임부터 큰 강연까지 마이크 잡을 기회만 있으면 현장에서 관측한 기후 변화와 우리가 나아갈 길에 관해 이야기한다. 어떤 학자의 강의보다도 그의 말은 호소력이 있다. 생사를 다퉈가며 얻은 절실한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현학적인 표현도 없는, 오로지 발로 탐험하고 눈으로 목격한 이야기만 들려준다. ‘엄홍길 대장’의 한마디가 지니는 파급력을 그도 잘 알기에, 몇 번이고 같은 이야기를 반복할 준비가 되어 있다. 강의에서 유독 강조하는 것 중 하나가 ‘청소년의 자연 체험’이다. “요즘 아이들은 상대방을 배려하기는커녕 남과 어울릴 줄도 모릅니다. 방에 앉아 클릭 한 번이면 숙제를 할 수 있고, 운동장에서 발야구를 하기보다는 혼자 컴퓨터 게임에 빠져 있으니까요. 그러니 아이들에게 자연을 보호하자고 외치면 무슨 뜻인지 알아듣기나 할까요? 진정한 녹색 철학이란 ‘인간이 자연을 지켜주겠다’가 아닌 ‘인간은 자연과 하나이니 자연을 내 몸처럼 여기겠다’는 생각이거든요. 그래서 당장 시급한 것이 자연을 온몸으로 비벼가며 노는 시간,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자연 속에서 다른 아이들과 함께 하는 공동체 생활이지요.
이왕이면 친구들과 어려움을 함께 경험하는 등산이 좋고요.” 그는 시간이 허락할 때마다 학생들을 이끌고 산에 오른다.
먼 산꼭대기에서 독야청청 수련하는 대장님 대신 산토끼, 들풀 이야기를 구수하게 들려주는 옆집 아저씨가 되기로 했다. 기후 변화를 알리는 현장 탐험가, 청소년을 자연으로 이끄는 아저씨 대장님, 그 밖에도 그가 맡은 일이 많다. 대표적인 것이 세상을 떠난 동료의 가족을 위한 장학금 지원 사업, 기후 변화로 물 부족이나 홍수 피해를 입은 네팔의 재난구호기금 모금, 히말라야 산간 오지 마을에 학교를 세우는 일 등이다. 올 4월에 착공식을 하는 네팔 오지의 학교는 해발 3940m 팡보체 마을에 짓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는 학교다. 이 학교를 세우는 건 희박한 산소량만큼이나 교육 여건이 열악한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싶어서다. 인터뷰 내내 그는 한 번도 ‘성공기’를 읊지 않았다. 성공기란 결과이고, ‘정복’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그는 산 혹은 자연에 대해 감히 정복이란 말을 입에 올릴 수 없다고 말했다. “산이 제게 정상을 잠시 빌려줬을 뿐이지요.” 정상은 밟는 순간 내려오게 되어 있다. 그가 있어야 할 곳은 정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산은 ‘다음 행보를 계속하라’고 속삭였다. 엄홍길 대장은 그다음 산을 오르고 있다. 이번엔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러나 많은 선지자들이 넘어온 산이다. 이웃이 겪는 아픔과 고통의 산. 이 산을 기꺼이 넘어, 두루 행복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히말라야가 물었다. “너는 왜 산에 오르는가?” 이 준엄한 물음에 그는 한 걸음씩 몸으로 실천하며 이렇게 대답할 작정이다. “바로 이웃이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