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겨울, 시골 동네의 산그늘엔 햇살이 얼씬도 못한다. 그래서 더 어둑신한 산그늘 아래, 그의 집이 있었다. 색 바랜 벽돌로 소박하게 지은 단층 양옥. 그가 집 앞에 나와 우릴 향해 따뜻한 손바닥을 흔들고 있었다. 그 옛날, 숲을 지나면 있는 할머니 집 앞에 할머니가 마중 나온 것처럼.
소설가 오정희. 대학 신입생 시절 난 강의를 빼먹고 학교 뒷동산의 대학 창립자 무덤가에 앉아 해바라기를 하며 그의 <새>를 읽곤 했다. 눈시울이 붉어진 해가 주춤주춤 산을 넘는데, 책 속 꼬맹이 주인공도 어스름녘 쪼그리고 앉아 저물녘의 쓸쓸하고 초라한 거리를 내려다보며 세상은 이런 것이려니, 되뇌고 있었다. 몽롱한 햇살 아래서 그 소설의 음울한 기운에 덩달아 쓸쓸해지곤 했었다. 당대 작가 중에 오정희만 한 문장가를 찾기 쉽지 않다던 김동리 선생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그의 글을 무작정 원고지에 필사하기도 했었다. 그로부터 십수 년 후, 거울 속의 내가 낯설어지기 시작한 나이가 되어 그를 만나러 온 것이다.
방에 앉자마자 난 그 ‘어스름녘’ 이야기부터 물었다. “아이들이 저물녘에 그렇게 잠투정하고 울어요. 내 소설 속 많은 아이들처럼. 심리학자들이 그건 죽음에 대한 공포라던데. 저물녘은 죽음의 어둠이 ‘푸르끼리하게’ 느껴지는, 그래서 존재의 쓸쓸함을 견디기 힘든 시간인 것 같아. 어릴 적 인천 차이나타운, 거기 살 때 저물녘이 되면 노동자들이 긴 그림자 뒤로 자전거를 끌고 집에 가고… 그걸 보면 무섭다기보다 쓸쓸함 같은 게 찾아왔어요.” 소설가 김화영 선생은 ‘오정희의 소설은 늑대와 개의 시간에 만들어졌다’고 썼다.
세상의 모든 비밀을 이해할 것 같은 작업실은 그의 기척을 짐작케 하는 물건들로 범람했다. 대충 꽂힌 것 같지만 그만의 촘촘한 분류법으로 배열된 수천 권의 책, 가톨릭 성물, 유난히 많은 가족 사진 액자, 그와 12년을 함께 살아 저희가 사람인 줄 아는 애견 노마와 바우, 버스 정류장에 버려진 걸 데려다 키우는 유기견 보름이…. 그리운 냄새가 뭉클 올라오는 풍경이었다. 지난 연말, 한평생 식탁을 준비하는 노동을 성실히 한 그를 위해 남편이 선물한 이 집에서 예순두 번째 봄을 준비하고 있다. “사진이나 제대로 찍힐까 몰라. 내가 이렇게 하하 잘 웃지만, 또 유별난 대인결벽증으로 ‘한 긴장’ 해요. 누가 그러데, 30센티미터짜리 자를 갖고 다니면서 대인 거리를 가늠하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그는 스무 살 때도 이 표정이었을 것 같은 무구한 얼굴로 웃었다. 그 웃음 앞에서 낯선 객들의 마음은 실뭉치처럼 풀렸다.
1 30대 중반, 아들 정호와 함께 찍은 사진.
2 지난 연말 남편이 마련해준 작업실 딸린 새집으로 이사 왔다. 이제 이 책들 사이에 파묻혀 마냥 책만 읽는 게 그의 가장 큰 소망이란다.
작가 오정희. 1947년생 개띠. 서울 사직동에서 4남 4녀의 다섯째로 태어난 ‘울보’, 외지로 장삿길을 다니는 어머니 대신 할머니의 매운 손맛 속에서 자란 아이, 가방 속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사상계> <현대문학>을 넣어 다니던 국민학생, 경기도 내 백일장에서 특선한 딸내미가 문학 하겠다고 나설 것이 싫어 청을 넣어 정구부에 들여보낸 아버지, 버스 범퍼에 받혀 죽은 막냇동생, 그리고 동생의 주검을 안고 응급실로 뛰던 중학교 2학년생, 자살의 유혹이 들불처럼 번지던 사춘기 시절 마지막 등교라고 작정한 날 국어 선생님의 “어찌 그리 글을 잘 쓸까”라는 혼잣말에 유서 대신 교지에 낼 글을 쓴 여고생, 서라벌예대 문창과에 들어가 한 달쯤 방에 처박혀 써낸 <완구점 여인>으로 당선된 신춘 문예, 등단을 하고도 잡지사・출판사로 직장을 전전하면서 발표한 소설들, 춘천 태생의 직장 동료와 결혼하고 시작한 춘천 생활, 안개의 도시에서 산 30년 동안 써 내려간 <중국인 거리> <저녁의 게임> <유년의 뜰> <동경> <파로호>… 그리고 연이어 축포처럼 터진 이상문학상(1979)・동인문학상(1982)・오영수문학상(1996)・동서문학상(1996)・독일 리베라투르상(장편소설 <새>로 2003년 이 상을 받으면서 해외에서 한국인이 문학상을 받은 최초의 사례가 됐다). 올해로 등단 41년이 된 작가의 일대기다. 이 모든 시간의 흔적은 그의 소설 속에, 산문집 속에 조심스레 숨겨 있다.
소설가 신경숙 씨가 자전 소설 <외딴 방>에서 오정희에게 많은 걸 빚지고 있다고 했다거나, 소설가 공지영 씨가 고등학생 시절 그를 만나기 위해 무작정 춘천행 버스를 탔다고 고백한 이야기처럼, 그는 대한민국 작가들의 모범적인 교과서, 얼굴 없는 선생이다. “에이, 그 사람들이 어쩌다 한 번 글에 썼는데 그게 몇십 년 동안 꼬리표마냥 붙으니 내가 미안하죠. 내 글은 구멍투성이로 허술하기 짝이 없고, 그렇게 강렬한 영향력도 없는데. 유명한 후배들 덕에. 하하. 여성 작가이기 때문에 감수성의 색깔이 비슷한 거, 그런 거 아닐까요? 그러니까 수혈이 쉽다는 정도의 의미 같은데.” 이 큰 작가는 늘 자신의 작품 앞에서 부끄러워한다. 좋은 작품을 쓰고 싶은데 능력이 안 따라준다고, 울며 자책하기도 한다.
그는 한국의 문인 1백 명이 뽑은 ‘21세기에 남을 고전’에 가장 많은 여덟 편이 추천된 작가다. 그의 소설들은 평온한 물결처럼 읽히지만 읽다 보면 비극을 핀셋으로 잡아내는 것 같다. 해외에 소개하기 위해 그의 글을 번역한(그는 해외에 가장 많은 작품이 소개된 작가 중 한 명이다) 김선희 씨는 “오정희는 조금 설명한다. 그러면서 많이 설명한다”라는 글로 모든 걸 설명했다. ‘드러내면서 숨기는 글쓰기’ ‘쫀쫀하면서도 그윽한, 딱 들어맞는 아귀의 문장’. 그의 글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문장은 많고도 많다.
3, 5 그의 집엔 방마다 가족사진이 걸려 있다. 다정한 포즈로 웃고 있는 가족의 모습은 그가 지향하는 삶의 단면이기도 하다.
4 2002년 가톨릭에 입교한 그의 집 안에는 가톨릭 성물이 참 많다.
애초에 인생이 우리에게 약속한 건 아무것도 없다. 그걸 깨달아가는 게 인생 그는 ‘일물일어 一物一語’, 하나의 사물을 나타내는 단어는 오직 하나밖에 없다는 생각에 집착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렇게 치밀한 글쓰기 탓에 40년 동안 다섯 권의 소설집, 한 권의 장편소설만을 낸 그가 긴 침묵을 깨고 작년 가을 소설집 <돼지꿈>을 냈다. 몇 년 만에 만난 남자 동창이 “행복하니?” 물으니 “애 엄만걸” 하고 웃는 여자, 친정엄마 생일날 기차 시간에 임박해 바지 다려달라는 남편 덕분에 기차를 놓치고 마는 여자, 하필이면 돼지꿈 꾼 날 돈 떼어먹은 시누이 잡으러 가는 기찻간에서 업둥이를 맡게 된 여자, 매일 하루 세끼 밥상에 매달리다 이게 정말 나일까, 인생이 이런 걸까 한숨 짓는 여자…. 그가 그려낸 수많은 ‘여자’는 옆집, 뒷집, 앞집 여자들인 듯하다. 그리고 적당히 늙고 적당히 진부해진 나. 새로이 시작하기에도, 포기하기에도 어려운 30대 중반의 여자.
“세상 살아가는 건, 애초에 인생이 우리에게 약속한 건 없었다, 그걸 깨닫는 일 같아요. 또 세상 누구든 그 애환이나 일렁이는 마음의 무늬는 크게 다를 바 없다는 공감. 여기서 얻는 작은 위안이 행복이겠죠. 삶이 낡아가기 시작했다, 그제야 사는 기쁨을 알았다, 그런 이야기가 바로 <돼지꿈>이에요.” 아, 그는 대체 신에게 어떤 봉사를 하여 이런 깨달음을 얻게 된 것일까.
소설가 그리고 엄마의 시간 작가이기 전에 그는 그의 별명 ‘건전모범주부’처럼 억척스럽고 자식 일에 노심초사하는 모정 각별한 엄마였다. 바깥양반 말을 한 번도 거역한 적이 없는 아내였고, 야간 자율학습 하는 남매의 도시락을 버스로 나르느라 신발 밑창이 다 우그러진 엄마였다. 그러면서도 아들딸이 잠들고 나면 매일 밤 새벽 가까울 무렵까지 밥상 위에 원고지를 펴놓고 쓰고 또 썼다. 서재가 따로 없어 책장으로 뺑뺑 둘린 거실과 부엌에서 글 쓰는 엄마를 보고서야 가족들은 안심하고 잠이 들곤 했다. 그렇게 밥 짓기와 글쓰기를 함께 하며 성실히 살았다. “연년생 남매를 기르는 생활 속에서도 좋은 소설을 써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어요. 새벽 세 시에 연탄 갈 때, 쌀 씻다가 하염없이 창밖을 바라보면서도 가슴이 무너지곤 했어요. 주부와 작가로서의 틈은 얼마나 깊고 넓은가. 하지만 위대한 작품을 남기는 것보다 내가 선택한 삶의 길에 충실하고 싶었어요. 내게서 태어난 생명을 기르는 일의 가치가 결코 덜한 것이라는 생각도 할 수 없었어요. 그렇게 그저 내 깜냥으로, 내 가진 것으로 순간순간 최대치를 산 것뿐이었어요. 돌이켜보면 내게 밥 짓는 손과 글 쓰는 손이 함께 있어 그나마 이 정도 창작할 수 있지 않았나 해요. 유치원 가던 아이가 ‘엄마 바람이 불어. 바람이 무서워. 바람은 어디에 살지?’했던 말에서 <바람의 넋>이란 소설을 썼고, 저녁밥 짓다가 부엌 창문으로 보이는 노을에서 소설 소재를 얻곤 했으니까요.”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라는 그의 원칙이 작가와 엄마 노릇 사이의 평형을 제대로 맞춰주었다. 그렇게 살아온 엄마의 딸내미는 어머니 회갑 기념 문집에 수필을 쓰면서 “밤낮없이 그 어려운 소설 쓰기에 전념해야 할 작가를 우리가 무슨 권리로 24시간 대기조로, 전천후 가정부로 부려먹었나 하며 뼈아프게 반성했다”(<오정희 깊이 읽기> 중)라고 했다.
아들딸 건실하게 키워내고, 남편이 강원대 교수・강원대 총장을 거쳐 강원민방 사장까지 양명한 지금도 가스 요금 걱정하며 하루 두 번씩 연탄을 가는 아줌마일 뿐이다. 지아비와 함께 맨손으로 삶을 일군 아낙네. 엄마 같고 언니 같고, 또 나 같은 여자.
삶의 신념이 ‘사해동포주의’인 그는 생명에 대한 연민으로 가슴 한편이 늘 눈물져 있는 사람이다. 버스 정류장에 버려져 데려다 키운 세 살배기 보름이와, 같이 산 지 12년째인 바우.
나 때문에 힘들면 안 돼 ‘사해동포주의.’ 그가 신념이라고 농담처럼 말하는 것이다. 산책 나갈 때 보온병에 끓는 물을 넣어 다니다가 한데서 추위에 떠는 짐승들의 밥그릇을 녹여주는 그. 산후 조리도 제대로 못한 것 같은 동네 가겟집 개에게 매일 미역국을 끓여다 주는 그. 누군가 그에게 궁핍한 사정을 말하면 학자금으로 모아둔 저금통을 깨고, 돈의 내력이 어떤지 절대 밝히는 법이 없는 사람. 동료 작가들에게 늘 기꺼이 밥을 사면서 “참 가치롭게 쓰네…” 짧게 중얼거리는 여자. ‘나 때문에 힘들면 안 돼’란 말버릇은 그의 됨됨이를 보여주는 말이라고 그를 잘 아는 이들이 귀띔하기도 했다. 이런 그를 두고 아들은 “뭇 생명들에 대한 연민으로 늘 가슴이 아프고 눈물져 있는 착하신 분”이라고 썼다(<오정희 깊이 읽기>에 실린 아들 박정호 씨의 글). 그 측은지심은 그의 소설을 이루는 한 축이기도 하다. 선한 눈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측은지심. 삶과 모든 살아 있는 존재에 대한 그의 예의는 바로 작품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다.
“나 행복하냐고요? 젊은 날의 난 언제나 자의식으로 긴장하고 있었던 거 같아. 자신을 비난하고 학대하고, 그게 참 심했어. ‘안 돼, 안 돼. 이게 무슨 소설이야. 창피하게 괜한 짓 하지 마’ 내 안의 목소리는 끊임없이 속살댔어요. 평범한 데다 재능도 없는 사람이었고, 규범과 틀을 절대로 벗어나지 못하게 생긴 내 성정에 ‘문학 하는 삶의 광기’를 견뎌낼 수 있을까 늘 걱정스러웠고. 젊은 날의 날 보고 정현종 선생님은 실체가 아닌 흑백 증명사진 보는 것 같다고 하셨고, 이상문학상 수상 때 인사하러 간 이어령 선생님은 그렇게 표정 없는 얼굴은 처음 봤다, 무섭다고 했죠. 지금은? 스스로를 인정하기. 그리고 산다는 건 구체적으로 견디어내는 거란 정도 알게 됐어요. 행복하지 않은 게 불행한 건 아니고, 불행한 게 행복하지 않은 건 또 아니란 것도 깨닫게 됐어요. 어쩌면 모든 여자들은 나이 들어가면서 ‘이제 와서 행복과 불행을 따져 무엇 하겠는가’라는 깨달음을 점점 짙게 느끼지 않을까요? 그런데 아이고, 사진 찍는 분들 이렇게 추운데 나 때문에 힘들면 안 돼.”
이야기가 끝이 났다. 문득 젖은 목소리로 누군가 부르고 싶어졌다. 막내딸 시집 보내고 사립문 앞에서 하늘 보는 엄마도, 아침에 가족들이 모두 나간 후에야 시든 시금치처럼 소파에 드러눕는 내 언니도. 그의 데뷔작 <완구점 여인>의 첫 문장처럼 해가 설핏 기울고 있었다. ‘태양이 마지막 자기의 빛을 거둬들이는 시각이었다. 어둠은 소리 없이 밀려와 창가를 적시고 있었다.’ 저 해처럼 이 봄도 오는 듯 머무는 듯 곧 가버릴 것이다. 여자의 날들도 그렇게 낡아갈 것이다. 그러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