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 실직. 상상만 해도 끔찍한 말이다. 나는 이미 5년 전에 중년 실직을 겪었지만 아직 여기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 상처는 아물었지만 그 흔적을 안고 사는 것이다. 당시 나는 다른 실직자들에 비해 비교적 나은 처지였음에도 삶이 뿌리째 흔들리는 격심한 고통을 겪었다. 하물며 이제 이 일을 당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고통스럽고 난감하겠는가. 나는 그들에게 진심으로 깊은 연민의 정을 느낀다. 5년이라는 세월 덕분에 지금 나는 비교적 담담하게 과거를 반추할 수 있다. 한 권의 책으로도 모자라는 얘기들이 나의 뇌리를 스친다. 중년 실직은 과연 내 인생에서 무엇이었나. 2004년 4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직장을 나왔을 때 나를 짓누른 것은 갑자기 무인도에 홀로 버려진 듯한 절박한 심정이었다. 내 존재, 내 생활의 대부분이 갑자기 사라져버렸을 때의 상실감, 절망감, 불안감, 외로움…. 그것은 삶과 죽음의 혼재 混在였다. 만사 萬事가 그렇지만 특히 중년 실직은 당사자가 아니면 그 아픔과 고통을 헤아리기 힘들다. 생존을 위협하는 생계 문제, 정신적 충격, 대인 관계의 단절등…. 개인의 삶에서 최대 위기이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스트레스가 가장 큰 사건은 흔히 배우자와의 사별 死別이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나는 중년 실직이라고 믿는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중년 실직을 겪은 사람들은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실직 초기에 집을 나서면 모든 사람이 ‘회사에서 잘렸군’ 하는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는 것 같은 피해 의식에 가슴 졸였다. 억울하고 분한 마음에 불면증과 고혈압까지 얻었다. 돌변한 인간관계에 대한 심한 배신감을 스스로 삭였다. 가장으로서 제구실을 하지 못한다는 자괴감에 시달렸다. 새 직장, 새 삶을 개척해야 한다는 중압감에 짓눌렸다. 이 밖에도 수많은 정신적・물질적 부담이 뒤따랐다. 하지만 별로 유쾌하지 않은 악몽들을 일일이 열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역시 세월이 약이었다. 시간이 조금씩 지나면서 초기의 충격은 차츰 해소되어 갔다. 죽을 것만 같았던 나 자신은 버젓이 살아 있었다. 오히려 삶의 의욕을 조금이나마 회복하고 있었다. 새로운 상황, 새로운 존재 방식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마치 무인도에 표류한 로빈슨 크루소가 새 환경에 적응해가듯이.
비로소 나는 내게 닥친 중년 실직을 극복하기 위한 실마리를 찾기 시작했다. 그것은 먼저 마음으로부터 중년 실직이 불러온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었다. 정신적, 심리적으로 중년 실직이라는 괴물을 정복하지 않고는 현실적으로 중년 실직을 극복할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사실이 그렇지 않겠는가. 어느 누구도 마음으로부터 적에게 압도 당한다면 결국 적을 이길 수 없는 법이다. 그 작업의 출발은 철저한 자아 성찰 省察이었다.
‘왜 나는 실직했는가?’
‘실직 후 무엇이 나를 그토록 힘들게 만들었는가?’
‘실직으로 내 인생은 무엇이 달라졌는가?’
‘이 시련을 쉽게 극복하는 방법은 없을까?’
이런 성찰은 자연스럽게 ‘왜 사는가’ ‘나는 누구인가’와 같은 삶의 근원적인 문제와 직결됐다. 이 과정에서 나는 지난 인생이 얼마나 가식적이며 형식적이었는가를 깨달았다. 내 삶이 약육강식의 비정한 현실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었는가를 깨달았다. 내 삶을 살기보다 사회가 주입한 가치관에 따라 꼭두각시 인생을 살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동시에 나는 중년 실직의 정체를 파악하는 작업도 병행했다. 적과 싸워 승리하기 위해서는 먼저 적의 정체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피지기 백전불태 知彼知己 百戰不殆 아니겠는가.
‘중년 실직은 왜 발생하는가?’
‘중년 실직은 개인의 문제인가?’
‘중년 실직은 한국적 현상인가?’
‘중년 실직은 최근의 문제인가?’
나는 1년여 동안 1백여 권의 관련 서적을 섭렵하면서 이런 화두 話頭에 몰두했다. 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들의 삶을 관찰하면서 이런 의문들에 집착했다. 그리고 관찰하고 사색했다. 그 결과를 <제3의 인생-중년실직 시대의 인생법칙>이라는 책으로 펴냈다.
이 과정에서 나는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 특히 다른 이와도 나누고 싶은 몇 가지만 언급한다.
첫째, 중년 실직은 개인이 무능해서 생기는 일이 결코 아니다.
둘째, 중년 실직은 평생 직장 붕괴, 신자유주의, 지식사회의 도래, 수명 연장 등 거대한 시대 흐름의 산물이다.
셋째, 현실적으로 누구나 중년 실직을 경험하게 되어 있다. 수명 연장으로 정년퇴직도 중년 실직의 범주에 속하기 때문이다.
넷째, 중년 실직은 전 세계적이고 보편적 현상이다.
다섯째, 중년 실직은 청년 실업, 노후 문제와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여섯째, 중년 실직이 만연한 시대에는 전적으로 새로운 삶의 양식과 새로운 가치관이 필요하다.
일곱째, 중년 실직은 위기이지만 새 인생 개척의 좋은 기회이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건 맞는 말이다. 나는 1년여간의 진통 끝에 인간적으로 더 나은 단계로 발전할 수 있었다. 정신적으로 좀 더 성숙하고 더 여유로워졌다. 현실적 위기에 대해 더 현명하게 대처하게 됐으며 더 강인해졌다. 사회와 역사라는 큰 흐름 속에서 내 자신의 실체를 좀 더 명확하고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결국 마음에서부터 중년 실직을 극복할 수 있었다. 마음부터 중년 실직의 속박에서 자유로워진 것이다. 비로소 ‘회사 밖의 새롭고 넓은 세상’에서 새 삶을 개척할 수 있었다. 과거 내가 살았던 삶과 전적으로 다른 새로운 인생, 진정 내가 원하는 인생을 만들어나갈 수 있었다.
나는 중년 실직의 선배로서 진심으로 조언한다. “절대 중년 실직 때문에 좌절하거나 위축되지 마라.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으로부터 중년 실직을 정복해야 한다. 회사 밖에는 우리가 이전에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 새로운 인생이 기다리고 있다. 끊임없이 도전하라. 그러면 반드시 노력한 만큼 성취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