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으로 빌바오 시의 꿈을 이루다 프랭크 게리는 빌바오 구겐하임 뮤지엄으로 20세기 말 가장 주목받는 건축가가 되었다. ‘빌바오 효과 Bilbao Effect’(빌바오 시가 구겐하임 뮤지엄을 통해 도시 부활에 성공한 데서 비롯된 표현)라는 신조어도 탄생했다. 한국은 물론 전 세계 도시가 건축을 통한 도시 부활의 꿈을 키우며 그 표본으로 삼는 것이 바로 빌바오의 사례이다. 자하 하디드의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파크, 통영시에서 프랭크 게리와 함께 건립을 검토 중인 ‘윤이상 음악당’도 그런 맥락의 하나다.
1990년대 초반 미국 구겐하임 재단에서는 유럽에 미술관을 건립하고자 유치 도시를 공모했고 베니스, 잘츠부르크, 빌바오가 미술관 건립을 신청했다. 그러나 빌바오 시민 90% 이상이 이를 극렬히 반대했다. 엄청난 투자 비용을 회수하기 위해서는 연간 40만 명의 관람객이 찾아야 했는데, 당시 빌바오는 관광객이 거의 없는 도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변화와 도시 재건을 위한 빌바오 공무원들의 확고한 의지는 빌바오에 구겐하임 뮤지엄 유치를 성공시켰다. 개장 첫해 관람객만 130만 명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남기며 빌바오는 도시의 활기를 되찾았다.‘메탈 플라워’란 비유처럼 외장에 티타늄을 사용해 꽃처럼 디자인했다. 뉴욕 구겐하임 뮤지엄의 구조적 한계로 인해 전시할 수 없었던 대형 설치 작품을 전시하도록 기둥을 없애기도 했다. 중앙 아트리움도 뉴욕보다 1.5배 이상 높였다.
프랭크 게리의 또 다른 대표작으로는 ‘게리 하우스’와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이 있다. 게리 하우스는 1978년 LA에 증축한 자신의 집. 담장에서 뜯어낸 철조망, 해변에서 주워온 함석판 등을 이용해 원래 집에 새로운 구조를 덧붙였다. ‘아름답다’는 기준으로 평가하기 어려운 이 특이한 집은 LA 중산층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다. 다양한 계층과 인종의 사람들이 뒤섞여 살고 있는 LA는 빈부의 격차가 심했는데, 잘 지은 저택은 범죄의 표적이 되기 쉬웠다. 그런데 이상야릇하게 생긴 게리 하우스는 ‘잘사는 집’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점점 게리 하우스 같은 집을 짓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그는 이 지역에서 유명해졌다.
빌바오 구겐하임 뮤지엄, 1997년 완공해 ‘빌바오 효과’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내며 스페인 북부의 산업 도시 빌바오의 부활을 가능케 한 기념비적인 건축물이다. 프랭크 게리는 이 건축물로 전 세계에 대중적으로 알려졌다. 시내 쪽에서 바라보면 산을 배경으로 거대한 티타늄 꽃이 햇빛을 받아 관광객의 눈을 사로잡는다. 당시 후안 카를로스 스페인 국왕은 이 건축물을 ‘20세기 인류가 만든 최고의 건물’이라며 극찬했다.
1, 2 건축가 프랭크 게리와 ‘위글 Wiggle 사이드 체어’(1972년). 1929년 캐나다에서 태어나 지금은 미국 LA에 ‘게리 파트너스, LLP’라는 이름의 건축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그는 골판지로 의자를 만들며 자신의 또 다른 창작 세계를 보여주었다. 건축을 실험하는 것이다.
1986년 완공한 피시 댄스 레스토랑. 어린 시절 물고기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디자인한 레스토랑으로 일본 고베에 있다. 건축을 하나의 예술 작품처럼 바라보고 설계한 대표적인 건축물로 레스토랑 앞에 연결 사슬 철망을 엮어 약 20m 높이의 물고기 조형물을 만들어놓았다. 1981년부터 꾸준히 물고기를 등장시키고자 한 프랭크 게리의 제안은 번번이 거절당했는데, 그에게 물고기는 일종의 성취 대상이었다.
LA 다운타운에 있는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은 LA에 문화적 구심점을 만들어준 획기적인 프로젝트였다. 월트 디즈니의 아내 릴리언 디즈니 Lillian Disney의 기부금으로 짓다가 건축 비용의 초과로 잠시 중단되기도 했다. 하지만 도시 내 유력 인사들의 기부금으로 공사를 재개했고, 2003년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을 완공했다. 많은 이들은 이 건물이 완성된 것을 기적이라고 말했다. 총 공사 기간만 16년, 3만여 장의 설계도가 만들어낸 도시 문화의 아이콘이다. 이곳을 중심으로 다양한 문화 행사가 열렸고, 콘서트홀 앞에 난 도로는 ‘자선의 거리(charity street)’란 별칭도 얻었다. 건물의 외형은 항해를 콘셉트로 설계했는데, 메인 출입구에서 바라보면 두 개의 거대한 돛을 펼치고 항해하는 배처럼 보인다. 기존 콘서트홀이나 공공건물에 사용된 남부 식민 시대풍 건축(colonial architecture) 양식의 권위적인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건축적으로도 훌륭하지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2천4백여 석 규모의 메인 콘서트홀이다. LA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본거지이기도 한 이곳은 음향 면에서도 높이 평가받는다. 과학적인 좌석 배치에, 파이프오르간을 무대 뒤편의 중앙에 배치하는 등 뛰어난 음향 효과를 위하여 여러 가지 면에서 신경 쓴 점이 돋보인다.
유년의 기억에서 건축은 시작되다 스스로를 ‘구속받기 싫어하는 유대교 자유주의파’라고 말하는 프랭크 게리. 그는 1929년 캐나다 토론토의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1940년 아버지의 실직으로 인해 경제적 어려움을 겪자 미국으로 건너와 LA에 정착했다. 20대 초반 트럭 운전사로 돈을 벌며 LA 시립대학의 야간 과정을 다니던 중 사우스캘리포니아 대학(U.S.C.)에 입학, 건축적 재능을 인정받았다. 1955년 프랭크 게리는 가구 디자인에 몰입했다. 함석 골판, 베니어판 같은 저렴한 재료를 이용해 가구를 만들었는데, 1970년대 건축에서 그 느낌이 다시 살아났다. 1956년에는 하버드 대학 디자인대학원에 들어갔고, 통계 사회과학을 기반으로 한 건축을 연구했다. 1962년 LA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건축 스튜디오를 설립했다. 프랭크 게리가 세계적 건축가가 되는 데 그의 유년 시절은 중요하게 작용했다. 철물점을 운영하던 외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 그는 톱, 망치, 파이프, 울타리, 함석판, 쇠사슬, 볼트, 나사 같은 금속 자재들을 가지고 놀았다. 또 프랭크 게리의 할머니는 늘 가방 안에 나무 블록을 갖고 다니며 손자와 함께 바닥에 앉아 도시도 만들고 빌딩도 만들며 놀아주었다. 또 한 가지, 프랭크 게리의 작품에 빈번히 등장하는 물고기 역시 그의 유년 시절을 담고 있다. 할머니가 어시장에서 사 온 물고기를 욕조에 풀어놓으면 프랭크 게리는 그 안에 들어가 물고기와 함께 놀았다. 하지만 밤이 되면 물고기는 요리가 되어 식탁에 올라왔고 그의 뇌리에 결코 잊지 못할 충격을 남겼다. 프랭크 게리가 물고기에 집착하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이와 관련한 일화가 하나 있다. 1980년대 건축에서 과거의 ‘재탕’이 유행하던 시절, 프랭크 게리의 동료들은 그리스 신전을 재현해보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때 게리는 “그리스 신전은 의인화한 건축이다. 사람은 3만 년 전에 물고기였다. 앞서가는 것이 불안하다면 더 뒤로, 3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라. 왜 그리스 시대에서 멈추려고 하는가?”라며 자신의 스케치북에 물고기를 그리기 시작했는데, 그때 물고기에서 어떤 영감이 떠올랐다고 한다.
2003년 완공한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 항해를 콘셉트로 설계한 이 건물은 무려 16년이란 세월에 걸쳐 완성했다. LA의 문화적 랜드마크로 건축이 대중에게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서펀타인 갤러리 파빌리온. 런던 서펀타인 갤러리에서는 유명 아티스트와 함께 매년 파빌리온을 만드는데, 2008년에는 프랭크 게리와 함께 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정교한 나무 비행 물체 모형, 해변의 오두막 등에서 영감을 얻어 대형 설치 작품 같은 파빌리온을 지었다. 프랭크 게리 특유의 건축을 해체하는 듯한 양상이 잘 드러난다.
신화는 건축물 하나로 만들어질 수 없다 유명 건축 평론가 찰스 젱크스는 저서 <괴상망측한 건축>에서 프랭크 게리를 한마디로 표현하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너무 다양한 꼬리표가 붙기 때문이다. 찰스 젱크스가 붙인 프랭크 게리의 별명만 해도 ‘함석 골판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산타모니카의 고결한 야만인’ ‘최초의 해체주의자’ 등이 있다. 독특한 사고와 연상 체계 때문이리라.
2005년 시드니 폴락이 제작한 프랭크 게리의 다큐멘터리
빌바오 시를 흐르는 네르비온 강 옆에 위치한 구겐하임 뮤지엄은 어느 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모습이 크게 다르다. 프랭크 게리는 건축을 3차원 입체 조형처럼 생각해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설계했다. 그에게 건축이란 하나의 예술 활동이다. 아울러 건축주의 다양한 요구를 해결하고 경제성, 효율성, 목적성 등을 분명히 갖는 실직적인 창조 활동이다.
프랭크 게리는 건축을 예술로 보았다. 3차원의 건축은 조각품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저렴한 재료를 사용해 마치 미완의 작품처럼 만든 초기 건축물이나, 사선·대각선·예각의 과감한 공간을 구현한 것은 건축의 고정관념을 깨는 작업이었다. 그는 ‘우연한 결과’를 좋아한다. 빌바오 구겐하임 뮤지엄의 대성공도 그가 처음부터 의도한 것이 아니었고,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의 완공도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적이 있었다. 그는 건축을 할 때 처음부터 치밀하게 의도하고 시작하지 않는다. 단, 자신은 건축을 하는 사람이며, 성취해야 할 분명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있다. 건축은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고 클라이언트(건축주), 사회적 맥락, 예산, 건물을 완공하여 살게 되기까지의 시간 등을 고려해야 하는 실질적인 작업이다. 그는 프로젝트를 할 때 건축주를 적극적으로 참여시킨다. 그들이 원하고 좋아하는 것에 대해 최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으려 한다. 왜냐하면 건축가는 ‘건축주가 들인 돈을 좀 더 가치 있게 해주며 그들의 목적에 맞게 봉사해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프랭크 게리는 지난해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건축물 하나로 도시가 살아났다는 ‘빌바오 효과’는 과대 포장된 것임을 지적했다. “빌바오 시에서 나에게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처럼 볼만한 건축을 만들어달라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노먼 포스터에게 지하철역을, 산티아고 칼라트라바(바르셀로나 몬주익 통신탑, 미국 밀워키 뮤지엄 등을 설계한 스페인의 대표 건축가)에게 공항을 의뢰하는 등 유명 건축가들과 함께 건축을 하기 위한 구체적이면서도 통찰력 있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지역을 바꾸고자 하는 의지도 분명했다. 이 모든 것을 한번에 추진할 수 있는 예산과 시간, 인력도 준비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빌바오의 신화는 단순히 건축물 하나가 이뤄낸 것이 아니다.”
- [건축&건축가]도시의 꿈을 이뤄준 건축가 프랭크 게리 자르고 접고 구기고 쌓으며 건축은 시작된다
-
1997년 스페인 북부의 쇠락해가던 산업 도시 빌바오에 구겐하임 뮤지엄이 들어섰다. 그리고 빌바오는 멋지게 부활했다. 그 중심에 건축가 프랭크 게리가 있다. 요즘 한국이 따라 그리는 빌바오의 꿈을 실현해준 인물이다. 그의 건축은 자유롭고, 모든 구조가 해체된 미완의 것처럼 보인다. 그는 건축을 예술이라 한다.
에서 유년 시절을 회상하는 70대 노인 프랭크 게리의 손에는 가위와 두꺼운 종이가 들려 있다. 그의 앞에는 종이를 접거나 구겨서 스카치테이프로 붙여 만든 모형이 있다. 프랭크 게리는 모든 작업을 도면이 아닌 모형에서 시작한다. 한 번에 여러 가지 스케일의 모형을 만들고 컴퓨터 스캐닝 기술로 도면과 투시도를 만든다. 컴퓨터가 없으면 불가능했을 진보된 건축을 위해 그는 자동차나 항공기 설계에 쓰는 프로그램을 응용해 모방할 수 없는 건축물을 만든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9년 3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