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국식 정원 시즌스의 산책로. 이곳의 가드닝은 더없이 아기자기해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정원 구석구석을 누빈다. 시선이 머무는 곳에서는 사계절을 수놓는 꽃과 나무와 풀이 오래전부터 그곳에 뿌리를 내린 듯 자연스럽고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
2 시즌스의 가드닝 숍에서는 화초, 알뿌리뿐만 아니라 이처럼 ‘꽃다운’ 정원 용품도 판매한다. 이제 끝인가 싶으면 또 지갑을 열게 되니 조심하시기를. 그런데 저 장화를 신고 과연 진흙을 밟을 수 있을까?
3 다카라즈카 대극장 앞에 줄을 선 관람객들. 아침 9시 풍경이다. 이날 마주친 관람객의 99.9%는 일본인, 99%는 여성이었다. 개막하면 두 달 이상 지속하는 장기 공연임에도 저처럼 줄을 서서 좋은 자리를 욕심낼 만큼 다카라즈카의 인기는 대단하다.
철도 회사의 아이디어, 우주 소년 아톰, 글로벌 시대의 로컬 마인드, 한 세기의 역사, 4대를 잇는 경영, 연평균 관객 2백만 명, 영국식 정원…. 이 불친절한 키워드들은 무엇을 설명하는가? 패션 브랜드? 근대 박물관? 모두 아니다. 이것은 인구 22만의 도시 다카라즈카(寶塚)에 다가서기 위한 흥미로운 단서들이다. 지난해 가을 국극 탄생 60주년을 기념하는 <국극 갈라>가 열린다는 소식을 접했다. 국극, 낯설지만 분명 알고 있는 말이었다. 열심히 뛰어놀던 어릴 적 담벼락 여기저기에 국극 포스터가 붙어 있곤 했다. 이젠 아련히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는 국극은 창, 춤 등의 전통에 설화, 전래동화 등을 접목한 대중적인 뮤지컬이다. 해방 직후 전성기를 구가하다 미군 문화의 틈바구니 속에서 더 이상의 진화를 멈추었지만, 국극은 불과 반세기 만에 이렇게까지 이질화될지는 몰랐던 남북한 대중문화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국극이 있다면 일본에는 다카라즈카가 있다. 둘 모두 여성만 출연하는 뮤지컬이지만 국극이 딱딱하게 굳어버린 화석이라면 다카라즈카는 진화를 거듭하고 있는 생명체다.
도시 마케팅의 신화, 다카라즈카 원래 다카라즈카는 일본 효고 현 남동부에 있는 도시 이름이다. 오사카에서 전철로 1시간 거리인 인구 22만의 이 도시는 1887년 온천이 개발된 이후 1914년에 철도 회사인 한큐전철이 승객을 유치하기 위해 다카라즈카 소녀 가극단을 결성한 뒤 대극장을 비롯하여 과학관, 수영장, 골프장, 식물원 등의 위락 시설을 갖춰나가면서 지금과 같은 관광 도시로 발전했다. 당시 한큐전철의 창립자인 고바야시 이치조(小林一三) 씨는 일본에 서양 문물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사람들이 전통적인 일본 연극을 외면하고 대신에 춤추고 노래하는 서양의 쇼에 매료되는 것을 보고, 여자 역할까지 남자가 하는 일본의 전통극 가부키와는 정반대로 여배우로만 구성된 극단이 서양과 동양의 요소를 혼합한 뮤지컬을 공연한다면 틀림없이 성공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1914년 꿈에 그리던 극단을 설립하고 1924년에는 자신이 운영하는 한큐전철의 종착역 다카라즈카에 대극장을 지었다. 당시 오사카 사람들은 한큐전철의 기차를 타고 이곳까지 달려와 늘씬한 여자들이 멋진 옷을 입고 춤추고 노래하는 쇼를 보았다. 전통극 가부키 역시 지금까지 건재하지만 그것은 각색을 인정하지 않는 박제된 유물인 반면, 다카라즈카는 내용과 형식 모든 면에서 당대의 유행과 정서를 반영하며 진화해온, 부단한 마케팅과 경영의 산물이다. 1963년에 대극장을 리뉴얼한 이후로 가극단의 영향력은 도시 전체로 퍼졌다. 공연의 명성이 도리어 도시를 알리기 시작하면서 시명 市名 다카라즈카는 그 자체로 공연의 한 스타일을 가리키는 일반 명사가 되었다. 다카라즈카 시의 히트 상품 ‘다카라즈카’는 그렇게, 전례가 없는 도시 마케팅의 신화를 낳았다.
4 다카라즈카 거리 풍경. 여성 관광객에게 특화된 지역답게 시내 곳곳에서 아담하고 예쁜 가게・카페・꽃집・레스토랑을 볼 수 있다.
5 다카라즈카 시내 중심부를 가로지르는 무코가와 강과 S자 모양의 다리. 아침저녁으로 이용하는 시민들의 출퇴근길이지만 관광객들에겐 발걸음을 멈추고 사진을 찍게 만드는 아름다운 볼거리 중의 하나다.
6 다카라즈카 가극단의 대표작 중 하나인 <베르사유의 장미>를 기념하는 동상이 대극장 주변 꽃길에 세워져 있다.
일본제 이종교배 명품, 영국식 정원 시즌스 다카라즈카라는 도시가 외래의 문물을 얼마나 잘 흡수하는 곳인지 알고 싶다면 다카라즈카 대극장에서 멀지 않은 영국식 정원 ‘시즌스 Seasons’에 가보기를 권한다. 자고로 영국식 정원이란 일본이나 프랑스의 정원처럼 그저 바라보며 즐기는 객체가 아니라 그 안에 머물면서 즐기는 자연 공간을 의미한다. 시즌스의 현관 역할을 하는 유리 구조물 안에는 화초와 분재, 알뿌리와 꽃씨 등을 판매하는 가드닝 숍과 요깃거리를 제공하는 레스토랑이 있다. 구경할 것, 먹을 것이 많지만 너무 많은 시간을 쓰면 안 된다. 이곳을 지나야 비로소 본격적인 영국식 정원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시즌스는 다카라즈카의 자연환경에 어울리는 1천5백여 종의 식물을 한껏 활용해 사계절의 다채로운 표정을 흥미롭게 보여준다. 산책로를 따라 난생처음 대하는 꽃과 풀, 나무를 들여다보고 있자니 시간의 흐름에 따라 모양과 색을 달리하는 초목의 생장과 정원의 화음이 잔잔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시즌스는 9000m2에 이르는 만만찮은 면적이지만 아기자기한 산책로와 인공의 느낌이 없는 연못, 19세기 중엽부터 영국 귀족들을 위해 만들었다는 ‘가든 룸’의 적절한 배치 덕에 다리 아플 새도 지루할 새도 없다. 이때 갑자기 떠오르는 건 다카라즈카 가극의 관객 90% 이상이 여성이며 그중 80%가 주부라는 점인데, 가극을 즐기려고 멀리서 기차를 타고 온 일본 여성들에게 이 우아한 풍모의 영국식 정원은 매력적인 일본의 문화일 뿐, 그 안에 서양 콤플렉스 따위는 없어 보인다. 다시 말해 다카라즈카 가극과 시즌스는 서양이라는 외계에 대한 경계를 허무는 순간 새롭게 태어난 일본과 서양 문화의 이종교배가 이뤄낸 명품인 셈이다.
1 일본이 낳은 불세출의 만화가 데쓰카 오사무의 청년기 유작과 캐릭터 인형. 데쓰카는 가극을 좋아한 어머니 덕에 다카라즈카를 보며 소년기를 보냈다. 이곳 명물 인 데쓰카 오사무의 기념관은 그 인연과 역사를 잘 간직하고 있다.
2 시즌스의 레스토랑은 흡사 식물원처럼 천장이 높고 모든 벽체는 유리로 되어 있다. 내부를 장식하는 오브제들은 볼거리이자 상품이다.
일본 최고 상상력의 집대성, 아톰 영국식 정원이 일본의 자연 명품을 보여준다면 일본 최고의 상상 명품을 보여주는 것은 ‘아톰’이다. 다카라즈카 시는 <철완 아톰>의 아버지 데쓰카 오사무의 기념관으로도 유명하다. 시즌스를 나와 몇 걸음 옮기면 척 보기에도 이목을 끄는 기념관과 마주한다. 소년 데쓰카는 가극의 열혈 팬이었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다카라즈카 가극을 보며 자랐다. 게다가 다카라즈카로 이사한 뒤로는 가극단의 대스타였던 아마쓰 오토메, 구모노 가요코 자매가 이웃에 살고 있었던 탓에 한결 더 친밀감을 느꼈다. 오케스트라 반주에 동서고금의 이야기가 망라되는 다카라즈카 가극의 무국적성은 데쓰카가 만화가가 된 이후 그의 작품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데뷔 초기에는 가극단이 발행하는 잡지에 연재 만화를 그린 적도 있으며, 자신의 만화에 대한 독자 서비스의 일환으로 등장인물을 마치 극단원처럼 설정해, 다양한 역할로 많은 작품에 등장시키는 이른바 만화 캐릭터의‘스타 시스템’을 고안해내기도 했다. 캐릭터들은 작품에 따라 메이크업을 바꾸었으며, 초기의 주연급이었던 켄과 로크는 어느 작품에도 출연할 수 있는 프리랜서로 취급했다. 또 단행본 캐릭터를 모아 해설을 곁들여 만든 스타 일람표에는 출연료 등급까지 매겨놓았다고 하니, 다카라즈카가 데쓰카의 상상력에 불을 지핀 셈이다.
오늘날 가극단은 배우, 프로듀서, 작가, 연출가, 작곡가, 무대감독, 연주자 등 총 5백 명에 이르는 인원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 중 배우가 4백 명이다.
3 시즌스의 가드닝 숍은 1851년에 설립한 영국 최고最古의 종묘원 ‘클리프톤’의 일본판이다. 비록 아파트에 살지라도 흥미를 가질 만한 품목들로 즐비하다.
4 번안한 대중가요, 일사분란한 군무와 합창, 계단처럼 솟아오르는 무대장치는 다카라즈카 가극만의 특징이다.
특기할 만한 것은 무대에 서는 배우들이 다카라즈카 음악학교의 졸업생으로만 구성된다는 점인데, 그들은 20대 1 이상의 경쟁률을 뚫고 입학해 2년 동안 연기, 음악, 무용 등을 배운다. 특히 남자 주인공(오토코야쿠)은 춤, 노래, 몸매, 얼굴이 두루 출중한 배우에게 맡겨지기 때문에 경쟁도 치열하고 그만큼 많은 팬을 거느린다. 한 세기 전의 다카라즈카 시는 황폐하기 짝이 없는 풍광에다 50여 명의 기생들이 거주하던, 모든 것이 남성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마을이었다고 한다. 남자들에게 술과 웃음을 팔던 가난한 마을이 이제는 여자들에게 문화와 판타지를 팔아 한 해에만 2백만 명이 넘는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으니 이런 환골탈태, 이런 상전벽해가 또 있을까. 지난 2005년에는 ‘한일 우정’의 해를 기념해 왕년에 한국에서도 인기를 모았던 일본 만화 <베르사유의 장미>를 다카라즈카 버전으로 재구성,내한 공연을 갖기도 했다. 물론 국극이 일본에 간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한편 올해 1월부터는 한국 드라마를 최초로 뮤지컬화한 <태왕사신기>가 무대에 오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