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 경동교회. 기도하는 손의 형상으로 건축 설계를 했다. 도로에서부터 건물 외벽을 따라 걸어 올라가면 예배당이 나온다.
(오른쪽) 한국 건축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건축가 김수근 씨. 초기에 그가 보여준 위엄 있는 건축은 세월에 깎이고 다듬어져 인간 본위의 건축으로 바뀌었다.
건축은 시대의 반영이다 건축에서 천재라는 것이 가능할까요? 모차르트는 8세에 교향곡을 썼습니다. 또 20대에 등단한 소설가나 시인도 있습니다. 그러나 건축가 중에는 8세에 아파트를 설계한 사람도, 20대에 수작 秀作을 남긴 사람도 없습니다. 이것이 순수예술과 건축이 다른 점입니다. 건축은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타당한 삶의 그릇’을 만드는 것이기에 역사와 사회를 모르고 생활을 모르면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한국 건축의 역사 속에는 30세라는 이른 나이에(건축계에서 보면 특히나 더) 데뷔한 김수근이라는 건축가가 있습니다. 그는 1959년 자유당 정부가 남산에 건축할 계획이던 국회의사당 건축 설계 공모에 1등으로 당선되면서 데뷔했습니다. 이 공모전에는 한국의 내로라하는 건축가와 교수들이 참가했는데, 그들을 모두 제치고 1등을 한 것입니다. 선생은 당시 도쿄예술대학에서 유학 중이었고, 이렇게 어린 건축가가 당선된 것에 대해 건축계의 반발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 계획은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고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면서 무산되었습니다. 대신 1963년 자유센터를 세웠습니다. 당시 정권의 사상을 표현하기 위한 기념 건축물로 김수근 선생의 첫 작품입니다.
1 남산에서 내려다본 자유센터와 타워호텔. 국립극장과 마주한 두 건축물은 김수근 선생의 대표작으로 1960년대 사회를 그대로 반영한 건축이다.
2 자유센터. 박정희 정권의 사상을 표현하기 위해 세운 이 건축물은 일종의 모뉴먼트였는데 지금은 웨딩홀로 변했다. 노출콘크리스로 지은 위엄 있는 건축이다.
기념 건축(monument)인 자유센터는 좌우 대칭 구도로 위엄이 있다. 빈 공간도 많고 표현이 과장된 부분도 있다. 김수근 선생이 1960년대 초반에 지은 건축물은 르코르뷔지에의 건축에서 영향을 받아 노출콘크리트로 되어 있다. 자유센터가 그 대표적인 예이며 워커힐 호텔 내 역 피라미드 모양의 힐탑바(1961, 현재 ‘피자힐’), 부여박물관을 비롯해 개인 주택에서도 노출콘크리트에 대한 집념이 드러난다.
김수근 건축이 세간의 화제를 불러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1965년 그가 설계한 부여박물관이 완공되었을 때 어떤 사람이 <동아일보>에 이를 왜색 倭色 건축이라며 고발했습니다. 당시 건축가나 예술가들에게는 ‘빨갱이’ ‘왜색 작가’와 같은 표현은 재앙과도 같은 말이었습니다. 사회에서 완전히 묻혀버릴지도 모를 위기였습니다. 하지만 김수근 선생은 ‘나의 정신적 바탕은 한국의 전통 건축이므로 그것의 영향을 받았다’고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이는 대중이 건축에 관심을 갖게 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부여박물관 사건을 계기로 김수근 선생은 한국 전통문화와 건축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표현의 하나로 한국 전통 건축 소재인 검은 벽돌(전돌)을 사용해 공간 사옥을 지었다. 벽돌은 그의 변화무쌍한 건축을 보여주기에 더없이 좋은 소재였다. 직선과 곡선이 모두 표현 가능했기에. 1980년 설계한 장충동 경동교회를 보면 벽돌을 이용해 좀 더 자유로운 형태를 표현했음을 알 수 있다. 사람이 기도하고 있는 손의 형상을 표현한 것이다. 단 하나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있는 예배당에는 6m가 넘는 길이의 십자가가 걸려 있고 그 위로 강렬한 외줄기의 빛이 유입된다. 예배당은 건물 외벽에 난 길을 따라 돌아 들어간다. 신성한 공간에 들어가기 위한 전이 傳移 장치이다. 1층은 인간과 인간, 2층은 인간과 하나님, 3층은 인간과 자연의 만남을 생각하며 설계했다.
3 경동교회 예배당. 6m 길이의 십자가 위로 외줄기의 강한 햇빛이 들어온다.
전통 건축에서 이상향을 찾다 언젠가 김수근 선생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국회의사당이 무엇인가? 그것은 민의 民意의 전당이다. 민의는 달리 표현하면 국민을 향한 애정이다. 애정이 느껴지는 건축을 보면 국민들도 애정을 갖게 될 것이다. 이와 동시에 위엄이 있어야 한다. 위엄 있는 건축은 권위를 만들어준다.” 이런 의미에서 자신의 건축을 표현하는 언어로 ‘애정’과 ‘위엄’이란 단어를 동시에 사용했습니다. 이는 김수근 선생의 초기 건축 철학이었습니다.
김수근 선생의 건축적 이상은 ‘제3의 공간’ ‘궁극의 공간’으로 표현됩니다. 인간이 자궁 속에 있을 때 가장 편안하고 행복한데, 누구나 본능적으로 기억하고 있는 자궁에 대한 경험을 건축으로 충족시킬 수 있다면 이상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그 답을 우리 전통 건축에서 찾았습니다.
4 위엄을 드러내는 자유센터의 홀. 기념 건축인 터라 유난히 빈 공간이나 과장된 표현이 많다.
5 타워호텔. 2009년 반얀트리 클럽&스파 리조트가 들어설 예정으로 현재 레노베이션 중이다.
1963년 김수근 선생은 최순우 선생을 만났고 그분과 함께 부석사, 병산서원 등의 고건축 답사를 했습니다. 최순우 선생의 저서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에 나온 이야기들을 함께 배우고 느끼는 기회였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전통 건축이 자연에 가장 가깝고 인간적이란 것을 깨달았습니다. 두 분이 전통 건축을 감상할 때 김수근 선생이 무언가 느낀 바를 이야기하면 최순우 선생은 가만 듣고 있다가 ‘제대로 볼 것을 보았구나’ 싶을 때에야 비로소 “알았다” 한마디를 던지셨습니다. 그런데 자꾸 엉뚱한 얘기를 하는 것 같다 싶으면 그곳에 또 데려가셨습니다. 최순우 선생은 젊은 건축가 김수근이 전통 건축의 본질을 보게 해주었습니다. 이후로 김수근 선생은 부단히 인간적인 건축을 추구했습니다. 사람들이 김수근 선생의 건축을 보고 ‘사람을 감싸 안는 건축’이란 표현을 썼던 것도 같은 맥락인 것입니다. 그런 노력의 결정체가 원서동에 있는 공간 사옥입니다. 자유센터라는 첫 작품에서 추구했던 젊은이의 기개가 세련되게 다듬어져 아담하고 겸손한 공간으로 구현된 것입니다.
1 마산 양덕성당. 무신론자였던 건축가 김수근에게 교회란 사람들을 한없이 감싸 안아주는 모성의 공간이다.
향년 55세에 작고한 김수근 선생. 그가 추구했던 ‘사람을 감싸 안는 건축’은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건축의 이상이 아닌가 싶다. 노출콘크리트에서 벽돌에 이르기까지 그의 변화무쌍한 작품은 다양한 건축 양식과 소재의 실험이기도 했다.김수근 선생은 비단 건축계에서뿐만 아니라 문화계에서도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1966년에는 건축, 도시, 예술을 통합하는 전문지 <공간>을 창간해 건축을 장려함은 물론 다양한 문화적 이슈를 발굴하고 후원했다.
* 김수근 선생의 이야기를 들려준 김수근문화재단의 김원 이사장은 현재 광장도시건축 대표로 김수근 선생의 대를 잇는 한국 건축의 2세대이다.
2 공간 사옥. 김수근 건축의 중요한 원리를 집약해놓은 수작으로 평가된다.
“1970년대에 김수근 선생이 계시던 원서동 공간 사옥에 자주 갔었다. 이렇다 할 목적도 없이 그저 놀러 다녔지만, 이곳에 가면 예술의 향기가 느껴지고 가슴속에 맑은 샘물 같은 것이 고이는 것 같아 좋았다.”_<당신이 유명한 건축가 김수근 입니까?> 중 황병기의 글
- 사람을 감싸 안은 건축을 세우다 한국 건축의 1세대 김수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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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건축의 역사에 획을 그은 고 김수근 선생. 그가 세운 자유센터, 타워호텔, 세운상가, 경동교회, 공간 사옥 등은 1960~80년대 우리 사회의 시대상을 담고 있다. 그런데 세운상가는 헐리고, 자유센터는 웨딩홀이 되었고, 타워호텔은 해외 리조트를 들이기 위해 개・보수 중이다. 경제 논리에 밀려 유실되고 있다. 이를 가장 안타까워하는 김수근문화재단의 김원 이사장이 김수근의 건축을 소개한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9년 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